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위한 깨달음의 성찰 -정호승론

2005.05.19 11:08

한길수 조회 수:938 추천:89


                                                                                  한  길 수


1.
현세의 죽음을 '영원한 고향', '근원적인 삶'에서 회귀(回歸)라는 인류사의 비의(秘義)로까지 승화시켰으며 영원한 생의 신비를 계시하는 것이 바로 시의 힘이라고 보았던 경건주의(敬虔主義)의 종교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독일 초기 낭만파의 대표적 시인, 철학자인 노발리스(Novalis;1772∼1801)는 자아와 비자아(非自我)의 변증법적 대립으로부터 더 높은 단계를 꿈꾸는 절대자아의 이념은 자아와 우주, 자아와 영원한 것과의 사랑에 의한 신비적 일치를 꿈꾸었다. 생명의 탄생이 삶의 출발지라면 죽음은 종착점이며 죽음 또한 새로운 출발의 삶을 전재한 부활이기도 하다. 자연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인위적인 변화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 속에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도 태어나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은 자연적인 생태계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진리이다.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절대자에 대한 구원의 기도는 평범한 사람들의 꿈이고 꿈에 다가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깨달음의 상호작용들이다.

판도라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분노한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코가서스 절벽에 묶어 벌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들에게도 직접 벌을 내리기로 했다. 신들로부터 온갖 선물을 받고 태어난 최초의 여인 판도라(Pandora)에게 헤르메스는 염치없음과 교활한 성격과 거짓말을 판도라에게 주었다. 그 상자에는 인류의 모든 재앙이 들어 있었는데 유일한 선은 '희망' 뿐이었다. 절대 그 상자를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긴 했지만, 호기심에 못이긴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어보았고 그 안에서 온갖 불행과 재앙이 퍼져 나와 인간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그 안에는 다른 것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온갖 불행과 어려움 속에 절망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간직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굴곡 없는 인생이 없으며 절망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절대자를 찾게되고 구원을 염원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다는 것은 파국적 절망인 것이고 그 절망에서 스스로 대리자가 되어 꿈이 아닌 노빌리스의 문학적 메타포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고통의 체험을 겪으면서 슬기롭게 극복한 한 시인을 만나게 된다. 시를 통해 구원자에 대한 영적인 세상을 추구하고 대중에게 문학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등대와 같은 시인을 만나게 된다.

시인 정호승(1950∼ )은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되어 등단했고 1973년에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되기도 했다.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했고,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 비평, 1979)를 출간했다. 두 번 째 시집인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후에 「새벽편지」(민음사, 1987)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고, 2000년 제12회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네 번째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창작과 비평, 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 비평, 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 비평, 1999), 그 동안에 낸 시집들을 정리하고 신작을 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현대문학북스, 2000)을 출간했다. 그밖에도 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2000),  수필집 「첫눈 오는 날 만나자」(1996)와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1996), 「연인」(1998), 「항아리」(1999), 「모닥불」(2000), 장편소설「<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 등이 있다.  


2.
어린 시절 시를 현실적 삶의 한 방편이나 도구로 활용했다고 고백했던 시인은 시의 본질적 가치를 중요시하기보다 시가 왜 그의 현실에 필요한가 하는 데에 먼저 시의 가치와 효용을 두면서 그는 40년 가까이 문학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삶의 애환과 절망의 늪에서 판도라 상자에 남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힘겹게 살아오면서 종교의 믿음을 통해 신앙적 간증을 시로 표현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과 숭고한 인간애가 정신적 밑바탕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승화했는지를 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슬픔이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슬픔이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보소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문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린 이 텍스트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차용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는 막연한 성서의 표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가난한 사람들 곁에 서서 직접적으로 느끼고 사후에 관한 행복의 전재조건보다 살아있는 현실에 직시하여 슬픔의 태동인 고통에 더 가깝게 다가선다. 그러나 그에 반해 자신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위로 받을 때가 많았으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의 불행이 남을 위로하는 일보다 남의 불행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 더 많았던 것은 기쁨에 넘치는 곳보다 슬픔이 많은 암울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타자에 의한 자아의 발견과 자아에 대한 위로는 단순한 행복의 차원이 아닌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난밖에 없을지라도 미래라는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스스로를 깨어있게 하는 자각적 성찰이다. 아픔을 수반하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절대자에 대한 희망의 기도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있다. 종결어미가 "∼되소서", "∼ 가소서"는 희망에 대한 애원이 담겨있다. 이런 신앙적 염원은 그의 시의 중요한 골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잊어줘./당신이 아직 만일 숫처녀라면/아름다움을 위하여 죽음을 쓰다듬는/가마니에 덮여 있는 저 창녀의 시체를//잊어줘./지난 여름 검게 탄 하느님의 얼굴을/이마 위에 흰 성기(性器)가 달려 있음을  -<獄中書信 4> 일부.

