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억새를 위하여 -김수열

2011.08.03 10:13

한길수 조회 수:358 추천:10



겨울비 내린다 억새를 예찬하던 축제는 끝났다 축제를 기억하는 건 사라져버린 폭죽과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휘청거림 억새가 죽고 가을이 끝났다 가을과 함께 억새들도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은 괴괴하다 죽은 억새는 죽어서 살아 있다 억새꽃 백발이 성성할 무렵 이파리는 앞다투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땅바닥에 머리를 베고 미련 없이 떠났다 죽어야만 산다는 걸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 땅에 머리를 박은 뿌리는 더욱 처연했다 실핏줄은 죄다 잘라내고 팔 다리도 아낌없이 떨쳐버리고 땅 속 깊이 뿌리를 대고 오로지 가슴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야지만 그나마 살 수 있다는 걸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야지만 먼길을 돌아온 억새꽃 하나 여기 설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겨울비를 받아들이는 그네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59년 제주 출생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어디에 선들 어떠랴』『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바람의 목례』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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