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鄭澈)의 시문학

2005.06.22 07:18

한길수 조회 수:1436 추천:77

1. 정철(鄭澈)의 생애와 시대상황.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중종 31년- 선조 26년)이 중종 31년(1536)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는 李涵(이함), 松江(송강)은 그의 호다. 조부 규는 건원능참봉이고, 부 유침은 돈녕부판관인데 대사간 안팽수의 딸을 취하여 4남 2녀를 두니, 자, 소, 황, 철이다. 장녀는 인종의 귀인이, 차녀는 계림군 류의 부인이 되어 일문을 빛냈다. 가사문학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평가되는 것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장진주사> 등의 시정신(詩精神)과 문채(文彩)의 결합이 발군의 작품성을 구현했기 때문이겠다.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은 짝을 이뤄 충신연주지사(忠信戀主之詞)로 일러오고 있고 국문시가의 절창(絶唱)이라고도 하여, 뜻과 언어표현 양면에서 크게 주목되어 왔다. 정철의 유년시절을 보면 영일 정씨의 후예로 그의 먼 조상들은 현달한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의 부조 삼대에 이르러서는 현달치 못하였다가 그가 귀하게 됨에 따라 높이 추증을 입었다. 그의 부친 정유침은 마흔이 되도록 벼슬 없이 지냈다. 정철은 1536년에 대궐 근처 장의동에서 태어나 4남 3녀 가운데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그는 특히 세자의 양제이던 큰 누님의 귀여움을 받아 자유로 궁중 출입을 하면서 두 살 위인 경원군(명종)과 함께 어울려 지내게 된다. 이러한 궁중 출입은 인종이 등극하고 누님이 귀인이 된 1544년에 그 절정에 이르고 1545년 인종의 승하 때까지 이어진다. 태어나서 열 살 때까지 그는 실로 궁핍과 고난을 모르고 궁정적 영광에 싸여 자라났다. 가족사적으로 가장 화려하고 단란하던 한 때, 온 가족의 사랑을 독점하고 궁녀들의 보호까지 받으며 궁정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후일 그의 문학에 등장하는 전아하고도 화려한 이미 저리의 원천으로 보인다.

송강이 10세(1545)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참혹한 가화를 당하여 자부 계림군 유가 연루되어 죽고, 백형 자도 잡혀 장형을 받고 유배 도중 죽었다. 부친도 투옥되었다가 관북 등지로 유배를 당하니 일가가 몰락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송강은 유년 취학이 어려웠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부친이 석방되어(1551) 창평으로 함께 내려오면서부터였는데 이 때 송강의 나이 16세였다. 이후 10년간 여기서 살면서 김린후, 임억령, 양응정, 기대승에게 수학하였는데 이때가 송강에게 있어선 가장 꿈에 부푼 시기였다. 그것은 다감한 소년시절을 성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벗하여 심신을 연마하고, 당대 고명한 학자와 시인들에게 수학하여 학문을 닦고 시재를 펼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김성원, 고경명, 백광훈 같은 인사들과 사귄 것도 이때였고, 문화 류씨와 결혼한 것도 이 시기였다.
26세 때 진사시험에 일등 한 송강은 다음해(1562) 별시문과에도 장원하여 그의 문재를 세상에 떨쳤다.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른 송강은 이후 파란만장의 기구한 운명을 맞는다. 등용 후 지평을 거쳐 도승지, 예조판서, 좌의정 등의 요직에까지 오르지만, 이 사이 동서분쟁은 날로 심해 반목질시가 가열했고, 송강은 어느새 서인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인세력과 맞붙어 여러번 축출과 유배를 반복하게 되었다. 45세(1580) 때 강원도 관찰사가 된 송강은 임지에 부임하여 풍화를 선도코자 「훈민가」16수를 지었고, 관동풍경을 찬미한 「관동별곡」도 지었다.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상신 로수신에 대한 비답을 지은 것이 화가 되어 관직을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왔다.
  