<옥중서신>은 「슬픔이 기쁨에게」의 시집에 <유관순> 연작시와 함께 연작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 글 중의 하나이다. '가난'이라는 시어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창녀'와 '성기'의 시어들은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어둠에 있는 것에 대한 상징어로 빈부의 격차와 불합리한 70년대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위하여 죽음을 쓰다듬는 것은 민주항쟁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희생이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권력에 대해 사람들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조금 없다는 것과 조금 더 있다는 것의 경제적 척도가 아니라 가난의 기준은 마음의 풍요와 빈곤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만 바라보고 신의 심판만을 꿈꾸는 '착한 가을 남자들'은 잊으라는 도치법을 사용해서 뜻을 더욱 강조하고 홀연히 일어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70년대의 젊은 시인으로 용기 없는 자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스스로 비굴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한두 해도 아니고 7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김지하 시인을 감옥 밖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것이었다. 당시 모든 시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생각되어 검게 탄 하느님의 얼굴로 비유되는 것은 김지하 시인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김지하 시인에게 감사와 부채 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옥중서신'의 연작시는 비록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함께 옥고를 겪는 간접경험의 바탕 위에 창작된 것이다.

①눈물의 힘으로 거짓의 힘으로/비겁하게 순결한 알몸 위에/거룩한 넥타이 하나 매고 걸어라./벌거벗은 이 세상/넥타이 하나로 가릴 수만 있다면/버림받은 내 이름과 피곤한 동정(童貞)을 빌어/무덤으로 가는 길을 사랑할 수 있다면  -<넥타이를 맨 그리스도> 일부.

②금식기도하러 기도원으로 떠나가고/희망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봄길에 늙은 집배원은 쓰러졌다/이혼하기 위하여 남녀들은 결혼식을 올리고/가슴에 산을 가진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산 너머 또 산이 있다고 떠들어대었다  -<부활절> 일부.

작년에 개봉되어 화재가 된 '그리스도의 재림'(Passion of Christ)은 나자렛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의 생을 그린 영화였다. ①과 ②의 시는 30년 전에 발표된 것으로 화자가 곧 그리스도라는 동일 인물로 설정을 해 놓고 있다. 절대자와 인간간의 수직적 관계에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쳐 화자가 절대자와 자신을 수평적 관계로 설정하면서 '넥타이'라는 사회 질서와 규범들로 대변하면서 인간들의 잣대로 재단하려드는 겉치레를 따갑게 질타하고 있다. 인생의 삶과 죽음을 대등한 관계로 변환하였고, 더 나아가 외적 자신의 거짓된 행동을 영혼의 감성이 교차하면서 70년대 혼돈의 사회적 일상에서 동조한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버림받은 이름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절대적 신에 대한 비판하려는 표현은 신앙이 현실에 있어서 진정한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동떨어진 거리감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만물을 관장하는 신의 영적 존재가 아닌 보통사람들과의 다를 바 없는 동질성을 표현한 것이다. 시인은 신의 대리자도 아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앞장 선 사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물로 강조했다. '~걸어라'와 같은 명령어의 어법을 시어로 선택했지만 받아들이는 것도 대중에게 전달하는 뜻이 아닌 스스로에게 독백하는 것이기에 신과 자신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자아의 진정한 발견 위에 또 다른 초자아의 부름에 대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의 텍스트는 평범한 삶과 연결해서 시인의 성장과정이 담긴 환경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①에서 보여준 시적 인물의 동일성과 ②에서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사물과 생활을 진실적으로 그려낸 것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을 빼놓을 수가 없다. 시인도 보통 사람들의 삶과 대등소이(對等小異)한 경제적 어려움이나 뒤틀린 세상에 대한 원망을 아무런 여과 없이 어머니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봄은 눈 대신 꽃이라는 희망이 피어나지만 여전히 질곡의 삶은 순탄하지 않음을 늙은 집배원을 통해 읽는다.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서민의 가슴에 맺힌 체증의 어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서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스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서울의 예수> 부분

