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이야기이다

  이것이 소설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이자 답이다. 소설에 대하여 더 이상 첨언하는 것은 사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이론은 거창하고 방대하다. 소설을 잘 쓰고자 그 문헌을 찾아 읽자면 평생 창작하는 날 없이 읽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떤 이야기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이 소설론이다. 소설론은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이론화시켰다. 그래서 훌륭한 이론서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이론서를 읽고 훌륭한 소설을 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소설론을 공부하여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면 소설은 이미 끝장이 났을 거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설 쓰기는 이러한 이야기 자체가 필요 없다는 데서 시작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가르침도 마침내는 뿌리치고 가야하는 소설 창작의 길.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아니, 짓밟고 가지 않으면 소설을 만날 수 없다는 말은, 살불살조(殺佛殺祖)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오직 새로운 것, 처음인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모든 기존의 것들을 치고 나아가야 한다. 궁극적으로 소설 창작의 길은 도(道)의 길이나 진배없다는 뜻이다. 이렇듯 도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창작의 길은 피를 말린다 했다. 작가의 피를 말리지 않고는 생성되지 않는 소설, 그 까닭을 조망하기 위하여 논픽션을 가지고 픽션을 만들어볼 수 있겠다.
  이에서 소설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논픽션)가 아니라 허구(픽션)의 이야기라야 한다는 말을 참구해야 한다.


    인사동 백수(논픽션)

    친구 동생 한군은 내게 대학 후배가 된다. 문예창작학과 재학시절 그는 천재로 통했다. 그런    그가 작가가 되지 않고 인사동 백수로 이름을 날렸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 입고 자는 일을    해결하는 그는 백수라는 자기 직업이 신과 내통한다고 진지한 삶의 철학을 전했다. 무엇이 백    수의 도를 신적이라 할 수 있는가. 돈을 벌 수 있는데 돈을 벌지 않는 것, 먹고 입는 것을 걱정    하지 않는 것, 눕기만 하면 잠을 자는 것이 신적이라고 했다.
    어느날 그가 후두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고 나는 문병을 갔다. 이미 암종이    그의 목구멍을 막고 있어 아무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런 육신으로 그는 의연했다. 아하, 백      수가 달리 백수가 아니구나. 실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는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냄새    를 맡으면서도 백수의 진정한 도를 지켰다. 필담으로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친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나를 병원 옥상으로 데려가다오. 그곳에서 헤이즐러 커피 한 잔, 마일드 세분 한 대 흠향해    야겠다.”
    무슨 제전을 집전하듯 인사동 백수는 그 일을 비장하고 진지하게 행하였다. 그는 헤이즐러     커피를 마실 수 없어 향만 맡으며 마일드 세분 한 대를 다 피웠다. 그 동안 그는 군주가 시종    에게 하듯 필담을 했다.
    “몸은 참 정직하다. 무너지고 스러지면서도 옛 맛을 그대로 읽으니 말이다.”
    그렇게 인사동 백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죽음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죽음을    아주 일상이다 싶게 맞았다.

  이것은 그냥 사실 그대로의 한 이야기(논픽션)이다. 다음은 작가의 창작 의지가 개입한 허구(픽션)이다. 어떻게 다른지 철저히 분석 검토함으로써 그 차별지, 그것이 작가의 창작 지혜가 됨을 알 수 있다.


    인사동 백수(픽션)

    녀석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병실에 앉아서 나를 맞았다. 선배에 대한 예는 여전히 깍듯했    다. 그것을 나는 그의 표정에서 읽었다.
    ‘미라가 따로 없구나.’
    내 눈이 조금 겁내고 놀라며 녀석의 형상을 보았다.
    ‘너희가 죽음을 아느냐. 이것이 죽음이다, 이것이 생을 잡아먹는 죽음이다.’
    녀석은 그렇게 몸으로 말하고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역시 너는 물건이다. 그 물건이란 의미    는 아주 특별하다. 그의 몸은 50대 50의 비률로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하다는 소위 중성    이다. 그래서 마음 또한 여자의 마음과 남자의 마음을 반반으로 공유한 이상한 물건이라는 것    이다. 나는 필담으로 안부를 물었다.
    “누가 수발을 드냐?”
    “보살 같은 후배 여자가 있어요.”  
    보살 같은 여자라니, 내 눈이 둥글해졌다.
    “예수님의 막달라 마리아 같은.”
    귀신 몰골로 녀석은 내 영혼을 꿰뚫어 보았다. 후두암이 녀석을 미라로 만들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눈은 맑았다. 어떻게 신음 속에 앉아 있으면서도 너는 그토록 눈이 맑을 수 있니. 선한    그 눈이 무서운 까닭이 뭘까. 너는 내 속에 들어 있는 악마를 보고 있구나. 그런 네게 내가 물    었다.
    “네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뭐냐?”  
    “어제 담당 의사가 최후 통첩을 내렸습니다. 시한부 생인데 알부민에 마약을 희석할 수 있는    돈이 생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기막힌 돈이 목숨이란 말을 아시나요? 선배님, 문학이 목숨    이란 착각에서 깨어나십시오. 문학은 절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문학이 절대 돈    이 아닌 상태에서만 돈이 됩니다. 이것은 온전히 문학을 몸으로 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문학을 글로 남기지 않았지 너는.”
    “그렇습니다. 오로지 문학을 몸으로만 살았을 뿐입니다.”
    그랬다. 인사동 백수로서 녀석은 숨쉬는 행위 자체로 문학을 대변했다. 여자를 취하되 소유하    지 않고, 음식을 먹되 모두 배설해버렸다. 피골이 상접한 녀석의 몸은 그래서 욕망하고도 욕망    을 빗겨갈 수 있었다.

  소설을 잘 쓰자면 먼저 인용한 그냥 이야기(논 픽션)를 허구(픽션), 뒤 인용한 이야기로 각색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숙련이다. 문학의 신은 숙련을 통해서만 창작 속에 임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

  “이 작가의 소설 좋아?”
  여러분은 답합니다.
  “아주 참 좋아요. 픽션이 대단해요.”
  허구의 이야기가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이 소설 재미 있어?”
  “아니, 재미 없어. 어디서 읽은 이야기 같아.”
  창작의 허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소설은 이야기인데 정말 독창적이어야 합니다. 신께서 감복할 수 있는 그 이야기야말로 진짜 소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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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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