2. 송강가사에 대한 기존 논의 검토

이수광(1563~1628)은 송강가사를 우리나라 가곡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하였는데   가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 4음보의 연속체 교술 민요가 기록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 등 악장의 형식이 그 기원이라는 설, 시조 기원 설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되는 주장은 없다. 가사의 발생에 대해서 역시 기원에 대한 견해들과 같이 많은 주장들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 정극인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과 고려 말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효시로 보자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상춘곡>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가사의 형식은 3.4조 또는 4.4조를 기본으로 한 4음보의 연속체 운문이며, 마지막 구절이 시조의 종장과 유사하게 끝나는 것을 정격가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가 음수율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변격가사라고 한다. 가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가사가 시가와 문필의 중간 형태로 시가 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장르라는 주장이 있는 이래로 많은 학설들이 제기되었다. 가사가 율문으로 된 수필이라는 주장, 율문으로 된 교술 문학이라는 주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가사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양반이 가사의 주요 담담 층이었던 조선전기, 평민과 부녀자 층이 새로운 담당자로 부상한 조선후기, 개화기의 가사 등의 세 시기가 그것이다. 조선전기의 가사는 양반층이 창작을 주도하였던 만큼 시조와 비슷한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즉 이 시기의 가사는 송순, 정철 등과 같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생활을 주로 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정철의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십분 살린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후기의 가사는 대체로 산문적인 경향을 띠며,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경험이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양상을 띤다. 임금으로서의 '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님'에 대한 연정이 표현되기에 이르렀고, 규방에 대한 갑갑함을 하소연하는 부녀자들의 가사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가사가 창작되기고 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같은 장편 기행가사가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송강이 50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물러난 4년 간 전남 창평으로 내려가 우거(寓居)하며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작품으로, 뛰어난 우리말 구사와 세련된 표현으로 속편인 '속미인곡'과 함께 가사문학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가사는 한국 고전 문학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학 형태로, 시조와 함께 조선조의 대표적인 국문시가이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졌지만, 조선후기로 오면 작자 층이 확대되어 서민과 양반사대부 계층의 부녀자들이 가사 창작에 참여하여 그들의 애환을 표출했다. '가사(歌詞)'와 '가사(歌辭)'중 어느 것이 맞느냐는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사(歌辭)'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임금을 연모하는 내용의 이 노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를 여성으로 택하여 더욱 절실한 마음을 수놓고 있다. 임금을 임으로 설정하고 있는 '사미인곡'은 멀리 고려 속요인 '정과정'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우리 시가의 전통인 부재(不在)하는 임에 대한 자기 희생적 사랑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시리'와 '동동' 등에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을 사모하는 신하의 정성을, 한 여인이 그 남편을 생이별하고 그리워하는 연모의 정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체의 내용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사무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작품의 서두와 결말을 두고 있어서, 모두 다섯 단락으로 구분된다. 외로운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심경은 계절의 변화와 관계없이 한결같음을 볼 수 있다.


3. <사미인곡>의 분석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총 63행(126구)으로 되어 있고, 편구(片句)는 없다. 그 짜임을 보면 서사(序詞), 본사(本詞)(춘, 하, 추, 동), 결사(結詞)의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緣分(연분)이며 하날 모랄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대 노여 업다.

  이렇게 시작하는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송강이 50살 되던 선조 18년에 창평에 돌아가 한적하게 세월을 보내는 동안 지은 노래로 절절한 연군의 정을, 한 부녀자가 이별한 남편을 사모하는 것에 의탁해서 자기의 충정을 고백한 것이다.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위의 내용은 자기를 한 여자의 몸으로 비유하고 임금님을 '님'이라고 하여 둘 사이의 천분(天分)과 사랑을 말하여, 끊을 수 없는 애정을 여성적인 행동과 어조로 직핍(直逼)하였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연군의 뜻을 담은 노래가 아니다. 임금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의 마음을, 오직 남편만을 그리워하는 한국의 전통적 여인의 애절한 심정에 의탁하여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사에서는 춘하추동 각 계절마다 임에게 꼭 바치고 싶은 사물을 들어서 자기의 마음도 드리고자 하였다.