예수는 인류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재림하여 온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길 바란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가 재림하여 평화가 온전하기를 갈망한다. 아무도 모르게 예수가 세상에 재림하였어도 평화의 호수에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정작 가난의 족쇄가 채워진 자신의 아픔처럼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가난의 아픔으로 상징된 들풀은 피폐된 정신으로 힘들게 살아가면서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인간이 인간에게 칼을 겨누는 이 시대의 슬픔을 그리고 있다. 그들의 아픔이 시인의 아픔으로 예수에게 둘러보라는 항의의 뜻일 것이다. 꽃을 피우는 갈망은 넘치지만 참된 희망이 아닌 위선과 거짓으로 꽃을 피운 것에 대한 참회의 고백으로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은 담벼락에 예수 대신 울고있다. 예수가 재림해서 이 광경을 보고도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을 참다운 꽃 피울 수 있을지 무심한 세월은 그림자처럼 허망하며, 민주화를 위한 희망이 없는 삶은 모래알 밥을 먹는 현실의 절망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깨어나지 못한 정치의 겨울을 표현했다.  

①너희는 평화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정직한 자가 이 땅 위에 꽃을 피우고/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너희는 사랑하라./굶주린 자의 밥그릇을 빼앗지 말고/오직 너희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라.  -<서울 복음 2> 일부

②서울을 떠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눈 내리는 서울이 아름답지 않다고/진실로 속삭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나는 그대의 새벽이 되기를 원하노라/나는 그대 가슴속 칼이 되기를 원하노라/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래를 부르며/눈은 내리고 오늘밤은 참으로 쓸쓸하다/무관심을 평화라고 이야기하며/이제는 서울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서울을 떠나는 자에게> 일부

①의 텍스트는 평화는 평화롭지 못한 사람이나 국가에서 더욱 잘 나타나며 메시아즘(Messianism)을 갈망하게 된다. 자유가 당연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지 못한 세상을 살면서 누구를 지적해서 원망하지 않는다. 굶주린 자의 밥그릇이란 세상이 각박해도 최소한의 인간애로 도덕적인 양심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시인의 자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곧 구원자의 재림을 맞이할 희망을 전파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억압을 가한 모든 삼인칭 타자를 용서하라고 한다. ②의 시는 역설적이다.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변모해 감에 따라 경제적 부흥만이 제일 우선 이었던 출세 지향적인 사고는 여전하다.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상경해서 치열한 생존경쟁의 사회 속에서 출세는 허상일 뿐이며 돈을 벌기 위해 하늘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며 살았던 현실의 어둠, 서울을 떠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정신의 피폐함을 떨치고 경제적 부를 쫓아 참된 삶의 모습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라는 희망이 없어 아침을 꿈꾸지 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죽음 같은 잠을 잘 뿐이다. 시인만이 아직도 버리지 못한 미련으로 잠든 사람들, 각박한 현실을 베고 자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돌을 던지고 싶어한다.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은 아름다울 수 있다. 서울은 꿈의 도시였고, 지상의 낙원이라고 믿었던 지방에서 상경한 패기 넘치던 사람들, 경제적 어려움이 깊어갈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에게는 아름답기 보다 살을 에는 추위가 더 걱정이었다. 어둠을 걷어 줄 희망의 등불을, 그 꿈을 버리지 말라고 탄식한다. 다른 시인들이 자연을 노래할 때 현실의 어두운 부분까지 감싸며 애절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고행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나라에 살기를 원하지만 구원이 먼저인지 현실이 먼저인지 희망이 없는 절망을 슬퍼하고 있다.  


