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시문학

2005.05.16 07:29

한길수 조회 수:2047 추천:90

1. 들어가며

옛시인들의 한시를 살펴보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현대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며 현대를 살아가는데 필요불가분의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시인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국문학 사상 고려 당대까지는 가장 방대한 규모의 개인 시문집을 낸 이규보(李奎報)를 살펴보고 싶었다.
당시 무신 집정 시대가 내포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에 직접 체험을 통한 문학과 정치를 통해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실천 의지를 보였던 중세 지식인의 대표적인 한 인물을 보면서 그 시대는 물론이고 그의 시정신(詩精神)을 배우고 익혀 오늘날의 시적 환경과 미래 지향적인 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 이규보의 생애와 시대상황.

동방 최고의 시인이요 문인이며 정치가인 이규보는 1168년 (고려 의종 22년) 12월 16일 첫울음을 개성 땅에 울렸다. 이규보의 자(字)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 ),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이다. 이규보가 태어날 당시의 시대상황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호족(豪族)과 무신(武臣)들의 도움을 받아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하고 삼국(三國)을 통일(統一)을 한 후,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건국공신이나 그 덕택에 관위(官位)에 오른 공신의 자손들은 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을 견제하는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 왕들은 이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역대 왕들의 이런 정책은 효험이 나타나 문신보다 무신을 천시하는 풍조를 낳게 되었고 이런 풍조는 무신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오랜 태평으로 문약(文弱)의 폐풍이 나타난 데다 왕의 무능 및 실정과 경박한 문신들의 노골적인 무신멸시 등으로 누적되었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무신난(武臣亂,1170)이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무신들의 문신에 대한 적대감정은 문신의 마구잡이 처형으로 나타나서 거사 당일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부하들에게,「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들은 비록 사리(胥吏)라도 죽여 씨를 남기지 말라.」고 명하여 수많은 문신들이 무고히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국정은 무신들이 독단하게 되었다. 무신들의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무신 상호간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이의방이 이고를 죽였고, 정중부가 다시 이의방을 죽이고 전권을 장악했다가 경대승에게 죽임당하였고, 경대승이 병사한 후에는 이의민이 폭정을 계속하다가 최충헌 형제에게 죽임당한 후, 최씨 정권이 4代 6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규보는 태어났고 성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벼슬길에 오르지만 아버지를 여의고, 개성 북쪽에 있는 천마산(天魔山)에 들어가 잠시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모든 것은 다 뜬구름과 같은 것이기에 그는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부르면서 천마산 골짜기에 싱그러운 산의 정기를 마시며 심신을 수양하고 시와 벗을 삼았다. 후에 벼슬길에 올라 몽고의 외침을 막는데 헌신하기도 했고 귀양가기도 했다가 1237년 70세에 이규보는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 장사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례부사한림원사 태자태보(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하는 관록을 보였다. 동방의 시성(詩聖) 이규보는 74세로 그의 시적 삶을 마치었다. 그의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다.


3. 이규보의 문학사상
  
1) 연정이발(緣情而發) 증언으로서의 문학
이규보는 글의 연원을 정에 연유한 마음의 격동에 두고 일단 마음 속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서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이상국집』 27 여박시어서서(與朴侍御犀書) 즉 시마(詩魔)에 매이면 병중에도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것이 그의 시세계였다. 천고에 남을 시경을 개척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심간을 깎으며 여위는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인 것으로 차차 고질이 된 것을 스스로 알지만 능히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어서 시를 지어서 상심한다고 토로했다.
시마는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하고, 시는 조화, 신명의 영묘함을 누설하며, 시는 거침없이 취하고 읊어 끝이 없이 자부심을 갖게 한다. 또한 시는 상벌을 멋대로 하며, 시는 영육을 다 여위게 하고 상심시킨다고 봤다. 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저주하고 쫓아버리고자 했다. 이규보의 문학사상의 일면은 시의 본질이 감흥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본원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의 젊은 시절인 26세 때에 국가, 민족의식의 바탕으로 지은 영웅서사시<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는 병서(倂序)가 붙어있다.
역사시(歷史詩)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종래에는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만을 묶어서 '영사시'(詠史詩)라는 갈래로 다루었다. '동명왕편'시는 한국 서사시의 효시로서 이규보의 어느 작품보다도 빈번하게 논의되어 왔고 또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동명왕편의 구조에 관하여 살펴보면 본시 부분을 축으로 해서 병서부(幷序部), 서두부(序頭部)는 결미부(結尾部)와 대응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왕편'에는 삼계(三界)가 설정되어 있고, 인물의 유형도 다채롭다. 그리고 작품의 구조를 보면, 단조롭기 쉬운 이 개인의 전기적 기술에 플롯을 전개시키고 있다. 주인공과 상대역과의 이러한 대결을 통하여 사건이 신속하게 전환되는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긴박감과 흥미를 더했다.
  
