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1

2009.04.08 01:56

한길수 조회 수:840 추천:138

            
  퇴근시간에 마주친 출근하는 와이프는 줄어드는 수입으로 한숨소리가 문에 끼여 삐걱거린다 노는 시간에 소일거리 찾아보라는 잔소리가 싱크대 파이프 타고 내려가고 싸늘한 눈빛은 K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짙은 화장하고 생 갈비 집에서 친절한 미소 뿌린 음식을 나르다가 12시에 맞춰 어김없이 돌아온다 부부간에 아이마저 없어 집은 새 페인트 냄새 가시지 않은 온기 없는 신축 모델하우스 같다 시간은 아직 밤도 낮도 아닌 어정쩡한 5시, 날카로운 창살에 찔린 저녁의 몸에서 하나둘 스며드는 불빛, 신데렐라가 오기 전 남은 7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어도 봤지만 꼼짝 못하게 가둬 고문하는 어둠 깔린 적막, 새벽 창에 깔린 형무소 감방 같은 더디게 사라지는 적막이 더 두려웠다 말없이 상품 진열 하는 일, 빈자리에 다시 채워 놓는 한낮은 부산하게 움직여 그나마 위안일 뿐, 누군가 시계태엽을 K의 몸에 감아두고 갈비 살처럼 시간을 잘게 썰어 내는 일, 돌고 도는 반복만이 K의 몫이었고 말은 점차 잃어 모국어와 영어가 뒤엉켜 말 못하고 당황한 몸짓으로 어깨 위로 올려진 손 내리던 때도 있었다 타임카드 찍고 정시에 빠져나와 길거리에 내 밀린 오늘도 구세군 차에 실려 가는 버려진 중고물품이 된 기분을 누가 알까 텅 빈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석양은 뼈마디에서 흐르는 아픈 각혈로 바라볼수록 몽롱해지는데 오는 봄에 다가가기 위해 가지 잘려진 겨울 가로수도 K의 마음을 아는지 흔들린다 무심코 차량행렬로 들어섰다 굳게 닫혀있는 유리창, 신호등에 잠깐 발길 멈춰도 아무도 눈 마주치기를 거부한다 아슬아슬한 차선변경으로 남겨둔 고독들이 K의 주행을 따라 다녔다 미세한 먼지들이 불빛에 달려들거나 바람에 흩날리며 멀어져간다 문득 눈앞에 펼친 광채가 보인다 퇴근길에 스치던 간판이건만 새롭게 발견한 느낌은 왜일까 주행이 아니라 날아가 저만큼 비행기 활주로에 깔린 불빛 향해가는, 안개 속 바다를 항해하다 만난 등대보다 깊은 오색찬란한 불빛이 점점 커져오면서 동공에 들어차 아찔하다 흥분된 격정의 신혼 같은, 생 갈비 집에 꿈틀거리는 황소의 커진 눈, 그 눈으로 날마다 죽는 것을 멈추고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새롭게 세상에 그의 진면목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시작, 꿈꾸던 파라다이스를 향해 이민 오던 첫날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환상적 야경, 12시가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K는 모르고 있다

                                        * 계간《미주문학》0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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