  平生(평생)애 願(원)하요대 한대 녜쟈 하얏더니, 늙기야 므사 일로 외오 두고 글이난고. 엇그제 님을 뫼셔 廣寒殿(광한뎐)의 올낫더니, 그더대 엇디하야 下界(하계)예 나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연디 三年(삼년)이라. 연脂粉(연지분) 잇나마난 눌 위하야 고이 할고. 마음의 매친 실음 疊疊(텹텹)이 싸혀 이셔, 짓나니 한숨이오 디나니 눈믈이라. 人生(인생)은 有限(유한)하대 시람도 그지업다.

평생에 원하되 임과 함께 살아가려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에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라 있었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왔느냐? 내려올 때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3년일세. 연지와 분이 있네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단장할꼬?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으로 쌓여 있어서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한정이 있는데 근심은 한이 없다.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대 죡죡 안니다가, 향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라셔도 내 님 조차려 하노라.

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 범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고 다니다가, 향기가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께서야 나인 줄을 모르셔도 나는 임을 따르려 하노라. 임을 향한 일편단심은 상사병에 이르고 만다. 임을 향한 불타는 심정을 이제는 어찌할 없어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가 되어 님의 옷에라도 옮으리라 하였다. 님이야 알든 모르든 님만 좇으리라는 열렬한 연모를 나타내었다. 결사(結詞)는 서사와 본사에서 점층적으로 고조되어온 임을 향한 그리움과 시름 때문에 마침내 불치의 병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송강이 사간원과 사헌부의 논척(論斥)을 받고 창평에 퇴거(退去)한 때가 선조 18년(1585년) 8월이므로 이 작품의 창작 연대가 1588-1589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사미인곡>은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옴으로써 부녀자 사시가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의식에 있어서도 우아하고도 비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전후미인곡에 대하여 <사미인곡>이 송강의 자신 있고 외향적이며 사치스러우며 멋있는 과장을 활용한 연주지사라면 <속미인곡>은 내향적이고 겸허하며 소박하고 진실하게 표현한 연주지사라 할 수 있다.

오라며 나리며 헤뜨며 바니니 져근덧 力녁盡진하야 풋잠을 잠간 드니 精졍誠셩이 지극하야 꿈의 님을 보니 玉옥 가탄 얼굴이 半반이나마 늘거셰라. 마암의 머근 말삼 슬카장 삷쟈 하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하며 情졍을 못다하야 목이조차 몌여하니 오뎐된 鷄계聲셩의 잠은 어이 깨돗던고.  
      
잠깐 사이에 힘이 지쳐 풋잠을 잠깐 드니,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과 같이 곱던 얼굴이 반 넘어 늙었구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실컷 사뢰려고 하였더니 눈물이 잇달아 나니 말인들 어찌 하며, 정회도 못다 풀어 목마저 메니,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하루 종일 산으로 물가로 헤매며 쏘다니다가 바라던 '님'은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힘없는 발길로 밤중에 집에 돌아와 피로에 지쳐  풋잠을 잠깐 드니 '精졍誠셩이 지극하야' 서 그런지 꿈에 님을 본다. 초췌한 님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바로 낫 목이 메어 말 한 마디 정답게 못해 본 섭섭한 심정이 잘 그려져 있다.
<사미인곡>을 비롯한 송강가사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요 진문장(眞文章)이며 충신연주지사(忠信戀主之詞)의 절조(絶調)라고 높이 평가된 데에는 송강의 인간 됨이 "고충자허(孤忠自許), 독립감언(獨立敢言), 강결충의(剛潔忠義), 우시연군(憂時戀君)"했을 뿐더러, "송강공 소선가곡(松江公 素膳歌曲) 했다는 점과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송강가사가 창으로 불려져서 애송된 기록이 많이 보이는 것에서 송강이 음률에도 밝았음을 알 수 있고, 이들 작품을 여러 문사들이 한역(漢譯) 한 점에서는 우리말 표현의 뛰어난 묘미뿐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사대부들 간에 큰 공명을 얻었음을 살필 수 있다.  


