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소 철탑이 있던 마을
2008.03.19 02:23
산동네 재개발지 턱 밑까지 점령한 트럭들
놀이터 잃은 아이들은 손에 바람을 쥐고
뒷산 송신소 철탑을 두드리자 윙윙거리며
새떼는 놀라 떠나고 양손 번쩍 드는 풀들
먹이 찾던 솔개는 날아간 새를 바라만 보고
술래 피해 숨는 아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여자들은 거실에서 육십갑자 종이상자 방에
운세풀이 열두 띠 접어 반찬거리 만들고
배달 온 곰 인형에 솔개보다 큰 눈 기워단다
철탑 꼭대기에 떨며 비명 지르는 오 촉 불빛
품삯 받은 어둠이 철거민 발아래로 따라 온다
머리에 두른 붉은 띠 풀고 손 지장 찍던
송신소 철탑 동네가 저녁뉴스에 나오는 날
술 취해 겨워내는 사내 코앞에 냉수 한 사발
분양권으로 트럭과 바꿔 행상 준비하던 사내와
검지 손에 굳은 살 박힌 여자가 지상에 남긴
오래된 손버릇으로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을
번갈아 치자 달력 숫자를 가리키는 안테나
빗속에 떠는 앵커의 입에 하얗게 서린 화면
포클레인 쿨럭이는 가래로 새벽을 맞는다
새떼도 아이들도 떠난 자리에 계절은 찾아들고
무릎 통증 시린 송신소 철탑만 녹슬어 간다
곰 인형 눈 달던 여자는 야채 다듬어 싣고
신축 아파트 공터에 바람으로 말리는 언 손
낯선 지역에 연기로 스며든 옛 철거민 얼굴
월세 사는 대물림 가난의 주름은 펴졌을지
사는 것은 이정표 따라 고독과 동행하는 것
오래된 지도에 태어나 자란 희미한 기억 뿐
한두 뼘씩 자란 아이들은 철탑 놀이터 대신
오락실 스타그래프로 넘어야 할 산 오르고
철탑 있던 마을에 접근금지 행성이 뜨고 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3,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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