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너힐의 집배원 -강경보
2011.08.13 01:27
케이프타운 시그너힐에는 옛날 동인도제도에서 팔려온 노예들이 대를 이어 정착했다는데 번지나 호수를 매기는 대신 집집마다 다른 색깔로 구분을 했다는데 집배원은 어떻게 그 많은 집들을 기억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편지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나서 그의 얼굴을 기억했을까? 집 색깔을 기억하고 배달했을까? 아니면, 이름 옆에 색깔을 붙여 주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집집 색깔은 늘어났을 것이고 집배원도 따라 늙어 자꾸 어두워지는 세상의 빛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것인데 어느 날 문득 같은 듯 다르거나 다른 듯 같은 사람들이 꿈결처럼 모여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그는 마음 닿는 곳에 편지를 툭! 던져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푸르거나 파르스름하거나 시푸르둥둥하거나 그것은 마치 푸르면서도 푸른 것이 아니고 붉으면서도 붉은 것이 아닌 불그르죽죽한 나무울타리 앞에서 한 세대 전쯤에 자신에게 친절했던 곱슬머리 촌부의 헐렁한 고독을 기억하고 자신의 늦은 안부를 던져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늙은 집배원이 지나가거나 되돌아갔을 언덕 아래쪽 구부러진 길로 눈길을 주고는 자신의 집에 배달된 편지를 뜯어보기도 전에 방금 다녀간 시리거나 눈부신 색깔을 제 가슴에 차곡차곡 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1965년 강원도 홍천 출생 2006년 < 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 『우주물고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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