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의 세계 -이장욱
2011.04.03 10:00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왼쪽 귀로 들어왔다가 오른쪽 귀로 흘러나간 수많은 목소리들처럼 문득 다른 궤도로 들어선 기차처럼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오후 내내 숨어 있던 소년은 결국 캄캄한 다락을 나가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 간 외딴 바닷가에는 당신이 너무 많고 오른쪽 귀로 흘러나간 것을 왼쪽 귀로 모아 이야기를 지어내느라 할머니는 죽지도 못했네. 소년은 자라지 않고 어둠이 되었다. 어둠 속의 바퀴벌레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수많은 당신들은 아직 그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는 단 하나의 당신과 손을 잡고 돌아왔지. 연애하던 호시절을 이야기할 때 할머니, 할머니는 살아 계셨네. 하지만 만일……이라고 누가 말했다. 거기는 어둠뿐이야, 그것이 좋지, 라고 소년이 대답했다. 바닷가의 의자들은 거꾸로 서 있고 태양이 밤에 뜨는 곳, 수많은 당신들은 거기서 외롭게 앉아 있지. 긴 귀를 가진 할머니는 어둠처럼 파도처럼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해주었네. 밤이 새도록 나는 낯선 길을 달려갔다. 다락에서 나온 소년은 두 귀를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오늘밤도 무덤 위에 산 채로 앉아 계셨다. 만일……이라고, 누가 힘겹게 말했다.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 노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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