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 일만이천사십오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 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고 흔드는 건 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 피가 침에 섞이듯 자다 깨 겸연쩍은 그의 웃음에 달빛이 뒤섞였습니다 어젯밤의 토사물이 말라붙은 변기 같은 창문에는 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처럼, 추접스러운 구름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반복 재생되는 레코드의 노이즈 같았습니다 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수련의가 내게 일만이천사십오번째 똑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저랑 이야기하는 걸 멈춰도 된다는 뜻입니다 삭신이 쑤시네요 저는 아직도 이렇게 아픕니다 수련의는 만지작거리던 호두를 망치로 내려쳤습니다 당신의 뇌는 여기 이 녀석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충분히 기름지고 윤기가 흐릅니다 그게 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효과입니다 무중력 속에서의 가벼운 핑퐁처럼 무한정 반복되는 비가 눈으로 바뀝니다 농담같이 슬그머니 세계는 조금 느려집니다 단 오분 간의 폭설로 시커먼 적설이 병원 옥상까지 쌓였습니다 수련의와 제가 있는 진료실은 심해 속의 기포처럼 우주 속의 작은 공기주머니처럼 한 점 공기보다 작은 소형 우주선처럼 어둑어둑하고 희박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들이 우리가 흡입해야할 공기를 다 들이켜고 있습니다 활자들이 배고픈 병정처럼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우리는 폭설의 한가운데 있었고 폭설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침묵과 이야기는 세팅된 일정 비율로 혼합되었습니다 축축한 손아귀처럼 비바람이 우리의 머리와 사지를 깍지 끼듯 붙잡고 그리고 수억년 전부터 계속되었던 합창 연습 시간에 따라 단조로운 리듬에 맞춰 일정하고 힘차게 손을 흔듭니다 우리는 속절없이 흔들립니다 이곳에선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의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여긴 희박하고 어둑하고 아늑하고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정전.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국경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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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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