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림모텔 -류외향

2011.06.13 07:49

한길수 조회 수:433 추천:16



사철탕집이 즐비한 그 골목엔 풍림모텔이 있다 들녘을 달려온 바람이 모텔 외벽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골목 어귀를 돌아나가지 못할 때 그땐 이미 사철탕집의 지붕 너머로 붉은 달이 떠오른 뒤였다 마른 어둠이 몸 뒤채는 소리가 깊어질 때 나는 풍림모텔로 들어갔다 한 그루 은행나무의 손을 잡은 채였다 수천 년을 걸어 그에게로 갔다 오체투지로 다가가 그녀의 속살을 더듬어 물기 마른 나이테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내 손이 그의 허리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일찍 태어난 잎들이 침대 위로 떨어져 내렸고 커튼을 젖히고 들어온 바람이 그 잎들 위를 자분자분 걸어다녔다 그의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전생과 후생의 언어들이 비밀스럽게 내 귓바퀴를 간지럽혔고 우수수 일어선 잎들이 공중을 떠다녔다 잎들의 소용돌이, 푸른 블랙홀 속에서 우리는 전율했다 사철탕집 지붕 너머에서 미열 같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풍림모텔을 나왔다 한 그루 은행나무와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우리를 따라나온 바람이 골목 어귀를 휘몰아쳐 갔다 내 몸에 잎이 돋고 있었다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경북대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99년 《 시안》신인상에 당선 1999년에 대산창작기금, 2000년에 문예진흥기금 수혜,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 』『푸른 손들의 꽃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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