2) 어의창신론(語義創新論)의 주창 -신의(新意) 신어(新語)
이규보는 고려시론의 양대 흐름의 하나인 신의론을 주창한 인물이고 이인로는 용사론을 편 인물이라는 논의가 일반화되었다. 시를 창작해 가는 가운데 체험으로 깨닫고 깊이 사색하여 체득한 바로 백운소설에 나와있는 구불의체(九不宜體)의 병폐를 들고 이를 모두 극복한 뒤라야 시를 논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설의(設意)임을 강조하고 의(意)란 기(氣)를 위주로 하는데 그것은 타고난 천분(天分)이요 성정(性情), 기질(氣質)이기 때문에 인위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기상의 높은 경지와 후천적 공력에 따른 세련된 격조가 결합되었을 때 뛰어난 시가 산출될 수 있음을 강조했으며 시를 지은 뒤 발표하기까지의 시인이 취할 자세를 말하는 탁마(琢磨)는 철저한 추고(推敲)를 거쳐서 객관화한 뒤에야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마다 전영력(全靈力)을 쏟아 넣는 정성으로 시적 형상화의 성취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감수하는 자세로 시를 아끼는 태도로 임해야만 함을 설파했다.
그의 시창작론은 ① 시상단계로 의기(意氣)를 중시하였고 천성적 재질에 달렸다고 보았다.
② 구상단계는 집착하지 말고 변화자재한 구상이 요구됨을 지적하고 있다.
③ 철사(綴辭)단계는 의기(意氣)와 철사의 이상적인 결합에서도 청경(淸警), 웅호(雄豪), 연려(姸麗), 평담(平淡) 등 중체(衆體)를 구비할 때 우수한 체격을 형성한다고 보고 독창적 신어를 지어내는 쪽을 택했다.
④추고, 발표단계는 주견의 바탕에서 타인의 비평, 질정(叱正)을 받아들이고 철두철미한 추고를 거쳐서 객관적으로 보아 병폐,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용사와 독창성, 환골탈태(換骨奪胎), 압운(押韻), 난해성, 논리성, 참신성, 윤리성, 표현의 세련도 등 시적 형상화의 문제와 어려움을 체험과 심사숙고를 거쳐서 밝혀 두고있다.

