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집, [풀잎 속 작은 길] -퍼옴

2005.03.29 10:37

한길수 조회 수:1388 추천:45

한 자연주의자의 웃음과 울음

     1



  나태주 시인만큼 한 자리를 오래 지켜온 시인이 있을까? 1971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3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셈인데, 그 수상하고 구불구불한 세월 동안 오로지 한가지 세계에만 매달려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 내겐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는 그 변치 않는 세계를 요약할 한 마디를 고르기 위해 여러 날을 망설임과 고민 속에서 보냈다. '고향'이나 '변방'의 이미지도 많이 나오고, '사랑'이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여러 작품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래의 시집  {풀잎 속 작은 길}이 보여주는 자연친화적 관점이 그의 세계의 정점이며 집약이라고 판단하여 과감히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물론 이 말은 문예사조에서 이르는 '자연주의 Naturalism'나 노벨상 수상시인 S. 히이니의 시집 제목{자연주의자의 죽음}을 연상하게 하여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다.
  나태주의 세계가, 리얼리즘에 뒤이은 자연주의나 히이니의 자연관과 전혀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이들은 다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자연주의는 19세기 후반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모든 대상을 자연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믿은 글쓰기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E. 졸라나 S. 크레인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여기에서의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의 의지로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중심주의, 합리적/근대적 사고의 전형을 드러낸다. 나태주에게 있어 자연관은 이것과는 전혀 반대이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의 종속물이 아니라, 인간을 그 속에 내포하는, 보다 폭넓은 생성의 힘을 갖은 존재로 드러난다. 또한 히이니에게 있어 '자연'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을 아우라로 갖으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적 운명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도 나태주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나태주의 것은 히이니가 갖고 있는 정치적 층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시인 곁에 스스로 '있는' 존재적 층위로서의 자연이다.   나태주에게 있어 자연은 '나-대상'의 관계가 서로 구속되지 않는 관계이면서도, 그 어느 것보다 그 본질에 닿기를 요구한다. 손 내밀면 손끝에 자연이 닿는다. 엄격히 말하자면 구체적인 것들, 꽃이나 나무, 벌레나 개구리, 바람이나 구름 등이 거기에 있다.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래 거기에 있음으로써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졌던 것, 그래서 시인의 손끝이 닿으면서 새롭게 환기된 새로운 존재들로 그 정체를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이렇게 당연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자연 대상을 만들어 내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중심으로 난 '작은 길'을 찾아내 그가 조심조심 걸어 들어갈 뿐이다. 자연으로 들어가 온전한 하나가 되기를 희망하는 세계, 그래서 스스로 완전한 '자연인'이 되기를 염원하는 세계가 바로 나태주의 시세계이다. 희망이나 염원은 '지향성'을 뜻하는 것이 되므로, 다소 거슬리기는 해도 그에게 '자연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여 지나친 과장은 아니 될 것이다.
  우리 근래 시단에 '환경시' '생명시' 혹은 '생태시' 바람이 불고 있다.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환경시는 보다 구체적으로 공해에 찌들어 위협받고 있는 인간 존재의 위기감을 표현하고, 생명시는 인간/자연에 있어 생명의 근원과 조건을 파헤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생태시는 환경시나 생명시와 마찬가지로 '생태학 ecology'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가깝게 다가온 것인데, 생태계의 파괴가 인간 영역 밖에 있는 동.식물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도 존립의 위협이 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거의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므로, 통괄하여 '생태시'로 이름 붙인다면, 다소 소박한 차원이긴 하지만 그 생태시들이 인간중심의 합리적 사고방식에서 자연중심, 혹은 생태계 중심의 비선형적 사고로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패러다임이 된다.
  '생태계 중심'이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자연중심'이라는 것과 같다. 생태학이란 본래 생명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생명의 조건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생태학은 생태계가 올바르게 균형 잡을 수 있는 자연의 조건들 - 기온, 습도, 영양상태, 먹이사슬, 생식, 에너지의 이동추이 등을 연구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자연의 에너지는 항상 균형을 이룬다. 에너지의 형태가 변화되고 이동될 수는 있으나 그 총량은 변하지 않으며 각각의 위치에서 균형상태를 이룬다. 이것이 정상적으로 순환하는 생태계의 현상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에너지가 불균형을 이루어 과잉되거나 결핍되는 곳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곧 오염을 낳는 원인이 된다. 이산화탄소로 변이된 에너지가 산성비나 온실효과 등을 낳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환경오염의 원인은 바로 '에트로피 entrophy' 때문이다. 에너지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에너지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해도, 문제는 그 에너지가 사용 가능한 에너지에서 쓸모 없는 에너지로 점차 확산되어 간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의 생명개체가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은 불균형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저 막막해진다. 조금 단순화시킨 비교이지만 다음의 예를 보자.

