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시집, [눈물 속에 고래가 산다] -퍼옴

2005.03.29 10:36

한길수 조회 수:994 추천:29

물에서 불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시집의 성격에 따라, 그 쓰여진 내용에 라, 편집의 방향에 따라, 아니면 독자의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읽는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시집은 돋보기를 들고 상형문자를 해독하듯 아주 천천히 읽어야 하고, 어떤 시집은 순서에 관계없이 손 잡히는 대로 듬성듬성 읽는 게 낳고, 어떤 시집은 거꾸로 읽어야 시인이 의도한 바가 선명히 이해된다. 또 어떤 시집은 따뜻한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느긋하게 읽어야 제 맛이 나고, 어떤 시집은 바른 자세로 온 마음을 집중하여 피 튀기듯 읽어내야 겨우 감이 잡히고, 어떤 시집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시간 날 때 아무데서나 한편씩 읽어야 감칠맛이 배어난다.
  나는 이대흠의 시집을 처음 후루룩 읽은 다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천천히 읽기로 했었다. 그리고 목차 순서를 무시하고 거꾸로 읽는 게 시인의 속마음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딱딱하게 느껴진다. 그 딱딱함 속에 부드러운 속살이 숨어 있음을 깨닫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나의 독서 방법 선택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유익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4부로 구성된 작품 배열에서 뒤의 3, 4부 작품들이 앞의 작품에 비하여 의미를 선명히 드러내주기에, 앞의 모호함이 뒤의 작품들을 통해 상당히 해소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대흠을 이 시대의 다른 시인과 구별되도록 하는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성이 거세된 요즘의 젊은 시인들 틈에서 그는 유별나게 세상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가 세기말적 데카당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의 연민과 사랑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을 그의 시에 드러나는 두 가지 상징물인 물과 불을 통해 살피고자 한다. 그의 시가 80년대의 리얼리즘처럼 당대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이 시대의 모순을 밟고 일어서려 한다. 몸 담그고 있는 현실을 밀고 나아가며, 때로는 그 더러운 탁류에 몸을 씻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불태워 깨끗해지기를 염원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를 구분하기는 힘들다. 사실 어떤 순서를 매긴다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가 현실을 토대로 하면서도 불가능의 완성을 염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결국 초월을 꿈꾸는 것 아니겠는가.



  너의 뿌리도 흔들리는가
  총열 같은 빗속에
  사랑아

  굽이치는 물결 속에
  덜 익은 수박과 돼지 새끼들 사이 너는
  허우적대며 뿌리 보이지 않고

  발 동동 구르며 나는
  살아왔구나
                -[홍수 속으로]에서



  뿌리까지 흔드는 빗방울을 '총열 같은'이라고 비유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총'은 지난 시대 군사정권을 떠올리게 해주고, 그곳을 통과해 가는 과정을 총탄을 뚫고 죽음을 무릅쓰며 살아가는 것으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대흠의 군사정권에 대한 거부감은, 다른 시에서는 우회적으로 표현되는 비판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예컨대, [노래]에서는 "저들이 말하는 저들의 역사/반드시 삭제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는 위대하므로]에서는 심지어 "이제 그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자 그곳에서 그가 주정 아닌 목소리로 눈을 부릅뜬다면 돌멩이로 그의 대가리를 찍자"고 외친다. 빗물을 총알에 비유한 이상, 그 비는 더러운 것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굽이치는 물결 속에/덜 익은 수박과 돼지 새끼들 사이'에서 혼탁함에 빠진다. 홍수 속에서 빗물을 피할 방법은 없다. 시인 자신 또한 그 빗속을, 그 인고의 세월을 살아오며 더러움에 이미 몸을 적신 것이다. '발 동동 구르며' 살아왔다.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N.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에는 하나의 이미지가 서로 상반되는 속성을 지닌 채, 시인에 의하여 어느 한가지 측면이 작품을 통해 강하게 구현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의 이미지와 상징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이슬방울이나 감로주처럼 맑고 깨끗한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노아의 홍수처럼 세상을 쓸어버리고 파괴시키는 힘을 갖는다. 딱딱하게 굳은 대지 위에 뿌리는 봄비는 생명의 뿌리를 일깨우는 활력이 되지만, 도시의 하수구를 빠져나와 공장 폐수와 섞인 갯물은 대지를 오염시키고 생명을 갉아먹는다. 이대흠의 시에서 물의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 않으면서, 그 몇 개의 이미지들이 모두 불결한 것들과 연결된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의 '홍수'도 그렇지만, 다음의 작품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 집수정으로
  세상의 때 벗겨 지친 물들이
  누렇게 뜬 얼굴로 흘러듭니다

