읾어버린 여행가방의 한 대목
2011.02.04 22:56
'잃어버린 여행가방의 한 대목'
음력 설까지 쇠었으니 이제 확실하게 한 살을 더 먹었다.
이 나이까지 살았으니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한다.
재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내가 쓰고 살던 집과 가재도구들을
고스란히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의 최후의 짐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수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 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박완서 기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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