4. 송강의 시세계

1) 송강 정철 시의 특징
  송강은 그가 생존, 활동하던 당대의 문학양식들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탁월한 서정의 세계를 열어 놓았다. 그가 열어 놓은 서정의 세계는, 감각적인 시선과 청신한 언어를 통해 때로는 활달, 호방한 정서로, 또 때로는 여성적 정조를 바탕으로 섬세, 애절한 정서로 표출된다. 그런가하면,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시원스럽게 날아올라 탈속의 경지를 분방하게 노래하기도 한다. 거기에 풍토성에 바탕을 둔 토속적 정서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송강의 작품들에는 매사 적극적이고 집착이 강한 그의 품성과 다정다감한 기질에서 연유하는 인간적인 풍모, 그 다사로움만큼은 공통적으로 베어 있다. 그의 문학 세계는 이처럼 다채로우면서도 감동적이다. 송강을 위대한 시인으로 일컫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풍부한 개성과 경험적 진실성에서 우러나는 감동으로 우리에게 보편적 공감의 세계를 열어 놓은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말로 된 송강의 시가들은 미적, 정서적 체험을 훨씬 더 깊고 감칠맛 나게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일상어를 무리 없이 사용하여 독특한 표현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강의 진가(眞價)가 드러나는데 한문으로 된 글을 문학의 진면목으로 여기던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차원 높은 예술언어로 끌어올린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송강은 언어감각이 뛰어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어는 사고와 정서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송강의 뛰어난 언어감각은 우리말 표현에 담긴 사고와 정서를 한층 차원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거기에 예술적 미감이 깃들게 했다. 이점이 바로 송강의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이자,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직접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이다.