  둥둥 뜬 스티로폴

  내 어린 시절 둠벙이나 저수지에
  둥둥 뜬 흰 오리떼

  젊은 아버지의 희망이었던
                -[오리]에서



  지하로 스며든 오염수와 집수정의 물위에 뜬 하얀 스티로폴을 보면서 지나간 아버지의 열망을 섞어내고 있다.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화자의 아버지는 전에 오리를 길렀다가 '알 수 없는 병에 몰살당한 오리떼'의 경험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아버지 개인의 희망, 나아가 가족의 생존을 위협받는 일일 수도 있다. 희망이 꺾이는 그 순간의 오리가, 지금 시인에겐 스티로폴이 되어 더럽게 오염된 물위에 떠온다. 집수정의 물이 '세상의 때 벗겨/누렇게 뜬 얼굴'이 되어 희망을 갉아먹고 아버지처럼 화자도 '늙어간다.'
  이렇게 물은 더러운 것으로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물이 더러운 것은 처음부터 물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수기의 물이 깨끗한 것은 그 여과 필터가 스스로 더러워짐을 감내하고 모든 불순물들을 걸러주기 때문인데, 이대흠 시인에게 있어서의 물 자체도 마치 세상의 필터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세상의 때 벗겨 지친 물'이 된 것 아닌가.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녹여, 스스로 더러워지더라도 세상이 조금이라도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연상은 작품이 쳐놓은 테두리를 벗어나는 확대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지향하는 삶에의 희망과 사랑을 염두에 둔다면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세상의 더러움은 곧 현실의 모순인데, 그 중에서 이대흠 시인에게 가장 무거운 억압이 되는 것은 '그해 봄'의 죽음들과, '율도'로 상징되는 노동소외 현상이다. 시집 마지막 4부의 작품들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고, 그 앞 3부의 작품들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각각 한편씩의 예를 들어보자.



  살점이듯 진달래꽃 떨어질 때마다
  총성이 우렸다 뉴스를 감추며 신문은
  발행되었고 광주에 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고 없는 죽음이
  마을의 집 사이에서 꽂히고
  함석 쪼가리 같은 어머니 가슴에 안겨 나는
  어머니가 녹스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다
                -[그해 봄은]에서



  가을 깊어갑니다
  싸늘하여 옷을 껴입을수록
  나는 자꾸 작아집니다

  개펄을 메워
  자동차 공장을  짓습니다
  철제 빔으로 된 건물의 구석이나 천장에
  나처럼 검은 짐승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율도 4]에서



