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시집, [이슬의 눈] -퍼옴

2005.03.29 10:40

한길수 조회 수:825 추천:79

외롭고 깊고 따스하게

                                                  
  요즘 여전히 시집은 많이 쏟아져 나오지만, 시집을 읽으며 그 언어가 그려내는 분위기에 푹 빠져드는 경우는 만나기 힘들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우선 내가 현란한 말들로 재주를 부리는 시들에서 감동을 받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 나는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시는 그런 것들을 정직하게 드러내되, 거기에 파묻히지 말고 통어하고 조리하여 새로운 질서의 세계로 수렴시키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이런 생각은 너무나 교과서적이어서 구닥다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고집이 아니라, 우리 문학사의 많은 작품들이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에 새로운 길을 냄으로써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는 사실에서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다.
  시의 본질과 뿌리가 우리의 삶 자체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살림살이에 시의 질료와 힘이 숨어 있다. 모양과 색깔과 무게를 갖은 시들은 이렇게 물질 한가운데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 시의 완성은 아니다. 거친 물질을 온몸으로 뚫고 지나가면서, 깨어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밟고 지나가면서, 그 극단으로 밀려 올라간 정점에서 언어가 물질을 떨구어내는 단계에 이른다. 시는 여기에서 다시 시작한다. 무거웠던 질료들이 가벼워지고 세상의 틈 사이로 감춰졌던 길들이 드러난다. 낯선 것들이 새롭게 들어와 앉고, 언어의 아우라가 깊고 넓어진다. 시쓰기에서의 초월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초월은 낭만적 도피나 모더니즘적 파괴와는 다르다. 낭만적 도피는 현실을 버리는 것이고, 모더니즘적 파괴는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의 발로이지만, 진정한 초월은 현실이라는 계단 위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그것을 겪고 이겨내 그것의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현실을 통합된 관점에서 읽어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초월의 진정한 가치는 시인의 살아 있는 경험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없다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보다 '무엇을 쓸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마종기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감동도 아마, 경험의 구체성에서 은근히 배어나오는 진솔함과 사유의 깊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 알다시피, 마종기 시인은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60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반평생이 넘는 세월을 이국에서 보내고 있다. 살아온 내력이 절절할 것이나, 그러나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과연 시인이 외국에 살고 있는 게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언어를 우리 의 몸에 걸맞게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 놀란다. 그의 언어에는 세월의 무게가 주는 고리타분한 냄새도 없고, 삶에 짓눌린 피해의식이나 허장성세가 가미된 고국 향수병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경력의 시인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언어가 신선하며, 경험과 상상력의 폭이 감히 넘겨짚지 못할 만큼 넓다. 그러나 내가 그의 작품에 압도된 가장 큰 이유는 그러한 겉모습 때문이 아니라, 외롭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소박한 꿈과 그 외로움을 따뜻하게 감싸는 삶의 인식이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는 데 있다.
  그는 여기 저기 많이 다닌다. 그리스, 이태리, 터키 등으로 여행을 다는 것, 또 고국인 한국 우리 땅으로 발길을 접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상을 통하여 하늘로, 눈 내린 산으로, 나아가 죽음 저쪽의 세계로 가고 온다. 그의 이러한 여정의 시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끝없는 '희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무엇을 뒤쫓아 다니는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사실은 자신의 가슴에 드리운 외로움을 떨쳐내려는 숨겨진 욕망 때문은 아닐까. 먼저 외로움의 시편을 읽어보자.



  고잉 홈
  (너 몰랐지? 여기서는 관에다가
  고잉 홈이라는 말을 많이 새겨넣는구나.)
  네가 누울 관을 고르면서
  줄줄이 늘어선 관을 공연히 어루만지면서
  자꾸 읽게 된다. 고잉 홈.
  그래, 너도 결국 집에 가는 거구나.

  태평양 너머의 고향이든
  저 높은 그 위의 고향이든
  잘 가라, 아무 말 안 해도
  나는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안다.

  고잉 홈.
  잘 있어, 형.
  나는 집에 돌아가는 거래.
  너무 보고 싶어하지 마, 형.
  네 쓸쓸하게 빈 목소리,
  여기저기서 기막히게 들린다.
                -[동생을 위한 弔詩] 중 '2. 고잉 홈' 전문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비감한 작품이기도 하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 동생이 누울 관을 고르며 '고잉 홈'이라고 쓰여 있는 말을 보고, 그 의미가 화자에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옴을 고백하듯 진술한 대목이다. 여기에서의 '고잉 홈'은 인간의 본래의 고향인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자신의 고향인 고국의 땅과 중첩해 읽는다. 죽은 동생이 돌아가는 곳은 하늘이며 동시에 꿈에서 그리던 고국 어머니 땅이므로 슬퍼하지 말자는, 역설적인 비감이 들어 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시인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내면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때문에 미국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로 '언어의 생명과 마음의 빛과 안정의 땅을 다 잃어버린'([차고 뜨겁고 어두운 것]) 것에 대한 괴로움, 즉 '외로움'으로 압축될 고통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에 젖어 헤매지 않고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이 세상의 긴 江])하는 투철한 자각이다.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천형처럼 받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외로움이 길의 여정 속에서 잊혀져 가기를 염원한다. 물론 그것은 희망이며 동시에 염원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 것, 그는 그가 본래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끝이며 동시에 시작인 지점에서 서성인다.