  밀러의 계산에 의하면, 먹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80∼90퍼센트의 에너지는 그저 낭비되어 열의 형태로 주위 환경에 버려진다.' 얻은 에너지의 10퍼센트로부터 20퍼센트 정도만이 먹이사슬의 다음 단계로 이전된다. 다음 단계의 생물이 최대 엔트로피 상태에서 죽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각 종의 숫자를 생각해 보자. '한 명의 사람이 일년을 살기 위해서는 3백 마리의 송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3백 마리의 송어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필요로 하고, 그들 개구리는 2천 7백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이들 메뚜기는 자그마치 1천톤의 풀을 먹어야 한다.'

  한 사람이 균형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다른 생태계를 파괴하여야 하는지 짐작이 간다. 엔트로피는 순환과정에서 점차 극대화되며, 역설적으로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증가한다. 결국,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는 한 엔트로피의 감소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연은 자연의 순환법칙에 의하여 평형상태를 이루어 왔는데, 인간이 자연을 조절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증폭된 엔트로피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복을 가하고 있다. 우리가 근대화.산업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해온 것에 대해, 자연은 눈에 보지는 않지만, 가장 비싼 값으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보자. 멀리 갈 것도 없이 문을 열고 밖을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수돗물은 그냥 마실 수 없고, 공기는 텁텁하다. 골목에 쌓인 쓰레기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도시 거리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멀리 시선을 돌리면, 강에서는 물고기들이 허옇게 죽어 떠오르고, 식수원이라고 부르는 물줄기는 누렇거나 검은 색으로 혼탁하다. 비만 오면 공장폐수가 버려지고, 가뭄이 들면 적조현상으로 물감 풀어놓은 것 같다. 골목을 떠난 쓰레기는 더욱 거대한 쓰레기산을 만들며 다시 김포매립지에 쌓인다. 사람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곡이든 해변이든 산꼭대기든 쓰레기가 넘쳐난다. 이것들은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 그대로 썩어가고 있는 중이다. 공장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바다 건너 중국 땅에서 황사와 함께 불어오는 매캐한 연기, 숨쉬기조차 불편하게 거리를 꽉 채운 자동차 매연......
  이러한 공해들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조금 더 편하게 잘 살아보자고 애쓰면서 생겨난 부산물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구호 속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위험이 숨어 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연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우리에겐 엄청난 재난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바꾸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이 시대의 커다란 패러다임으로 부각되었고 그것을 문학에서 반영한다면, '생태시'를 논의하는 관점에서도 새로운 척도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고 싶다.
  첫 번째는 소위 말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이 지구상에서 진정한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공룡이 지구의 주인공이 아니었듯이, 인간 역시 자연을 지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올바르게 균형잡고 제어하는 힘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어느 특정 개체나 종이 자연을 지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모든 종은 다른 종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과 종 사이의 역학관계, 즉 '생태계ecosystem'
라는 추상적인 힘의 장력이 진정한 자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계를 위협하는, 그것도 국지적으로서가 아니라 전면적으로, 어떠한 개체도 자연을 파괴하는 세력일 수밖에 없다. 유감이지만 인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두 번째는 소위 말하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허상을 버려야 한다. 데카르트 이래 서구 근대사회를 이끈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이성의 완벽함이라는 신화를 낳았다. 그러나 이성을 갖은 존재가 바로 인간 외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여, 인간의 이성은 근대성의 합리화라는 탈을 뒤집어 쓴 채 사실은 광기에 탐닉했던 것이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들이 매우 위험한 도그마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통해 이성중심의 근대적 한계를 잘 드러내주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우리의 이성으로 속단할 수 없는 영역 저편에 있으며 우리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 문제를 잘 조절하고 있다. 오히려 그 조절의 범주 속에 우리가 속해 있다.
  세 번째는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분석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모든 물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존재한다. 즉 모든 물질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을 통하여 우리가 얻는 결론은 편협적이거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전체적/통합적 holistic' 관점에서의 우주관이다. 자연의 모든 물질들은 생명형성에 긴 세월 동안 직.간접으로 간섭하고 영향을 미쳤다. 이 연결고리 속에서만 생명은 가능하며, 고리의 매듭이 전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문화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일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물질을 무시한 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 앞에서 왜소한 작은 존재, 고리의 끝에 매달린 보잘것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밀고 나아가, 우리가 자연의 한 작은 부분으로 물러서는 것뿐이다. 우리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허용할지 모르지만. 나태주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나는 기쁘고도 우울하다. 그의 자연주의자로서의 다감한 손길이 아름답고, 시인의 목소리 밖에서 시끄럽게 흘러가는 저 세상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제 한 시인의 작품세계를 좀더 세밀히 읽으며 희망의 단서가 한줌이라도 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