  '그해 봄'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광주의 5월을 이른다. 시인에게 있어 광주는 살육의 현장이기보다는, 그 슬픔이 '어머니 가슴에/양철 쪼가리'처럼 녹슬어 가는 흔적의 길거리이다. 아직도 흉흉하게 남아 있는 '소문들'을 밟으며 걷는다. 1980년이면 시인이 아직 어린 나이였을 때이므로,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조금씩 눈 떠가는 시기이었을 것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율도'는 공사장에서 노동을 하며 느끼는 소외감의 표현이다. 철골 구조물 위에 한없이 높이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면, 세상은 오히려 적막하고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고독에 사로잡힌다. 땀이 범벅이 되어 삶의 현장에 있으면서, 그 테두리 밖의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위치에 서 있다는 존재의 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고독의 표현을 '율도'에 비유한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광주가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흔적이듯, 그에게 있어 노동은 삶을 사랑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율도'란 본래 '율도국'을 지칭하는 것일 터이니,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상세계로의 초월인 셈이다. [땀 흐른다]에서처럼 그는 땀이 결국 '열매'로 맺혀 결실을 보리라는 낙관적인 견해, 혹은 희망으로 열린 문에 기대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버려진 것들은]에 나오는 바,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들을 오히려 버린다는 자기위안 정도는 분명히 있다. 이러한 태도는 삶에 대한 긍정적 사랑에 그 뿌리를 둔다.



  위태롭게 쏟어부은 피곤의 무게가
  그토록 부드러운 바퀴로
  굴러가는 것을 보면
  허무라든가 절망이라는 말들이
  쥐새끼처럼 달아납니다
  현장에서 몇 년을 비비다보니
  어디서건 노동은 따스함으로 다가섭니다
                -[사람의 체온]에서



  우리가 편하게 생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은 노동자들의 땀으로 만들어진다. 전등, 수도꼭지 하나부터 집, 도로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너무나 친숙하여 마치 없어도 되는 것처럼 느끼는 이것들에, 땀의 소중함과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기엔 우리의 현실적인 여유가 메마른 것이 사실이다.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그것도 노동 자체의 숭고함을 깨닫고 있는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물건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그 물건의 소중함을 알 듯, 노동에서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대흠 시인은 이러한 면에서도 썩어가는 시대, 썩어가는 90년대 시를 한쪽켠에서 건강하게 유지시켜 나아가려 애쓰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희망에 대한 열정은 때로 격렬한 불꽃이되어 타오르기도 한다. 세상을 숭고하게 바라본다는 것이 아름답거나 훌륭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초상화를 동반한다. 어쩌겠는가. 세상에서의 희망은 관념의 영역일 뿐이며, 실제로 노동을 사랑한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편해지고 일당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생활의 고통은 고통일 뿐이며, 그만큼 욕망도 증폭된다. 80년대 노동시의 중심에서는 노동이 힘이 되고 목표가 된 적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90년대의 노동은 생존의 수단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노동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과 사실의 경계가 지금처럼 확연하게 구분되던 시기는 없었다.
  시인은 이것을 '허기진 그리움'으로 절규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농심 새우깡처럼,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바삭바삭 금방 무너질 듯 마른기침을 토하며, 그리워 그리워해도 그리움은, 질리지 않고, 물 같은 당신에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버릴 듯,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라도 불길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그리움은,
                -[먹어도, 먹어도] 전문



  '물 같은 당신에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내릴 듯'하면서도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라도 불길처럼' 타오를 것 같다. 여기에서의 당신은 우리 시대 삶의 질곡을 이루는 본질인 셈인데, 여기에 젖어들면 빠져나올 수 없으면서도, 시인은 그것에의 열망과 사랑을 버릴 수 없다고 울부짖는 것이다. 더러움의 상징인 물로부터 모든 불결한 것들을 태워버리는 불로의 극적인 전환을 통해 시인은 초월의 극치에 닿는다. 그렇다. 삶이 더럽다고 어쩔 것인가. 우리는 그 더러움에 몸을 적시며 살아야 하는 것을. 차라리 더러움을 내면의 불꽃으로 태워버리고 스스
로 오염된 시궁창 속에서 꽃을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에게 마지막 진실로서의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삶이 비극이라는 인식은 이대흠만의 것이 아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삶이란 언제나 비극적이다. 지금도 그렇고, 80년대도 그러했으며, 그 이전에도 그랬다. 시인이란 그 비극적인 삶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모순, 즉 비극을 사랑해야 하는 숙명에 목을 걸고 있는 자들이다. 이대흠이,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비극이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살아가야만 한다는 '노여움'을 '몸을 떨었네 휘발유 같은 세월 있었네'라고 [나 아직 이십대]에서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극을 접수하고, 그 비극의 씨앗을 거듭 가슴에 심어야 하는 고통 속에, 90년대 세기말이 흘러가고 있다.



