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風蘭)이 피던 저녁

2006.04.05 04:48

한길수 조회 수:690 추천:85

토방이 끝난 저녁, 젊은 시인들과 갈증을 풀려고 호프집에 갔다 캘리포니아에 무슨 계절이 따로 있다고 다소 추웠던 날씨가 봄에 밀려 지나가려던 사이, 어둠을 입은 안경 쓴 남자 종업원이 음식 종류가 빼곡이 적힌 안내판을 들고 술 보다 안주를 먼저 내밀려던 사이, 맥주와 소주를 거의 동시에 불러대는 사이를 스친다 서로를 못 만났던 서운함, 그 흉내의 반을 닮은 웃음이 꽃망울처럼 터진다 한 시인이 귓속말로 석 달 동안 시하나 건져 올리지 못했다는 소리가 백열등 하나 올려져 있는 호프집 천장에 닿고 떨어지며 내 고막에 이르자 짧은 신음을 낸다 문학이 족쇄처럼 느껴진다는 푸념이 잔에 깔리자 시를 넣고 문학을 넣고 예술을 넣어도 넘치지 않는 잔을 단숨에 들이킨다 노랗게 익은 레몬을 소주병 뚜껑으로 돌려 구멍을 내고 즙을 내 거푸 따른 잔이 이번에는 넘쳤다 말(言)들이 저 레몬 즙에 밀려 잔에서 흘러내리고 탁자를 적셨다 그 감정은 호프집 구석의 향기 없는 조화에게 손 떨림의 허탈과 같았다 풍란(風蘭)의 백지 같던 꽃잎에 원고지를 닮은 붉은 줄을 그며 고운 자태를 피워낸 순결 앞에 탄성을 질렀던 시어(詩語)들, 등단하고도 절필하는 이도, 석탄에 박힌 시를 찾겠다고 탄광촌에 들어가 애꿎은 산허리를 잘라 하늘만 더 크게 만들고 정작 자신은 작아져 고개를 들지 못하던 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저토록 아파하는 시인도 반쯤은 죽지말고 살아 있어야 한다 투명한 잔만 점점 탁해지는 늦은 저녁에 기억 하나가 등처럼 떠있다 어느 날 깜빡 잊고 일주일에 두 번 물 준 풍란(風蘭) 뿌리가 썩었던, 다시는 꽃을 피우지도 반쯤도 살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시의 울림을 우리 사는 삶 바깥으로 떠밀어냈다 레몬 씨앗이 잔 속에 갇혀 발아를 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른 체 남은 술잔을 비우지 못하고 파장이 되었다 책상에 앉아 새벽 세시 오십분 유니언 역에서 들리는 기차 경적소리의 짧은 비명으로 컴퓨터 화면들을 넘기는 사이, 귓속에서 씨앗 한 톨이 흰 백지에 툭 튀어나와 스스로 싹 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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