시를 짓는데 있어 더욱 어려운 바는 시어와 의경(意境)이 함께 아름다움을 얻는 것이요, 함축한 뜻이 참으로 깊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욱 그윽하나, 뜻만 서 있고 시어가 원숙하지 못하면 꺽꺽하여 그 뜻을 펴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규보의 문학사상은 어느 한쪽에 편벽되지 않고 설의(說義)나 시어(詩語) 사용에 있어서 모두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창신론(創新論)을 우선하여 전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3) 이문화국(以文華國)으로서의 문학
시 300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논어 권 2) 치자(治者)의 도(道)로 군림한 유학은 양반 사대부들의 필수적 교양이요 학문세계였기 때문에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은 시대를 넘어 엄존하였다. 문인관료들의 문학, 이른바 관각문학이나 처사적 문학에 있어서 도문일치(道文一致)의 경향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자호할 만큼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였던 이규보는 부지런히 그리고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닦았다. 그리하여 14살 때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6살 때 아버지가 수주(水州,지금의 경기도 수원)로 벼슬살이를 나갔으나, 이규보는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개성에 머물면서 이 이부(吏部는 벼슬이름)에게 수학하고 학업에 정진하며 과거준비를 하였다. 이규보는 16살에 처음으로 사마시에 응했으나 낙방을 하고 다시 18살 때에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제 2의 쓴잔을 또 마셔야 했다. 그 후에, 수주에 있으면서 또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하였다. 하지만 비록 과거에는 떨어졌지만 벌써 그의 시명(詩名)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0살 때에 또 사마시에 낙방, 그러나 그는 청운의 뜻을 버리지 않아 2년 후인 22세에 장원급제라는 최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1199(신종 2)년은 이규보에게는 인생 최대의 해이었다. 그의 나이 32세로 과거에 장원한지 10년만의 일이다. 전주목사록 겸 서기(全州牧司錄兼書記)가 그의 직함이었다. 하지만 임기인 3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1200년(선종3년)에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군웅할거의 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진주, 합주(陜州, 지금의 협천), 운문(雲門, 지금의 청도), 초전(草田, 지금의 위산),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 울진, 태백산 등지를 중심으로 여러 도당들이 서로 호응하기도 하고 침공하기도 하는 등 민심을 동요시키는 전운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중 동경중심의 민란은 이비(利備)란 자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운문의 패좌( 佐)를 두목으로 한 일당이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왕업은 거의 다하고, 신라가 반드시 부흥한다'라는 구호아래 각지에 격문을 돌리고 주군을 침략하였다. 최충헌은 이 민란을 철저히 토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일으키었다. 관군의 총지휘관인 김척후는 장병들이 피로하다는 핑계로 이들과 대항하지 않으니, 적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모든 사람은 일신의 몸만 아끼느라 도망갔으나, 이규보는「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는 스스로 종군의 길을 택하여 병부녹사겸수제원(兵部綠事兼修製員)이 되어, 눈 내리는 12월 동경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35세였고,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대체로 상중에는 외지로 나가지 않으나,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떠난 것이다. 김척후를 대신하여 새로 파견된 중도사 정언진(丁彦眞)은 동경부근에 이르러 계략을 폈다. 서낭당의 문당과 밀약하여, 거기에 기도하러 오는 이비의 부자를 체포하고, 이어 운문산에 대장 함연수(咸延壽)를 보내어 패좌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이로써 경상도 지방의 민란은 그 종말을 거두었다.
이 때에 이규보는 운문산에 주둔하면서 난적들을 무찌르기에 온갖 정열을 다 바쳤다. 도통상서부사시랑(都統尙書副使侍郞)에게 서(書)를 올려 전사한 장졸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또한 논공행상을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상부에서는 이 글을 받자, 이규보의 애민과 논리 정연함에 감복되어, 각 부대에 쌀을 보내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게 하고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로써, 난적들이 들끓는 와중에도 천륜을 다하고 인륜을 다하여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소망을 알 수 있다. 1204년(신종7) 경상도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개선을 했으나 논공행상에서 이규보는 제외되었다. 그는 외직 하나 얻지 못해,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며 문을 닫아걸고 출입도 하지 않았다.  
최충헌은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문사들을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문인들을 불러 시연(侍宴)을 베풀고 문사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당시의 쟁쟁한 문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진강후모정기(晋康侯茅亭記)>가 최우수작품으로 뽑히어 현판에 새겨 걸어 놓는 최대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2월에 이규보는 직한림원(直翰林院)에 권보(勸補)되었다. 그동안 바라던 벼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벼슬은 날로 높아져, 50세에는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문관으로 최대의 영예인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해인 51세에는 좌사간(佐司諫)이 되었다. 하지만 52세 되던 1219년(고종 6)에 팔관하표(八關賀表)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탄핵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오(自娛)'라 이름짓고,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며 노력하였다. 그는 계양에 있으면서 최우에게 죄를 풀어주기를 비는 시를 지어 바쳤다. 그때는 이미 그를 귀양살이 보낸 최충헌이 죽은 다음해의 일로, 국원을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잡고 있던 때이다.
이규보는 1년만에 귀양살이가 풀려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가 되어 복직하였다. 이 모두는 최우의 덕이었다. 다시 그의 벼슬은 날로 올랐다. 그러나 벼슬이 오를 때마다 양사표(讓辭表)를 지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의 붓을 아낀 임금은 그를 쉽게 벼슬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호화스런 벼슬살이는 계양에서 풀려난 지 10년 만에 또 한번 붓이 꺾이게 되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이다. 역시 팔관회 연회가 규례에 어긋났음이 문책되어 고도인 위도( 島)로 유배되었다. 이번은 완전 삭탈관직되어 절도에 위리된 것이다. 그는 위도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이듬해 정월에 감형되어 유배지가 그의 고향인 황려로 옮겨졌다가 65세 되던 해 4월에 완전히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자지제고(正議大夫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이 때가 바로 몽고가 침입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때이다. 그는 늙은 몸이었으나 몽고군을 막는 데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4. 작가의식