  감옥입니다 어찌 보면
  내가 있는 곳 전부 감옥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 뱃속 그 따뜻한 감옥에서
  이 차가운 감옥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은
  뜨거움 없는 여름입니다
  두렵지 않아 슬픕니다
                -[자화상]에서



  세월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또 나이가 어렸을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삶의 본질은 바꾸지 않는다. 모두가 다 감옥이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이 시집 전체를 압축한 시인의 고통과 비애의 절규이면서, 우리의 정직한 초상화를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슴 아프다. 감옥에서 태어나 감옥으로 온 이후 계속 감옥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말이다. 한편, 감옥이라 해도 어머니의 뱃속은 '따뜻한' 감옥인 반면, 지금 우리 세상은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감옥이라고 말한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차가움/따뜻함>은 앞서 말한 바, <물/불>의 대비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따뜻함의 세계는 비록 감옥이라 할지라도 순결함과 아늑함이 숨어있는 삶의 원형질인 셈이고, 차가움의 세계는 버림받은 자들의 쓸쓸함과 고독이 고통으로 회오리치는 장소이다. 차가운 물의 세계가 비록 현실에서 불을 통해 정화될 수는 없겠지만, 시인의 초월 의지가 지향하는 방향은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시집의 첫 작품으로 [불 속으로, 그 남자]를 얹어놓은 시인의 의도를 눈치챌 것 같다.



  마음속 우거진 슬픔을 누가
  벌초해주리 그 남자
  함부로 돋아나는 슬픔의 밑동을 자르며
  불 속으로 그 남자 세상 속으로 온몸을
  불 속으로 밀며 나사처럼 야위어
  어긋난 세상에서 헛돌며 자꾸
  헛돌며 뱅뱅 불 속에서 세상
  속에서 헛돌며 슬픔은 나비떼 뱅뱅
  날아오르고 아찔해 그 남자
  세상의 불 속으로 걸어가네 흐느낌 없는
  세상은 뜨거워 그 남자 헐거운 몸으로
  세상을 조이고 있네 세상 속에서
  불 속에서 녹슬지 않는 몸으로
  그 남자
                -[불 속으로, 그 남자] 전문



  처음 시집을 펼치고 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은 아마도 이 작품의 진정한 깊이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슬픔, 나사, 어긋난 세상, 불' 등의 시어에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핵심어인 '불'의 상징에 대하여는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찬찬히 시집을 거꾸로 읽어 올라간 독자라면, 이 작품이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울음/울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은 더러운 현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삶의 현실을 두고 탄식하는 슬픔이다. '나사'를 '헛돌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중첩한다. 하나는 시인 자신이 노동현장에서 밥먹고 살면서 느끼는 삶의 비애와, 다른 하나는 세기말적 부유하는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상실감을 의미한다.
  '불'은 척박한 삶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과 싸우며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눈물겨운 의지이다. 물로 더럽혀진 몸을 불로 태워 세상의 헐거움/헛돌아감을 조이고, '불 속에서 녹슬지 않'도록 스스로를 정화/단련시키는 힘이다. 물에서 불로 나아감은, 물질이라는 밖의 세상에서 정신이라는 안의 질서로 수렴함을 뜻한다. 삶의 가치는 어차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 중에 이렇게 건강한 시인이 있다는 것이 나는 정말 고맙다. 눈물난다. 시인을 '세상의 등불'이라고 부르는 것이 요즘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대흠 같은 시인이 있어 아직도 그 말은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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