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박사

2007.05.11 16:23

김영교 조회 수:421 추천:33

최고의 의술로 최다의 서민을 섬기며 산 하나님의 손 : 장기려 박사 장기려 하면 한국의 슈바이쳐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운영하는 청십자 병원에 한 농부가 입원하였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하여 치료를 끝내고도 입원비가 밀려서 퇴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농부는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하소연 하였습니다. "원장님, 모자라는 입원비는 돈을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이제 곧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은 장기려 박사는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그냥 살짝 도망치시오."라고 마치 남의 병원의 환자에게 인심이나 쓰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받아야 퇴원을 시켜 주겠다고 하는데 낼 돈이 없으니 할 수 없는 일 아니오. 도망을 쳐서라도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그 날 밤, 장기려 박사는 서무과 직원이 모두 퇴근한 다음에 병원 뒷문을 살그머니 열어 놓았습니다. 얼마 뒤 농부와 그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장기려 박사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사시오." 농부 내외는 자신들을 위하는 장기려 박사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 눈물이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환자가 사라졌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들어 왔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방에 사라졌습니다." 장기려 박사가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은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 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서 마냥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이 과장도 알다시피 지금이 한창 바쁜 농사철 아니오." 서무과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원장실을 나왔습니다. 몇 걸음 옮기다 원장실 쪽을 힐끔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조금 전과는 달리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여느 병원보다 월급이 적은데도 직원들이 즐겁게 일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한학자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만 해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또 10년 연배였던 함석헌으로부터 받은 영향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습니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장인의 권유로 백인제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고 1940년 9월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연합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가 병원장에까지 취임하였지만,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텃세때문에 불과 두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희자되고 있습니다. 해방후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넌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쟁중 1950년 12월 차남 가용과 남하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 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했지만 "결혼은 오직 한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 3 육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6월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25년간 복음병원에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된 동기를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 서울 카톨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여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습니다. 그후 1987년부터는 '종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불리는 비교파적, 비조직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습니다. 장기려박사는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료활동 의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어느 날, 장기려 박사는 이 모임에서 덴마크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됩니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 장기려 박사는 1968년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복음병원 분원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게 됩니다. 화상을 입은 생전의 채규철 여기서 이 운동을 같이 시작한 채규철님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채규철님을 만난 것은 언론계에 있을 때입니다. 한국 농촌운동을 위해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온 후 자동차 사고로 전신 3도 이상의 화상을 입고 28차례나 수술하여 살아 난 그가 장기려박사와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와 같이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문둥이 인줄 알고 내 쫒김을 당한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두밀리자연학교를 운영하다가 심근경색으로 2006년 69세로 별세했습니다.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자기를 향해 친구가 들려 준 말이 자기를 살렸다고 나에게 늘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Man shall not die until his work has done.(사람은 자기 사명이 끝나기 전에 죽지 않는다.) 장박사가 채규철님과 벌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운동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아프지도 않은데 미리 돈을 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기려 박사를 보고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청십자 운동을 벌인지 4년이 지난 1975년, 드디어 청십자 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처럼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생을 살겠습니다." 병원 간판을 달며 장기려 박사는 하나님께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습니다. 선생님은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과 재능은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장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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