문학이 작가의식의 소산이요, 작가란 몸담고 살아가는 역사적 운명과 현실에 일상인들보다 민감하고 심각하게 반응하여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갖는 지성이라고 볼 수 있다면 역사와 현실, 세계와 자아가 하나의 수용체인 동시에 발산체로 대두되는 것이다.

1) 국가 민족의식
동명왕편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규보는 유교의 합리적인 사관에 맞선 전통적 신이사관(神異史觀)에 입각하여 오히려 신기한 일들을 강조함으로써 동명왕의 신이지역(神異之逆)이 중국 창국시조(創國始祖)의 그것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결국 이규보는 동명왕의 신이성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규보는 유교적 전통사관을 토대로 하여 이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이러한 민족의식 및 전통적 신이사관(神異史觀)과 천(天)의 연결 인식은 그 후 <삼국유사 三國遺事>와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전승되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에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군왕의 윤리를 엄격히 밝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서로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6才 때 <동명왕편 東明王篇>, 27才 때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28才 때 <차원오동각 략 삼백운시 次韻吳東閣 略 三白韻詩>를 거푸 쓴 이규보의 이십대 후반기는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주창하기에 진력했던 뜻 깊은 시기였다고 할 만하다.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는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명왕편'에 가려져서 그 논의 자체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이 작품은 '동명왕편'을 창작한 1194년, 27才에 쓰여진 것이므로 이규보의 청년기의 역사의식과 가치관, 나아가서는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해에 '차운오동각 략삼백운시' (次韻吳東閣 略三百韻詩)를 짓는 등 연이은 삼 년간 역사 인식에 열을 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창작 동기는 병서(幷序)에 따르면 선배인 오세문(吳世文)의 삼백 운시에 화답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하나의 사교적 행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명왕편'이나 '개원천보 영사시'처럼 영사시 본래의 창작 동기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가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의 지리와 역사를 소재로 하였다.

東都古樂國   (동도고락국)         동도는 옛적 좋은 나라로
宮殿有遺基   (여은유유기)         궁전에 터 남아 있네
靑史窺陣跡   (청사규진적)         역사에서 지난 자취 엿볼 수 있고
淳風記昔時   (순풍기석시)         순박한 풍속은 옛날을 되새기게 하네



본 시의 처음부분으로 신라의 풍속이 순박하다고 함으로써 무신정권 시대의 황량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이 시 말미부에서 최치원, 박인범 등 주로 문사들에 대한 칭송을 열거함으로써 소위 '경계지란'(庚癸之亂)으로 반전을 거듭해 온 문인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의례적인 역사 서술에 그친 감이 있다.

2)사회 민중의식
이규보의 문학사상의 전개에서 증언과 풍간(諷諫)의 의의를 중시한 바 있었다. 고려는 농업을 위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은 대체로 토지를 매개로 하였다. 국가에 대한 농민들의 부담은 조세(租稅), 공부(貢賦), 공역(公役)의 세 가지로서 이것이 고려왕조의 주요 재원이 되었다. 귀족사회는 언제나 농민과 천민들에게 수탈을 자행하여 원성을 받기 마련인데, 특히 고려 중기 이후 문 무신의 난정(亂政)과 수탈이 계속됨으로써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무신 난 이후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하여 누구든지 폭력으로 대권을 잡을 수 있었으므로, 농민 천민들도 이에 자극되어 그들의 신분 해방이나 빈관오이(貧官汚吏)에 항거하여 수많은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규보가 당면했던 민란의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신라의 부흥운동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신분질서의 개혁과 정권의 탈취에 있었다. 이들 반란군들은 운문(雲門), 초전(草田)등 각지의 반란군들과 연합전선을 폈고, 그 규모와 기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민란은 원래 사회적 비리와 적폐(積弊)에 대한 개혁을 목적으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거니와 이규보가 이들을 보는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농민을 두고도 일반 농민의 경우에는

一國瘠肥民力內  (일국척비민력내)    나라의 흥망은 민력에 달렸고
萬人生死稻芽中  (만인생사도아중)    백성들의 생사는 벼싹에 달렸다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王孫公子休輕侮  (왕손공자휴경모)    왕손 공자들아 얕잡아 보지 말라
富貴豪奢出自   (부귀호사출자농)    그대들의 부귀영화는 농부들로부터 나오나니

라고 하여 극도의 민존·농본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민란의 주체인 양민들을 두고는 마치 구적(仇敵)처럼 인식하고 있다.

