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끓여낼 ‘도가니’를 / 유지나

2011.10.07 15:30

김영교 조회 수:399 추천:34

모두 알고 있죠, 절망을 희망으로 끓여낼 ‘도가니’를 / 유지나

    
가을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계절이지만 곧 떠나버린다. 세상에 좋은 것들은 오래오래 머물지 않기에 허전함이 밀려온다. 사람들은 좋았던 것이 반복되기를 욕망한다. 고맙게도 자연은 순환법칙을 따라 돌아가니 가을은 다시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사는 자연법칙처럼 조화롭게 돌아가지 않는다. 사노라면 절망적 상황에 내몰리기도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온갖 궁리를 짜내도 더 이상 좋을 게 없다는 확신이 서면 그런 막막함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이 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독한 절망을 끝내는 방책으로 삶과의 이별을 선택하기도 한다.

눈이 시리도록 황홀한 하늘 풍경을 투영하는 강물도 가을이면 더욱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득한 물결을 뚫고 이틀에 한 명 꼴로 한강에 투신자살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며칠 전에 들었다. 지난 5년간 892명이 삶과의 이별식을 한강에서 치른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살만하다는 국가들 모임인 OECD에 들어 있지만, 자살률 1위를 유지하며 살아내기 힘든 국가로도 손꼽히고 있다. 최근 발표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살시도 현황에 따르면, 소득상위 10%에 속한(10분위) 이들의 자살시도가 지난 3년간 10%씩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크기가 살아갈 의지와 무관하다는 뜻으로 새겨볼 만한 비극적 자화상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때 미국의 가구당 부채액을 넘어선 한국의 가계부채액 증가 소식은 시대의 절망적 우울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폭락하는 증시 전광판 앞에 선 얼빠진 얼굴 사진을 보며 인도영화 <세 얼간이>를 떠올려 본다. 엘리트 공학도를 길러내는 인도 명문 공대 학장은 자동차 경주처럼, 둥지 밖으로 다른 알들을 떨어뜨리면서 부화하는 뻐꾸기 되기 생존법칙을 강요한다. 그런 생존법칙을 못따라 잡은 학생들의 자살시도가 이어진다. 반면 이런 승자독식 인생론에 저항하며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란초와 두 친구는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얼간이들이다. 자살한 학생의 장례식장에서 란초는 학장에게 항의한다. 이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고. 이런 현실은 영화 속 허구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공학계열인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과 사회 전반적 분위기로도 연결된다. 더구나 반값 등록금 투쟁하던 학생들이 물대포를 맞고 끌려가는 모습은 시대의 우울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래서일까? 유독 <세 얼간이> 다운로드판이 한국 네티즌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자 뒤늦게 영화를 수입해서 극장에 거는 예외적 상황이 발생했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세상을 감동시키고 있다.

정신의 줏대인 얼에 맛이 간 얼간이판 세상살이, ‘일등되기=돈=성공’을 추종하는 길과  자신의 내면과 접속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방식 중 어느 쪽이 진짜 얼간이인지 사유의 계절에 되새겨 볼 문제이다. 얼을 간직하며 살아내기도 힘든데, 절망의 지뢰밭으로 점철된 일등되기 경주로 내모는 사회와 교육 시스템은 가진 자, 못가진 자 모두를 경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 <도가니>를 각색한, 영화 <도가니>가 잊혀진 장애인 성폭력문제를 학교재단 비리와 함께 재수사하도록 물꼬를 텄다. 성폭력 가해자가 여전히 강단에 서는 부당하고 억울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공권력과 저널리즘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문제를 다시 끓여내고 있는 <도가니>에서 진실 영화의 힘을 발견한다.

시월, 깊어가는 짧은 가을의 낭만을 즐겨야하는 이 계절, 자살이 급증하는 사회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한 것은 천만 다행이다. 부당한 세상법칙을 나즈막하게 격정적으로 읊어내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모두 알고 있지(Everybody Knows)>를 다시 듣는다. “모두 알고 있지/ 가난한 이들은 늘 가난하고/ 부자는 더 부유해지는 걸(...)/ 모두 알고 있지 배가 새고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선장이 거짓말 했다는 걸/ 모두 느끼고 있어 참담한 기분을.” 그러니 어찌할 것인가? 라디오에서 가을예찬과 더불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줄기차게 들려주는 아름다운 가을날, 눈 뜨기 힘들 정도로 청아하게 시린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어 낼 밖에. 그건 절망이란 재료로 희망을 끓여내는 도가니를 빚어내는 것, 노마디즘의 철학자 들뢰즈의 말처럼 ‘저항으로서 창작행위’일 것이다.


■ 글쓴이 /유지나(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 다양성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 저서 :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등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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