묻지 마라 갑자생/김현준
2012.08.11 09:03
묻지 마라 갑자생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속담이 있다. 갑자년은 60년 한 갑甲의 맨 첫해다. 갑자년에 태어난 사람은 머리가 영리하고 빼어난 인물이 많기 때문에 그 앞에선 '묻지 마라'고 하였다 한다. 똑똑한 갑자생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유치한 질문은 하지마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에 와서 '묻지 마라 갑자생'의 뜻은 체념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생과 사, 행과 불행도 묻지 마라는 갑자생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24년 갑자생이다. 1924년에 태어난 갑자생들은 1944년 만 20세가 되자 일제의 강제징집령에 따라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갑자생들은 또다시 한국전쟁에 휘말렸다.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세대로 출생자의 대략 2/3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버지는 1944년 3월 징집된 갑자생 동갑내기 10여 명과 함께 트럭에 실려 군산항에 도착하였다. 하루를 지체한 뒤, 수백 명의 징집자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른 봄날이었지만 바닷바람은 모질고 차가웠다. 배는 며칠을 운항하여 시모노세끼항에 닿았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의 한복판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뒤 기병대에 배치되었다. 고향에서 마차를 끄는 말을 몇 번 보았을 뿐인데, 그렇게 많은 말은 처음 보았다. 전쟁터를 누빈 군마들이라 성질 또한 고약했다. 정신을 팔고 뒤로 접근하면 뒷발로 걷어찼고, 말 앞 쪽으로 가면 머리로 들이받았다. 기병대에서는 말을 병사보다 중히 여겼다. 하물며 조선인 군속들이야 어찌 대했을까? 살아있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는 군마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다.
이 말들을 쫒아서 일본 본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일본인 병사들에게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툰 일본어 때문에 의사소통에 애를 먹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어를 잘 했더라면 일본군 군조에도 올랐겠지만,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고 일본인들에게 아부를 해야 되니 무엇이 잘 한 것인지 몰랐다.
일본 군인들을 따라 동남아 지역에 들어간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부리는 각종 공사 감독을 맡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종전이 된 뒤 전범재판에서 현지인들의 증언으로 중형을 받은 한국인들이 꽤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 북단 호카이도까지 이동을 했다.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였을까 아니면 미군의 공격을 대비하는 부대였는지 모르겠다. 말단 조선인에게는 정보가 없고 어쩌다 주워들은 소문뿐이었다. 자신들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니까.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군대의 형편은 날로 어려워졌다. 세끼 식사를 찾기 힘들었고 하루 한두 끼 잡곡밥도 감지덕지했다. 미군의 공습은 점점 치열해졌다. 뭔가 끝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아 만주였다면 탈출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이라 여겼을 테니까.
아버지는 지나온 일을 자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일제 징용이 자랑거리가 아닌데다, 모진 전장에서 살아온 삶을 내세울 게 없었다. 띄엄띄엄 하신 이야기를 어머니가 홀로되신 뒤 회상하며 몇 마디씩 들려주신 것이다. 그나마 나는 명절 때나 뵙고 바쁜 듯 왔다가 휑하니 떠나고 말았으니, 아버지의 징용 행적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녀들에게 틈날 때마다 가족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거의 삶을 포기한 상태까지 내몰렸다가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의 끈을 놓지 않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인솔해서 차량과 배에 태워줄 것인가. 누가 식사를 마련해주며, 잠자리를 챙겨줄 것인가. 전쟁보다 힘든 역경을 헤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그마치 반년에 걸친 문전걸식이라고나 할까. 살아있는 것만, 귀국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다. 몇몇 마을에서 징용 간 갑자생은 신 씨 아저씨와 아버지 두 분만 살아오셨다.
나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고 일본어를 배운 일도 없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아버지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효심이라고나 할까?
며칠 뒤 광복절에는 태극기를 걸어야겠다. 아버지의 67년 전 광복을 기리는 뜻 깊은 광복절이다.
동메달을 건 런던올림픽 남자축구팀이 한일전에서 2:0으로 완승을 한 게 자랑스럽고 상쾌하기 짝이 없다. 금메달과 다를 바 없는 동메달이다.