紅旗白刃討黃巾   (홍기백인토황건)   붉은 깃발 날카로운 칼로 황건적 토벌하는데
膽怯書生 幕賓   (담겁서생첨막빈)    담력 약한 서생이 참모로 참여했네
擇肉豺狼方作艱   (택육시랑방작간)    고기 찾는 승냥이와 이리떼 날뛰는 판국에
簪膚蟻 又爲敵   (잠부의슬우위적)    피 빠는 이 또한 적이 되었네

앞의 시에서는 민란의 주체인 지방민들을 후한 때의 장 각 등이 주도한 황건적에 비유하고 있고, 뒤의 시에서는 오랑캐를 암유하는 용어인 이리·승냥이에 비유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시들은 '동명왕편'이나 '개원천보영사시'등을 쓰던 이십대의 거창한 대국적 의식시계, 각 국가적 차원만을 강조하던 그러한 사고가 정장된 이십대 중반에 쓰여졌다는 점에 통반랑장의 모함을 입어 벼슬길의 시작인 전주목사록에서 파직된 충격이 역으로 작명했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의 납득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70才 때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노장'(老將)에서까지

報國壯心長凜凜   (보국장심장름름)   국가에 보답하려는 장한 마음 길이 늠름하여
夢中鳴鏑射戌王   (몽중명적사술왕)   꿈에서도 활 쏘아 오랑캐 두목 맞춘다네

라고 하여 지방민들을 여전히 오랑캐라고 지칭하고 잇는 것은 "이규보의 현실인식의 폭이 그의 입장과 처지를 완전히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러한 편향적 의식은 그가 예제(禮制)를 긍정하고 그 예제 내에 안주하려고 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그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하극상의 사태는 사회나 국가의 상하질서를 파국으로 몰아 간다는 이른바 군신유의 흐름을 가진 유가적 가치관의 소산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관조적 정서를 축으로 하는 단순 서정시와는 달리 서민들의 곤약(困若)과 사회적 비리를 국외자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사회의 잡학한 실상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의식이 가한 시들이 이 범주에 든다고 하겠다. 한편으로는 이규보 문학에서 본격적인 사회를 운위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격으로 보여질 수 있다. 사필(史筆)들이 '최씨문객'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는 최씨일가에 협조했었고 또 오랫동안 권력에 유착(癒着)했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침입이 가열해지자 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강화천도를 감행한 최 우의 처리를 칭찬하고, 그가 아니었던들 삼한이 벌써 호만(胡蠻)으로 되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이규보의 눈에 비친 최충헌·최 우 부자는 국가의 간성(干城)이며 민족의 지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이규보 자신이 '공문'(孔門)임을 아무리 강조했더라도 그는 사회시의 창작자로서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규보는 엄연히 수십 수의 사회시를 남겼다는 것이다.  
'개군수수인이장피죄이수' (開郡守數人以贓被罪二首)는 신축년(1241년 6월 74才)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 전 불과 3개월 전에 쓴 일종의 유서적 성격을 띤 시라고 할 수 있다.

歲儉民幾事 (세검민기사)  흉년 들어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은
唯殘骨與皮 (유잔골여피)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네
身中餘幾肉 (신중여기육)  몸 속에 남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屠割欲無遺 (도할욕무유)  남김없이 모조리 긁어내려 하는가
  
君看飮河   (군간음하언)   그대는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不過借其腹 (불과차기복)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음을
間汝將幾口 (간여장기구)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貧喫蒼生肉 (빈끽창생육)  백성들의 살을 겁탈해 먹는 것이냐

벼슬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드날린 그가 지배층을 보는 시각은 비애와 저주였다. 공자의 이른바 '가정맹어호'의 현상이 거침없이 만행했던 극신한 세태를 이 시는 비탄조로 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뚤어진 세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전리지견방여음대취증지'(全履之見謗與飮大醉贈之)이다.