  나태주 시인은 첫시집 {대숲 아래서} 이후 {풀잎 속 작은 길}에 이르는 10여권의 시집을 냈는데, 80년대 순수서정시가 푸대접받던 시절 그 절반 이상의 시집을 냈으니, 그가 시를 쓰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색채를 지켜왔는지 짐작이 간다. 그를 떠받들고 있는 기본 정조는 물론 자연이다. 풀과 나무들 곁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그들과 뒹굴고 그들과 살아간다. 물론 초기의 시부터 지금에 이르는 작품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예컨대 80년대 쓰여진 작품들은 시인의 개인적 생활과 내면의식을 그리는 데로 많이 흘러가지만, 그 아래에는 언제나 자연을 순수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즉 물질적 이미지가 등장할 때에도 정치적 혹은 경제적 차원에서 물질이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제거된 채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우리집 좁은 뜨락 한 귀퉁이 한뼘 흙을 헤쳐
  아내가 심은 몇 포기 애기호박
  아침마다 우리집 네 식구가
  밤 사이에 눈 요강 속의 오줌 받아 먹고
  잘도 자라 칙간채를 기어올라가
  구름덩이 같은 이파리를 피우더니만
  주렁주렁 애기호박을 잘도 매달게 되었다
  우리가 먹고 남을 만큼
  애기호박이 많이 열리자 아내는
  애기호박들을 따서 평소 마음 빚진
  이웃아낙들에게 돌린다
  허참, 그것도 적덕은 적덕이요
  빚갚음은 빚갚음이렸다!
                     - [애기호박] 전문



  지금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되었지만, 시골 옛집에는 사랑채 건너로 칙간이라 불리는 작은 화장실 건물이 있었고 그 뒤편에는 의례껏 호박을 심어 덩굴을 지붕으로 올리곤 했다. 이 시의 배경도 그러한데, 덩굴이 실하게 오르고 애기호박이 많이 매달리자 그것을 따서 화자의 아내가 이웃에 돌린다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덕을 쌓는 일이 아니겠냐고 절반은 농담조로 훈훈한 웃음을 흘리며 시가 끝난다. 시인의 소박한 마음씨가 시골의 훈훈한 정과 함께 섞여 정겨운 맛을 자아낸다.
  그런데, 나는 스토리의 일차적 의미 너머에 시인이 믿고 기대는 속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애기호박'이 자라나는 장면의 묘사와 애기호박을 삶의 단편으로 수용하는 시인의 자세에서 읽을 수 있는 바이다. 호박이 자라는데 영양분으로 삼은 것은 '아침마다 우리집 네 식구가/ 밤 사이에 눈 요강 속의 오줌'이다. 호박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자양분을 먹고, 사람은 다시 호박이 맺은 열매를 따먹는다. 호박이 '구름덩이 같은 이파리를 피우더니만/주렁주렁 애기호박을 잘도 매달게 되었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화자가 자연을 대하며 얻는 가치가 넓고 너그러우며 풍요롭다는 것을 느낀다. '잘도 매달았'다는 말에서 그러한 흐뭇함이 배어 나온다. 나아가 이 작품은 시골의 한적하면서도 다감한 풍경들, 가까이 산자락이 걸려 있고, 지붕 너머로 이웃집 처마가 둥글게 휘어지고, 들판 멀리서 개구리들이 뛰어 노는 풍경들까지를 이끌어온다. 그런 것들이 모두, 호박이 그러하듯 제자리를 지키며 존재의 의미조차 숨긴 채 풍경의 일부로 녹아든다. 나태주 시인에게서 생활의 욕망이라는 것은 바로 호박을 이웃에 돌리는 것 정도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는 이러한 자연관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 [다시 山에 와서] 부분



  조금 긴 작품의 끝 부분이다. '눈물'이나 '불면'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일상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괴로움들이다. 시인이 젊은 나이에 쓴 작품인데, 현실의 삶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삶을 초월한 저쪽의 세계, 즉 '싱그런 나무'로 상징되는 자연으로 귀의해 들어가겠다고 했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산에 와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와 어울리며 살겠다는 의지이다. 세상의 속정을 떼어낸다는 것이 우리 같은 범인들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선집 중에는 {빈손의 노래}라는 것이 있는데, 표제시가 된 작품도 역시 그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위 인용 작품과 맥을 같이 한다. 일부만 보면 다음과 같다.



