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 김영교

2011.12.15 07:06

김영교 조회 수:573 추천:97

- 선배 시인의 병상에 올립니다

그날은 고원문학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플로리다에서 온 수상자 마종기시인을 만나러 그 장소로 향하는 내 발길은 날개를 달기나 한듯  경쾌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여러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 반가움을 나누며 문안을 주고받았다. 소설가 이용우선생의 배려로 시집 한권이 정갈한 사인을 담고 내 품에 안겨진 것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김영교 선생께 2012년 늦가을 박만영드림'
내 발등의 불을 끄느라 그동안 골몰했었다. 선생님의 체온이 느껴지는 육필을 대하며 찌잉- 감전되듯 아파왔다.
찾아뵙지 못한 그동안 시집을 펴내시고  치료 입원중이시라니 이 후배의 결례를 용서해주시지요, 하고 빌었다.

지금 병원에 계신 박만영 시인은 92세시다. 다섯 번째 시집 <여기에 살고 있다> 를 펴내셨다. 우선 감축 드린다. 배경이 병상이지만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조언과 지혜를 담은 시집이다. 모국어 사랑과 자연사랑, 환경오염등 유언처럼 잔잔하게 풀고 있다. 열정이 대단한 골동품 수집가이자 독서광으로 늘 단정한 차림의 경상도 신사, 터들 스웨터를 즐겨 입으시는 멋쟁이 시인, 장수를 누리시면서 주위의 존경을 받는 점은 자기를 표현하고 들어 낼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꾸준히 개발해 온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 나이에 어떻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왔고 (지금에사 병원가료 중) 그 와중에 어찌 시간을 내어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그분의 치열한 자기관리와 단촐, 정결했을 내면세계가 보이는 듯 존경스럽게 여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많은 상념을 불러왔다. 언젠가 따끈한 황남빵 한 박스를 선물로 안겨주시던 기억이 달갑게 고개를 내민다. 뚫리는 듯 시원한 소통의 현장을 떠나면서 축하박수를 올려드리며 쾌차를 빌었다.

불경기로 직원 수를 줄인 남편 사무실에 도우미로 나가는 일과에다 머릿속은 온통 병원의 시어머니 일로 가득하다. 하루를 비워 글을 쓴다거나 몰두 할 때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녹록찮은 현실이 나를 덮쳐 이대로 양보하고 말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든다. 출판기념회나 문학세미나 월례회, 장례식등 피칠 못할 행사장에도 불참이 잦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자는 일에 치여 부단히 지치고 조금도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부엌일이며 세탁물, 병원 방문등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함께 흐를 것이냐, 아니면 거슬러 거부와 저항의 몸짓을 할 것이냐의 존재적 갈등 상황을 놓고 고민도 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 말고 일반 생업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자투리 시간에다 자신의 세계를 세워 몰입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힘들고 고귀하고 숭고하기조차 여겨진다. 일상에 찌든 생활인이라는 상투적 외피를 걸치고 헉헉 숨을 몰아쉬는 벅찬 일과와 싱갱이를 하는 내 스스로가 ‘참 자기’라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일 때가 많다.

나를 경이로 몰고 가는 손아래 친구가 있다. 열무김치 한 병을 건네주고 훌쩍 가 버린다. 매 주말마다 거리선교 섬김에 동참하는 간호사였던 자매님은 지금은 피부관리사, 미용사로 일하면서 뒤늦게 시인의 꿈을 이루었다. 본국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주부시인, 집 안팍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손수 담군 김치를 나누어 주는 기쁨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밤늦게 시를 쓴다. 박만영 선배시인처럼 꿈꾸는 시인이다. 김치담구기와 시 짓기가 씨줄날줄로 아름다운 하루하루 천을 직조하고 있다. 남몰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습작에 몰두하는지 또 감자탕 같은 집밥 쿡킹을 즐기는지 그 열정이, 그 시간관리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 늦가을 이 두 시인을 지켜보며 바쁘고 게으른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잠 안 자고 글을 쓰는 일이, 병력이 있어 젊지도 않은 나이에 공연히 몸만 축나지 하는 생각이 압도적일 때가 많다. 시간이 술술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요즘, 이대로 상황에 끌려다 닐 수만은 없다는 처연한 다짐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내가 내 하는 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각성이야 말로 나를 사랑하고 남은 시간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다그쳐 준다. 피 눈물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은 분명 치열하게 삶을 껴안고 뒹구는 사람이지 싶다.

한 해의 끝자락이다. 손아래 친구나 병상의 선배 시인이 준 교훈은 보다 깊은 성숙과 불경기에 있는 정서 결핍을 섬세한 진동으로 치열하게 울림 북을 쳐 윈윈 세상에 다가가라고, 감동적인 글을 쓰는 그런 따스한 가슴이 되라고, 타이르고 있는것이다.

한국일보 12월 5일 2011 <삶과 생각>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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