  前 略
何者是賢愚          (하자시현우)        무엇이 어질고 어리석음이며
何者是得失          (하자시득실)        무엇이 옳고 잃음인가
得者未必賢          (득자미필현)        얻은 자가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니
頭鼠目翔貴秩      (장두서목상귀질)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도 귀한 벼슬에 올라
失者未必愚          (실자미필우)        잃은 자가 반드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니
意琦行樓蓬       (괴의기행루봉필)    사상과 행위가 뛰어나도 가난하게 사니까
吾齪何足言      (오제  착하족언)    나처럼 잔단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如子雄豪取爵不可必  (여자웅호취작불가필) 그대 같은 호걸이 벼슬을 못하다니
神龍未起逋龍昇      (신용미기포용승)     신룡이 일어나지 않으니 포룡이 올랐고
左道乘時直道黜      (좌도승시직도출)     좌도가 때를 타니 직도가 쫓겨났네
  後 略

현인(賢人)쓰지 못하고 직도(直道)가 핍박받는 타락된 세태를 탄식하고 있다. 전주 목사록에서 파면되어 불우의 생애를 보낼 때의 작품을 보이는 이 시는 벗인 김 이지임을 감안하여 동병상련의 심정을 읊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비뚤어진 세태를 직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혹세무민의 무속을 비판적인 시사적 시도 있다.


5. 시세계

이규보가 남긴 시작품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면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정구와 율시 작품은 총 1,492수로서 부(賦)를 포함한 작품 전체의 3분의 2가 넘는 방대한 양이다. 오언절구가 197수, 칠언절구가 743수로 940수가 되고 오언율시가 179수, 칠언율시가 373으로 552수가 된다. 이를 근거로 이규보는 절구, 율시 모두에서 오언보다는 칠언 쪽을 즐겨 작시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규보의 시의 소재는 매우 다양하다. 위로는 신앙이나 천재지변에서부터 아래로는 습속(習俗)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성에 있어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자연과 관계된 시에는 서경시와 영물시가 있겠다. 집합 개념으로서의 자연의 의미성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이규보의 시에서 자연은 불우의 해소(解消) 공간으로 나타나 있다.

夢廻山月  (몽회산월약)  꿈속을 맴도는 사이에 산 달은 넘어 가고
吟久野雲歸 (음구야운귀)  오랫동안 읊으니 들 구름은 흘러 가네
松石令朝是 (송석령조시)  조용한 소나무와 돌은 오늘의 옳음이요
風塵昨日非 (풍진작일비)  시끄러운 풍진은 어제의 잘못이라네

이 '北山雜題(북산잡제)' 시에서 '산월(山月)', '야운(野雲)', '송석(松石)'은 시(是)의 이미지에, 풍진(風塵)은 비(非)의 이미지에 연결되어 있다. 풍진(風塵)에서의 생활은 몽회(夢廻)로 상징되어 있고 그것이 각몽(覺夢)을 통하여 비(非)가 시(是)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연은 불우의 해소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규보는 자연을 인간들에게 수혜적 존재(受惠的 存在)로서 표현을 하였다. 이규보의 시 '寒泉(한천)'에서 수혜적 존재인 자연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南北行人   (남북행인  )  오고가는 사람 더위를 못 이길제
寒漿當路傍 (한장당로방)  찬우물 고맙게도 길가에 고여있네
勺泉能閏國 (작천능윤국)  만백성을 이렇게 목을 축여주었으면
再拜 堪   (재배내감  )  사람들 찬 우물에 절을 하고 마시련만...

이규보의 작품들 중에서 개별적 자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의 도구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 때 자연은 세속과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조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관계에 치중하는 자연관을 유교에 입각한 자연관이라 한다. 위의 시 '한천(寒泉)'은 그러한 자연관을 잘 보여준다.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재로는 물을 들 수 있다. 물은 이규보의 작품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은 크게 부드러운 물과 난폭한 물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이규보의 시에 나타난 물은 시련과 고난의 상징이나 외경의 대상으로서의 물의 의미성을 제외하면 대개는 부드러운 물로 나타나 있다.