(2012. 8. 1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속담이 있다. 갑자년은 60년 한 갑甲의 맨 첫해다. 갑자년에 태어난 사람은 머리가 영리하고 빼어난 인물이 많기 때문에 그 앞에선 '묻지 마라'고 하였다 한다. 똑똑한 갑자생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유치한 질문은 하지마라는 해석도 있다.
현대에 와서 '묻지 마라 갑자생'의 뜻은 체념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생과 사, 행과 불행도 묻지 마라는 갑자생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나의 아버지는 1924년 갑자생이다. 1924년에 태어난 갑자생들은 1944년 만 20세가 되자 일제의 강제징집령에 따라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갑자생들은 또다시 한국전쟁에 휘말렸다.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세대로 출생자의 대략 2/3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버지는 1944년 3월 징집된 갑자생 동갑내기 10여 명과 함께 트럭에 실려 군산항에 도착하였다. 하루를 지체한 뒤, 수백 명의 징집자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였다. 이른 봄날이었지만 바닷바람은 모질고 차가웠다. 배는 며칠을 운항하여 시모노세끼항에 닿았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의 한복판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뒤 기병대에 배치되었다. 고향에서 마차를 끄는 말을 몇 번 보았을 뿐인데, 그렇게 많은 말은 처음 보았다. 전쟁터를 누빈 군마들이라 성질 또한 고약했다. 정신을 팔고 뒤로 접근하면 뒷발로 걷어찼고, 말 앞 쪽으로 가면 머리로 들이받았다. 기병대에서는 말을 병사보다 중히 여겼다. 하물며 조선인 군속들이야 어찌 대했을까? 살아있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아버지는 군마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다.
이 말들을 쫒아서 일본 본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일본인 병사들에게 받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툰 일본어 때문에 의사소통에 애를 먹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일본어를 잘 했더라면 일본군 군조에도 올랐겠지만,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고 일본인들에게 아부를 해야 되니 무엇이 잘 한 것인지 몰랐다.
일본 군인들을 따라 동남아 지역에 들어간 한국인들은 현지인들을 부리는 각종 공사 감독을 맡아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종전이 된 뒤 전범재판에서 현지인들의 증언으로 중형을 받은 한국인들이 꽤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 북단 호카이도까지 이동을 했다.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였을까 아니면 미군의 공격을 대비하는 부대였는지 모르겠다. 말단 조선인에게는 정보가 없고 어쩌다 주워들은 소문뿐이었다. 자신들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니까.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군대의 형편은 날로 어려워졌다. 세끼 식사를 찾기 힘들었고 하루 한두 끼 잡곡밥도 감지덕지했다. 미군의 공습은 점점 치열해졌다. 뭔가 끝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아 만주였다면 탈출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을 목숨이라 여겼을 테니까.
아버지는 지나온 일을 자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일제 징용이 자랑거리가 아닌데다, 모진 전장에서 살아온 삶을 내세울 게 없었다. 띄엄띄엄 하신 이야기를 어머니가 홀로되신 뒤 회상하며 몇 마디씩 들려주신 것이다. 그나마 나는 명절 때나 뵙고 바쁜 듯 왔다가 휑하니 떠나고 말았으니, 아버지의 징용 행적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녀들에게 틈날 때마다 가족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버지는 거의 삶을 포기한 상태까지 내몰렸다가 미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생의 끈을 놓지 않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인솔해서 차량과 배에 태워줄 것인가. 누가 식사를 마련해주며, 잠자리를 챙겨줄 것인가. 전쟁보다 힘든 역경을 헤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그마치 반년에 걸친 문전걸식이라고나 할까. 살아있는 것만, 귀국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다. 몇몇 마을에서 징용 간 갑자생은 신 씨 아저씨와 아버지 두 분만 살아오셨다.
나는 일본에 가 본 적이 없고 일본어를 배운 일도 없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아버지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효심이라고나 할까?
며칠 뒤 광복절에는 태극기를 걸어야겠다. 아버지의 67년 전 광복을 기리는 뜻 깊은 광복절이다.
동메달을 건 런던올림픽 남자축구팀이 한일전에서 2:0으로 완승을 한 게 자랑스럽고 상쾌하기 짝이 없다. 금메달과 다를 바 없는 동메달이다.
(2012.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