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곳, 그리고 시간들

2007.06.30 09:12

한길수 조회 수:962 추천:71





<나의살던고향은> 충북 청원 [97호] 2007년 06월 29일 (금) 15:25:22 한길수(시인ㆍ평론가) dongponews.net 잊을 수 없는 곳, 그리고 시간들 정든 고향을 등지고 고국 떠나 미국 이민 온 지 어언 20년이 되었다. 작년에 방문한 고국 모습은 새롭기만 했다. 사람들의 세련된 옷차림과 복잡해진 거리, 당황할 만큼 새롭고 높아진 건물들로 내가 살던 곳이었는지 의심 갈 정도였다. 충청도하면 속리산 국립공원과 천연기념물 정이품 소나무도 유명하지만 예로부터 맑은 물과 푸른 산으로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 하지 않았던가. 양반의 도시, 교육의 도시인 청주로 향했다. 아름다운 가로수 터널은 봄이 오면 우거진 플라타너스 새잎을 뽐내려고 씩씩하게 서 있었다. 예전보다 더 번화한 도시의 거리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을 닮아있었다. 고향 마을이 보인다. 종산에 올라 돌아가신 아버지께 성묘 하고 산 아래 내가 자랐던 마을을 내려다 봤다. 내가 살던 고향은 그야말로 꽃피는 산골이다. 사시사철 화려한 옷 갈아입는 산천이 있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있었다. 대청댐 수몰지역으로 중학교 입학 할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여서 해지면 서둘러 호롱불 밝혀두고 소쩍새 밤새우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시남마을 두루봉 동굴은 옆 마을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석회암 광산이었다. 간 꺼내 먹는 문둥이가 살고 있어 애를 잡혀간다던 그 산에 겁 없이 올라 칡을 캐고, 군불 뗄 고주백이(죽은 나무 밑동과 뿌리 부분)를 뽑거나 산토끼 몰던 산골이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맑은 냇가에서 멱 감거나 인근 과수원에서 서리해온 수박을 갈라 자갈밭에 앉아 먹던 어린 시절은 한 뼘씩 커주었다. 화롯불에 끓은 된장찌개와 밭에서 따온 상추, 문풍지 사이에 들어오던 황소바람,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 먹던 단란한 시간들, 십리길 중학교를 걸어 다니며 가끔 마을로 들어가는 소달구지 타고 울퉁불퉁 흙길에 덜컥거려도 좋았다. 들바람에 하늘거리며 벼 익어가는 것이 뜸 들이는 밥 냄새처럼 향기로웠다. 추수가 끝나면 낡은 초가지붕에 새 볏단 올리려고 헌 지붕 걷어낼 때 굼벵이가 나오면 징그럽기보다 신기해하던 우리들이 그 땅에서 생활하고 자란 모습이었다. 배고픈 내 정신을 채워주던 서정이었고 낭만이었다. 내가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시 올 수 없는 그 시간들과 포근한 고향의 향수 덕분이다. 송아지 값 떨어졌다고/한 밤 내내 소처럼 울던 아버지/지난 봄 솔잎 털던 앞산자락에/머리 긁적이며 일어난 아침햇살/입 벌린 북어 두들겨 냄비에 넣고/검불로 지피던 가슴속 절망으로/눈가를 씻어내던 어머니 앞치마/아궁이연기가 맵다고 돌아앉는다/쌈지에 묵은 호두 주물럭거리던/문간방에 사는 노망난 여든 할머니/깊은 한숨소리는 엊저녁으로 남고/종산(宗山)만 물끄러미 바라볼 때/부뚜막 된장국 속절없이 끊는다/자전거와 씨름하던 큰아들 경수/김치에 멸치볶음 한 종지 담고/헤진 가방에 숨은 따스한 도시락/밤 골지나 시오리 길 학교에 간다/돌담에 줄선 감나무 하늘을 가리고/가을바람 타고 노랗게 여물어 갈 때/부엌살림 채우려 장날만 기다린다 -졸시- 고향의 어느 아침은 (미주문학) 흔한 인형이나 장난감 하나 없었어도 가난이 뭔지 모르던 친구들, 풀 먹이기 위해 소 몰고 방죽 옆 동산에 올라 너나할 것 없이 풀밭에 벌렁 누워 서로 다른 모습들의 구름을 보며 웃음 짓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애써 일궈 온 땅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과 수몰지구 끝자리 마을 사람들은 일거리와 가난을 벗기 위해 하나 둘 고향을 떠났다. 13년 만에 다시 찾아온,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던 고향이지만 산 아래 마을은 많이 늙어 있었다. 맑은 물 흐르던 냇가는 물이 말라 송사리도 찾기 힘들었고, 마을 입구에 버드나무는 흔적만 남아 언제 그 자리에 있었나 싶다. 사라진 나무 위에 여름이 다 가도록 울었던 매미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기와집 몇 채에 초가집이 둘러앉았던 마을이 양옥집이 하나 둘 보이고 전선들과 안테나가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열려있는 노인정 안에 할아버지 몇 분이 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동네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 울컥 가슴이 메여왔다. 한 둘이라도 아이들이 뛰어 놀았다면 내 어린 시절 감흥을 불러 주었을 텐데 아쉬웠다. 흙길이 아스팔트로 변한 도로에 자동차가 지나자 뿌연 먼지가 일었다. 군대가 들어온다더니 부대가 아니라 대통령전용별장이었다. 민주화가 꽃피어 청남대가 충북 도청으로 이관되었고, 개방된 그곳에 관광버스가 들어가고 있었다. 고향은 이처럼 사람들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고 들었다. 학교 뒤 읍내는 오일장으로 우시장과 어물전이 있던 곳에 반듯한 상가들이 들어서 있어 변화를 실감했다. 삶의 터전을 뒤로한 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기억을 수장한 아픔의 댐, 대청 댐은 많은 양의 전기를 생성하여 국가와 지역발전에 경제적 부흥을 주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평생 그리운 것은 무엇일까?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문의문화재단지를 조성해 놓은 것이다. 옛 살던 모습을 담아내려고 골똘히 구상한 흔적으로 전통 한옥이며 초가집, 성황당, 장승도 세워놓고, 민속자료전시관도 개관하여 고향 주민들과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 노력이 돋보였다. 수몰된 고향일지라도 태어나 자란 곳을 기억마저 못하는 것은 아니기에 잊었던 고향의 포근함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어 고마웠다. 청주에는 국제공항 건설로 중국과 홍콩 등 아시아의 소통지역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금속 활자본을 전시해 놓고 내국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발길 닿을 때마다 찬란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공군사관학교가 옮겨왔으니 조국의 차세대 국방을 책임질 인재들이 효율적인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요람이 될 것이다. 내가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받아들여야 하는 분명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과 함께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적인 인간성을 가질 수 있도록 옛것을 새롭게 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지금처럼 아름답고 미래를 꿈 꿀 수 있는 명성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고요했던 오지가 번화한 만큼 산업화에 오염되지 않도록 주위 문화유산과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켜야 한다. 커나가는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훗날 애들과 함께 손잡고 찾아와 보여주며 돌아볼 수 있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고장이 되기를 바란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부르며 고향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달래본다. * 첨부 사진 참고; 충청북도 문화관광 홈페이지 발췌. http://www.cbtour.net/content_kor/mn70/mn70_03_02.jsp?doprocess=local&searchSlt1=0110& ⓒ 재외동포신문(http://www.dongponews.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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