每見東流疾(매견동류질)  나는 물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潛懷逝者悲(잠회서자비)  세월 빠른 것을 슬퍼했다네
淸泉知我意(청전이아의)  맑은 샘물도 나의 뜻을 알고서
애石故위이(애석고위이)  돌에 걸려 짐짓 더디더라오

부드러운 물의 이미지가 나타난 시로 '제석천(題石泉)'의 물은 돌에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돌을 감싸서 넘어가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물은 무상을 인식시켜 주는 매개체의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의 작품 중, 교류시(交流詩)와 몽환시(夢幻詩), 생활시(生活詩), 정회시(情懷詩)를 생활시로 구분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생활시는 이규보의 생애 자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따라 일어났던 일, 예를 들어 귀양을 간다던가 하는 일들에 대한 이규보의 감상과 감회 등이 생활시라는 장르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시는 이규보의 생애에 대해 조사할 때 소상한 자료로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규보는 빈한한 가문에서 입신하여 어려운 시대에 생을 영위했던 탓인지 현달(顯達)한 만년에까지도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자주 병고에 시달렸음을 그의 작품 여기 저기에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표출시킨 것이 생활시이다.
와병 중의 고통과 실의, 허무의식 등을 읊은 시이다. 안질을 소재로 한 시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안질이 심해지자 마침내 최우에게 특효약으로 알려진 용뇌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상수단에도 불구하고 안통이 완치되지 않자 그는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는 비통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병안미간화유탄(病眼未看花有嘆)'을 보면 그러한 심정이 잘 나와 있다.

病是天之爲        (병시천지위)        병은 하늘이 한 일이지
看花誰所破        (간화수소파)        꽃구경을 누가 못하게 했겠는가
天旣不吾憐        (천기불오련)        하늘이 이미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니
春亦孤負我        (춘역고부아)        봄도 또한 외롭게 나를 저버린 것이야
已有開花權        (이유개화권)        하늘은 이미 꽃 피우는 권능은 있으면서
開目何未可        (개목하미가)        어찌 내 눈을 고쳐주지 못하는가

실의와 절망감이 비감하게 토로되어 있다.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독서와 시작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매우 괴로워했다. 자신의 눈을 고쳐 주지 않는 하늘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가득하다.

6. 나가며

이규보의 문학사상 및 작가의식, 시세계의 면모를 종합하면 첫째, 이규보는 전통적인 문학사상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그 나름으로 연정이발(緣情而發)과 현실을 증언하려는 의식이 문학 창작의 동기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동명왕편>을 지은 동기도 국가와 민족의식에 투철하였고 진취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달리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농민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사회 민중의식이 강했다. 넷째, 이규보의 절구와 율시는 그 제재의 면에 있어서는 인간사와 자연에 걸쳐 두루 취재하였고, 작시의 태도는 즉흥적으로 감흥을 읊어낸 작품과 증언이나 풍간 하려는 의도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나눈다.    

이규보는 고려 무신정권 시대의 문인으로 위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고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역사시라든지 사회에 대한 문제를 표출하는 사회시, 그리고 가정이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덕목을 읊은 도덕시 등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규보의 <동명왕편>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매개체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문학 삼국유사라든지 제왕운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신정권이라는 특수한 상황아래 그의 처세는 죽고칠현(혹은 죽림칠현)이라 대표되는 이인로, 오세재의 삶과 대조된다. 재야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벼슬길에 등용되지 못했던 그들과는 달리 이규보는 무신정권 비호아래 안주하여 몽고침입으로 강화로 천도하고 전국토가 황폐화한 상태에서도 최씨 정권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벼슬을 구하는 시와 글을 보내고, 상중에 상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는 등 벼슬에 연연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규보를 부정적으로 보아야 하느냐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가문을 위해  입신양명을 바라고 백성들의 경세안민을 위해 애썼던 점으로 보아 재야에 묻혀있던 것보다 정치에 참여하여 나라를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이규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사적 위치에서 이규보는 대단한 인물이다. 시를 쓰고 있지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를 경박하게 다루지 않고 심도 있게 다루며 선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의 사상에 머리를 숙인다.


<<참고 문헌>>
김진영,『고전작가의 풍모와 문학』,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4.
김상훈, 류희정, 『이규보작품집, (2)』, 문예출판사, 1990.
신용호,『李奎報의 意識世界와 文學論硏究』, 국학자료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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