  짧은 하루가 문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 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 [겨울 노래]에서



  이 작품은 이렇게 해석된다. 저녁이 다가오고 어둠이 깔리는 눈 내린 겨울 어느 날, 시인은 어둠을 바라보며 서 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세상으로 통하는 빛이 거두어지고, 동시에 시인의 육체를 떠난 영혼이 새롭게 비상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 실존에서 상상의 존재로의 전환이다. 이 상상을 통하여 그는 꿈의 '끝'에 있는 '빈 벌판'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사랑'과 '가난'이 희망이며 동시에 시련인 대상으로 그를 단련시킨다. 그래서 결국 그가 찾게된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빈 벌판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은 인용 부분보다 앞에 나오는 구절로 이렇게 되어 있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가 평화가 있었으니까.



  그 끝, 시인의 노래가 마지막 닿은 곳에 그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평화? 과연 그럴까? 내가 읽기에 그 평화는, 비극적 인식의 역설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기쁨은 아니다. '끝이 나겠지'에 얹혀진 묘한 분위기가 평화를 '뜨겁고 차갑고 어두운' 희망이게 한다.  시인은 여전히 길을 걸어간다. 미국에 살고 이 땅의 문화와 다르니, 그로서는 세상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게 용이한지 모르겠다. 그의 육신이 어디에 있든, 그가 떼어놓는 발걸음은 크게 두 가지의 길을 걷는다. 그리스의 폐허화된 유적 사이에 있든, 어렸을 적 고향집 툇마루에 다시 앉든,  하나는 그 길을 통해 시인이 세상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둘러싼 사물들이 모두 그와 더불어 따스해진다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상보적인 것으로 시인은 사물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새로이 넓히고/깊게하고, 사물들은 시인의 시선과 부딪히면서 비로소 체온을 갖고 살아난다. 여느 젊은 시인보다 더 마종기 시인의 시가 신선해 보이고, 여느 중견 시인보다 더 그의 시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시를 시답게 하는 가장 모범적인, 그러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그는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여행의 젖은 옷을 말리며
  추워진 공간의 벽을 말리며
  먼 곳도 쉽게 보는 하느님의 눈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간에도 세월이 화살같이 지나고
  그 화살 몸을 찔러 피나게 해도
  희망이여, 평생의 아픔이여
  영혼을 풍요하게 한다는 아픔이여.

  나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대가 내 안에서 쉬는 동안에
  은밀한 상처를 조심해 만져도
  당신의 투명한 하느님은 아시지,
  돌아갈 길이 더 멀고 험한 것.
  비에 젖어 살아온 몸이 떨린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슬픔이 떨린다.
                -[당신의 하느님]에서



  사실 그의 깨달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보다 시집의 표제시인 [이슬의 눈]이나 [길], [혼자], [과수원에서] 등의 작품이 훨씬 용이하고, 따뜻한 물활론을 이해하려면 [아침 면도를 하며], [동생을 위한 弔詩] 시리즈의 작품들이 더 편안할지 모른다. 위 작품은 그런 작품에 비하여 조금 탄력이 뒤지기는 하지만 그가 걸어가는 길의 풍경을 비교적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랜 삶, 겪어온 일들이 모두 상처로 지나가고, 한 정점에 시인은 서 있다. 이제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하는가. '세월의 화살'에 '몸을 찔려' 희망이며 동시에 아픔인 그 세월을 걸어온 것이다. 시집 전체의 분위기로 보면 그는 하느님을 믿는 것 같다. 그 하느님이 말한다. '돌아갈 길이 더 멀고 험한 것,' 이제 여기서 멈추라고.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서 있단 말인가.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가만 들여다보면, 이러한 진술은 피곤한 삶을 피하여 현재에 안주하라는 일차원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이미 여행으로 '젖은 옷/추워진 공간의 벽'을 말린다. 삶의 지평을 넘어선 곳, 그곳은 희망도 아니고 아픔도 아닌, 그저 '자유로운 슬픔' 뿐인 곳으로 그는 접어든다.
  그는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 삶이 희망으로 이어지듯, 그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야 한다. 외로움에 휩싸여 '어디쯤 떠다니고 있을 그 푸근한 섬의 눈물을'([섬]) 찾아가야 하고, '무진한 갈대밭이 된 에페소의 성 밖으로, 가는 비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내가 좋아하는 쓸쓸한 하느님'([혼자])을 따라가야 한다. 그곳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불멸의 신화같은 곳일지도 모를 일이다.
  외롭지만 깊고, 어둡지만 따뜻한 세계,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마종기 시인의 울림이 지금 내 마음을 두드린다.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0
전체:
93,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