3.
새벽과 슬픔은 보통명사이지만 공통적으로 어둡다는 것이 먼저다. 시인의 가슴에 와 닿는 어감이나 느낌은 대중에 비해 섬세하고 깊이  어 정신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을 것으로 본다. 「새벽편지」라는 세 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상당기간 공백이 있었다. 공백의 시간만큼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소 무리일지 모르지만 시인이 "부끄러운 시집을 아들 영민의 삶 앞에 바친다"며 시작하고 있다. 정호승 시인에게는 영민과 위민이라는 두 아들이 있다. 「별들은 따뜻하다」의 시집은 위민에게 바친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시집에 담긴 글들을 간접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혼의 교감으로 전달하고픈 모성결핍과 부성애(父性愛)의 부족함을 채워주려고 한 것이다. 거울로 상징되는 천진스런 아이들, 성장하는 세대에게 아버지라는 기성세대인 모든 성인의 과오를 뉘우치고 고통을 이겨내려는 노력의 자각적 성찰이며 반성인 동시에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주여 저에게도 산을 주소서/평야로부터 언제나 벗어날 수 있도록/저에게도 분노와 용서의 산을 주소서/오늘도 이 땅에 살기 위하여/사막의 눈물과 바람 속에 서서 잠드나니/저에게도 인내와 감사의 산을 주소서  -<작은 기도> 부분에서 보듯 모세가 걸었던 광야를 시인의 가슴속에 느끼는 갈망으로 분노는 성냄이 아니라 용기이며 용서는 죄의 사함이 아니라 평화인 것이다. 이별에 대한 분노와 이겨내야 하는 극복의 용기가 산을 이루고 비로소 가슴속의 응어리진 아픔을 분출하려는 것으로 봐서 처해있는 생활 환경의 장애를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① 나의 별에는/피가 묻어 있다//죄는 인간의 몫이고/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자유의 아름다움을/지키기 위하여//나의 별에는/피가 묻어 있다  -<새벽편지> 전문
② 너희는 모두 이 침묵의 밥을 받아 먹으라/이는 우리들 평화와 부활의 밥이니  -<주먹밥> 일부
③ 하늘을 우러러 이 가을에/너는 나를 용서할 말과 혀를 잃었으나/나는 너를 용서할 기도를 잃었구나/너는 다시 흘릴 수 없는 눈물을 잃었으나/나는 다시 터뜨릴 수 없는 통곡을 잃었구나  -<가을의 유형지에서> 일부

80년대를 걸어온 누구나 피가 묻은 별을 가지고 산다. 정호승 시인에게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악몽과도 같은 5.18 부당했던 군사독재의 인권탄압과 희생의 시대적 상황인 것이다. ①에서 별이 상징하는 것은 시인의 이상인 꿈이나 시상이라기보다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자유의 꿈이 별로 상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별(자유의 꿈)을 지키지 못하고 보통사람들이 걸었던 피동적 행동을 후회하고 지성인으로서 민주투쟁에 참여하고 싶었던 마음에 속이 쓰리고 피를 흘리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해야만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②에서 보여준다. 시인을 비롯한 다수의 침묵하는 지성인에게 영성체를 받아먹듯 밥을 받아 회계하라는 일침을 가하고 있다. 편안하게 앉아서 먹는 밥이 아닌 들로 산으로 일하러 나가면서 먹던 서민의 주먹밥을 가슴에 뜨거운 피눈물을 마셔가며 희생된 사람들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라고 한다. ①과 ②의 시제와 ③의 서술적 시제가 같다. 5.18 민주항쟁이 가을에서 얻는 수확은 상처의 흔적을 찾아 고개 숙인 남은 자들의 자기 성찰에 쓸쓸함과 허망함으로 용서받지 못할 문신을 달고 희생된 자에게는 살아남아 침묵하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 아픔일지라도 유배되어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듯한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후세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빌어 잃어버린 사랑을 찾고자 바치는 노래인 것이다. '죄', '용서', '부활', '하늘'은 평화를 위한 바탕으로 진정한 용서가 선행될 때 자연스럽게 평화는 따르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시집에서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로 시가 그를 구원해주지는 않았으나, 그를 격려해주었다고 했다. <서울의 성자>라는 시를 보면 "오늘도 내가 남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서울 지하철 교대역으로 가면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울의 교대역에 모이는 맹인들을 찾아가 보십시오"라고 말하며 하느님도 인간에게 사랑을 바라다가 쓸쓸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 없어 하느님도 쓸쓸한 저녁 무렵 삶은 때때로 키스처럼 반짝거리듯이 시인은 초라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과 삶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으며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절대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 때 정호승 시인은 김창완, 김명인 등과 함께 시동인지 '반시'를 결성, 소위 현실참여시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적이 있는 것도 그의 시적 토양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은 언제나 슬프다고 한 외국의 시인처럼 우리들의 모습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민주주의의 봄은 찾아왔어도 빈부의 격차는 좀처럼 줄지 않고 노숙하는 한 여자의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을 환기시키면서 나눠 가질 수 있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훈훈한 모습을 보고싶어 한다. '민중의 차원 속에 동화하지 못한 오만한 언어에 대하여, 시의 본질인 정신보다는 수단일 뿐인 언어세공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맥락으로부터 이탈해 버린 관념적인 세계성에 대하여 부정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고 천명하던 ‘반시’창간사의 한 구절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일부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수선화에게> 일부