2) 송강 문학의 문학사적 의의
송강은 한문학과 국문학 모두에 통달한 문인이었다. 가사, 시조, 한시 등에서 보여준 그의 문학적 성과는 어느 한 개인이 어느 특정한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보여준 문학적 성과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송강 문학은 문학적 개성이나 독창성이 뛰어난 창조적 산물이며 송강이 남긴 국문 노래의 장르들은 국문학의 노래 장르를 체계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표본 내지 단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문학을 독점하던 대표적 식자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 노래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는 점은 장르 의식의 진보성을 입증한다. 장르의식과 기법상의 진보성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으며 송강 문학은 탁월한 언어의 조탁, 조어의 아름다움, 표현의 참신성, 격조의 우아함, 작품의 언어, 형식, 내용, 표현, 기법, 구조, 시풍에 있어 단연 국문학의 최고 수준이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의 시문학에서, 17세기 이후 대중적인 시가 형태로 나온 서민가사의 연원을 보고 있다. 그를 높이 찬양한 박인로, 김만중, 허균, 김춘택 등은 그의 가사문학에서 소박성, 진보성을 배웠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배웠을 것이다. 그의 가사문학은 풍부한 생활적 국문 시어의 세련된 묘사와 표현 수법들에 의하여 조선어의 시어적 가치를 획기적인 단계로 제고시켰으며 국어국문 시가의 원류를 가일층 뚜렷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3) 정철의 자연관
정철이 보여준 작품 속에서의 자연은 그가 가졌던 자연관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고 해도 헛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사는 그 장르적인 특성 자체가 개인의 사고와 감정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통로적(通路的)이고 배설적인 장치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또 직접 정철과의 대화가 가능할 수도 없고 영매(靈媒) 체험과 같은 수단으로도 접촉이 불가능하며 정철의 직계자손을 만나볼 형편이 곤란한 우리로서는 그의 작품만큼 그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것도 없으므로 그것을 통해 그의 자연관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의 자연관은 특히 <성산별곡>과 <관동별곡>에 잘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을 쓰기 위해선 그의 사고나 성향이 발현되어야 했을 것이고 또한 그 배경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배경인 자연을 접하게 된 계기는 정쟁(政爭)에 연루되어 내몰렸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자연 대면이 아닌 수동적이고 피학적(被虐的)인 내몰림이었고, 그런 심층적 절망의 상태에서 받아들여진 자연은 즐기는 강호가도(江湖歌道)라기보다는 쓸쓸한 심정의 객관적 대면이면서 한편으로는 위로와 의지의 벗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실관(失官)이라는 상황에서 가진 자연인식이란 것이 작품 속에 투영(透映)되어 있고 또한 중요한 정철의 자연관 파악의 모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성향은 곧 문작관(文作觀)이며 자연관과 연계되고 한편으론 유배의 결정적 원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철의 성격은 곧고 바른 말을 잘한다고 기록에 전한다. 강직하다는 긍정적인 해석의 이면으로 펼쳐보면 별나고 외곬으로 치우친 자기 입장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는 정쟁에서 양보란 생각지 않았고, 그 결과 일생의 많은 시기를 치사(致仕)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이 그는 세속 지향적이었고 벼슬에의 집착이 강했다. 그러면서 접한 자연과 정철은 자석으로 치면 N극과 N극의 억지 결합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성정이 벼락같은 그에겐 잠시간 자연을 즐길 마음의 여유는 있었겠지만 꾸준히 정을 교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자연은 삶의 일요일처럼 잠깐 취하는 휴식이고 그의 정치 사상을 쏜살같이 퍼부어 낼 노정으로의 입성(立成)을 위한 준비 처였던 것이다. 그의 자연관은 인간과 합일되는 곳이 아니고 풍류를 즐기는 것도 아니라 잠시간 쉬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깊다. 비록 관동별곡에서 위정(爲政)을 잊고 신선같이 자연을 즐기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다시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고 임금의 호출을 간접적이면서도 지독히 표나게 요청하는 것에서 그의 자연관을 짐작하게 한다. 막상 머무는 곳이므로 사랑한다고 한 아름 껴안은 속에서만 자연을 놓을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단지 환경으로서 생존수단으로서의 자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6C의 조선조 사대부들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모습은 즉 동화되는 자연이 아닌 힘든 정사를 위한 여분의 휴식처로서 다가간 것이다. 마치 부끄럼 많은 문예소녀 같은 문체의 한용운이 곧은 성미와 강한 남성적 의지로 독립을 위해 애쓰는 이중성과 같이, 그가 여성적인 아름다운 기교로 문장을 쓰고 그 속에 자연을 묘사했지만 벼락같은 성미와 위정가의 번뜩이는 야심은 항상 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5. 줄이며

송강 정철의 삶과 가사 문학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자칫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관동별곡>을 비롯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을 다루지 못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강 정철의 성장 배경부터 <사미인곡>의 작품에 대한 특성과 필체를 보면서 그의 삶에 대한 지향과 국가관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송강 정철은 역사의 격변기를 관통하며 정치 세력에 실세를 이루고 있었기에 지식인과 정치의 한 시대를 풍미했고, 난관을 헤쳐나간 문인 지식인의 한 전형이었다. 작품의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여 참신하고 우아하게 시작(詩作)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자신이 겪어 온 삶의 기록이자, 공감의 지평을 열어 준 사유와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또 다른 격변의 시대에, 우리가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참고문헌; 김진영 <고전작가의 풍모와 문학>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4
김갑기 <송강 정철 연구> 이우출판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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