  허나, 더 늦기 전에
  나도 들로 내려
  드디어 낭자히 풀벌레 소리 강물된 옆에
  실개천 물소리되어 따라 흐르다가
  허리 부러진 햇살이나
  주머니에 가득 담아가지고
  한나절 흥얼흥얼 돌아올거나.
                -[빈손의 노래] 부분



  40행이 넘는 긴 작품의 끝 부분이다. 인용 바로 앞에는 '애당초 아무것도/바라지 말았어야 했던 걸 모르고/너무 많은 걸 꿈꾸다가/너무 많은 걸 찾아다니다가/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만/이제 또 가을'이라는 구절이 있다. 삶의 과정 하나 하나가 모두 허위를 쌓는 고통이라는, 그러면서 얻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인식이 시인을 강가로 이끌어 간다. 앞에서 성으로 가 나무가 되겠다는 발상과 다를 것이 없다. 강에 가서 '물소리/부러진 햇살'을 주워 가지고 오는 것이나 나무가 되어 '솔바람 소리나 외우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모두 자연만이 화자를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닿는다.
  자연 속의 일부가 되겠다는 의지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공허한 욕심이거나 현실도피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허무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의지표명이 헛말이 아님은 그 이후 그의 글쓰기를 통해 입증되었다. 특히 근래 시집 {풀잎 속 작은 길}은 시인의 의지/욕심까지를 무화시킨 한 극치를 보여준다. 초기 시에서는 시인이 자연이 되겠다고 염원하는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이미 자연과 별개로 구별되지 않는 절정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산이나 강을 찾아 나설 것도 없이, 이미 시인의 언저리에 그것은 와있다.



  한밤중에
  까닭없이
  잠이 깨었다

  우연히 방안의
  화분에 눈길이 갔다

  바짝 말라 있는 화분

  아 너였구나
  네가 목이 말라 나를
  깨웠구나.
                -[한밤중에] 전문



  예전의 시에 비하여 호흡은 간결해지고 언어는 아꼈는데, 그 의미는 훨씬 폭넓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마른 화분을 보았다는 극적인 상황 한 조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는 끝난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하여 나는 화분 속의 식물, 그 축소된 자연과 시인이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음 느낀다. 화분이 잠자고 있는 화자를 깨웠다는 것은 논리나 이성의 판단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또 화자의 물활론적 상상력이 화분으로 하여금 교감을 갖게 만들었다고 판단할 것도 아니다. 그는 방안에 있는 화분을 오랫동안 날마다 보아왔을 터이다. 그런데 수많은 스침을 통해 화분은 화자와 무의식적으로 일체화되어 있던 것, 잠에서 깬 그날 밤에 비로소 그 일체화를 확인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는 시인이 자연을 향하여 나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지만, 이미 자연대상과 그는 하나가 되어 있다.
  이 시집에는 여러 가지 꽃`나무`풀들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혼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으로 간다'고 할 때의 자연은 대개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 아니면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을 연상한다. 식물이 쇠붙이나 동물에 비하여 자연에 걸맞는 이미지인 것은 식물이 모든 먹이사슬의 종착역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여튼 부드러운 생명의 발생지를 향하여 가는 셈이다. 나태주 시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산과 들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일요일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
  그 한 시간은
  나도 경배하러 가는 시간
  풀벌레와 물고기들에게
  무엇보다 씨앗과 열매를 남기고 죽어 가는
  나무들에게 풀들에게
                -[경배의 시간] 부분



  시의 내용은 일요일에 시인의 아내와 딸이 교회를 가는 시간에 그는 '개울길/오솔길 따라' 자연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풀벌레도 보고 물고기도 보고, 나무와 풀도 본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외경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다른 모습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생명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 모습에서 그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시간을 경배/경건함으로 돌아다닌다. 풀에 매달린 열매와 씨앗, 후회 없이 사그라지는 풀줄기들, 살오른 물고기와 그 생활의 내력, 이런 것들이 모두 합쳐져 빛나는 광휘가 된다. 화자는 거기에 압도되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배운다.
  나태주 시인의 세계를 여러 가지 안목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젖혀놓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글의 머리에서 나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메마르다는 것을 말했다. 생명에 대한 경건함이 없이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무게로 인하여 파멸할 것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 우월주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태주는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을 쉽고도 설득력 있는 언어로 환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자연주의자'로서의 시인, 그는 작품 속에서는 적어도 즐겁고 충만한 삶을 산다. 진정한 가치로서의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웃음이 울음과 동질의 것이라고 믿는다. 자연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그런 여유도 쉽게 주어지지 않거니와,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자연에 관한 한 선택권이 없다. 자연이 우리를 선택하도록 우리가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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