눈물의 의미는 꽃봉오리가 터질 때까지의 참고 이겨내는 아픔을 비유하면서 인간의 참다운 표상으로 기쁨을 위해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문명의 기계화에 반해 인간적인 모습을 갈구하는 것이다. 상처 없는 사람은 결코 먼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길을 떠난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 상처가 힘이 된다고 믿고있다. 그 상처의 힘으로 다시 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시인은 세상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할 길이 있는데 이제 그 길이 시의 길임을 확신하며 참회의 눈물과 아픔의 눈물, 기쁨의 눈물이 외로움 속에 내재되어 고유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타이르는 독백으로 하느님도 외로움에 떠는 사람들과 생물들을 다스릴 수 없기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다가 죽어버린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진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인간애(人間愛)를 품고 사는 참다운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통속적인 사랑과 이해 타산적인 사랑으로 물질에 앞선 사랑이 만연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을 시인은 사랑하는 것이다.

①북극성에서 홀로 지구를 바라본다/지구에서 나를 바라보는 네가 보인다/지구에는 지금 꽃상여 하나가 지나간다/북극성에는 지금 매화꽃이 지고 있다/지구에서 평생 북극성을 바라보면/북극성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북극성에서 평생 지구를 바라보면/지구도 한낱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성> 전문
② 푸른 달밤이었다/그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한 손에 칼을 쥐고/또 한 손에 사람의 머리를 들고 있었다/나는 무서워 한 걸음 뒤로 물러섰으나/그는 성큼 다가와 내게 소원을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다시 성큼 다가와 내게 소원을 물었다  -<꿈> 일부
③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니/내 가슴을 뜯어가 떡을 해먹고 배불러라/나는 너희들의 아버지니/내 피를 받아가 술을 해먹고 취해 잠들어라/나무는 뿌리만큼 자라고/사람은 눈물만큼 자라라니/나는 꽃으로 살기보다/꽃을 키우는 뿌리로 살고 싶었나니/봄이 오면 내 뿌리의 피눈물을 먹고/너희들은 다들 사람이 되라  -<고로쇠나무> 전문

①의 시는 세상을 보는 관점도 근시안적인 사고로 바라보기보다 삶과 동떨어진 우주에서 관망하는 타자는 시인과 세상을 아래로 내려본다.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처럼 시인은 절대자에 대한 복종과 낮아짐의 철학을 느끼며  매화꽃 피어있는 길에 지인의 죽음을 보는 시인의 슬픈 심정이 짙게 베어있다. 영혼이 북극성으로 가 있다면 그 북극성에서 보는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의 이별을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사의 경계를 부정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떠난 지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②에서 '그'는 시인에게 절대자요, 신이며 예수이다. 시인이 꿈을 꾸는 것은 어설픈 시인으로 가난과 소외된 사람들의 정신적 위안자가 되고 싶은 마음조차 부끄러워 번민에 갈등하고 고민한다. 시인의 아버지가 신이라면 신과 같은 구원의 힘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는 카리스마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작은 단위의 구성을 그리는 한 가정에서 평범한 아버지가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심정을 그렸다. ③의 텍스트 내용 중에 일인칭과 이인칭 서술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카톨릭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성체를 모시는 미사의식을 시적 표현으로 승화시켰다. 나무가 뿌리만큼 자라는 것은 계절을 따라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낸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의 눈물은 삶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공보다 고해성사의 참회하는 행동으로 진실한 마음의 뿌리를 닮고 싶은 시인의 심정이다. 시인은 또한 거짓되고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고 시인의 삶을 본받아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  

4.
시인의 늙으신 어머니께 바친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시집은 그 동안 보여준 시집에서 아끼는 시들을 뽑고 신작시를 실어 출간했다. 전체적으로 서정적 흐름을 담고있지만 삶의 원천을 전지전능한 절대자와 시인과의 관계로 설정하고 슬픔과 증오, 상처와 아픔, 그리움과 고독이 맞물려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그 동안의 모습이었다면, 종교적 믿음과 문학적 순수성으로 이 세상의 우주 만물에 대한 이치를 작은 테두리에서는 가족과 함께 하고 큰 테두리에서는 대중과 함께 힘들게 걸어오면서 깨닫게 되는 모습으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사랑으로 귀결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을 새롭게 보고 있다.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①부활절 날 밤/겸손히 무릎을 끊고/사람의 발보다/개미의 발을 씻긴다//연탄재가 버려진/달빛 아래/저 골목길//개미가 걸어간 길이/사람이 걸어간 길보다/더 아름답다  -<봄밤> 전문
②너의 뿌리가 되기 위하여/예수의 못자국은 보이지 않으나/오늘도 상처에서 흐른 피가/뿌리를 적신다  -<상처는 스승이다> 일부

①에서 보듯 무릎을 끊고 예수의 재림을 기리는 자신의 자아와 예수가 제자의 발을 씻기는 타 자아의 이중적 모습이지만 환경은 둘 다 연탄재가 길가에 있는 변두리의 개미로 상징되는 서민의 애환이 묻어있다. 개미의 원관념은 정직한 사람, 그래서 핍박받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걸어간 길이 탐욕과 거짓된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아름답다고 표현된 것이다. 가식과 거짓의 허울로 살아가는 모습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 투영되는 현실을 묵묵히 걸어갈 때 지나온 길이 참된 삶의 노정인 것이다. ②의 텍스트에 뿌리로 표현되는 시어는 내적 자아이며 절벽에 선 외적 자아에 대한 서로 다른 감정이 동질성을 가지고 내적 상처를 예수의 못자국에 비유하면서 경험하지 못한 성서의 은혜를 아픔의 눈물로 치유하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예수의 손에 십자가의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 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혀 있었던 신앙적 사실로 상처를 이겨내게 해주는 근원을 찾는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해야하며 고통과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이 아름다워질 수 없는 것처럼 삶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야 하는 것이 예수가 죽어 부활한 진정한 의미이며 무언(無言)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의 시세계는 종교적 색채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닌 현실을 수긍하면서 자기극복의 과정인 삶의 체험을 자신만의 알레고리를 통해 문학으로 실현하고 승화해 왔다. 그의 시어는 서정적 이미지에서 절대자와의 교감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힘든 걸음을 해왔다. 흙탕물이 질퍽한 연못에 떠 있는 아름다운 수련, 수련은 더러운 오물들이 떠다니고 온갖 쓰레기들이 가라앉아 있는 진흙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자신을 멋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을 뽑아 올려 백색과 홍색의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운다. 주위의 열악한 환경에 아랑곳없는, 그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을 꽃으로 만들어줄 요소들만 뽑아 올리는 수련의 뿌리와 같은 마음을 지니며 시를 쓰고 싶다는 정호승 시인에게 삶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일지라도 그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전령사로 슬픔이 아닌 기쁨을 전하리라고 본다. 그 사랑의 결실은 우리가 아름답게 걸어가야 할 목표이며 지상의 목표인 것이다. 그의 시를 통해 이런 감동과 위로를 느낄 수 있게 되는 위대한 작품을 기대한다.  



                                                                                                                - 2005년 격월간지 <현대인> 평론 천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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