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ck

                     연륜(年輪)에 對하여

 

노년이 되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한편으로 통찰력도 줄기 마련이지만

‘한 인간이 죽음을 맞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 이가 있다.

이는 노년이 되기까지 살아온 그들의 경험과 경륜, 지혜와 덕망이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리라.

 

  시간을 아십니까~~어제가 있었던 걸 기억하시죠? 그러나 그 어제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내일이 있으리라 짐작하시죠? 그러나 그 내일이 꼭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 내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

그래서 매우 소중한 ‘오늘’ 하루입니다.

김동길 —영원을 생각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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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길(金東吉)교수는 전문 문필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짤막한 글을

칼럼 형식으로 써서 올린다. 최근 몇년 동안 올라오는 그분의 글을 보면 왠지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져 그분에 대한 나의 시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최근 글에는 그분의 연륜이 묻어 있다.

이는 곧 그분의 삶이 그대로 비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샤워를 마치고 욕실의 거울 앞에 놓인 스툴에 앉아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오래 만에 한참 들여다보니 하도 어이가 없어 할말을 잊었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 꼴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 처량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

그 순간 심기일변, 거울에 비친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2018년에는 90이 될 김노인은 혼자서 껄껄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나를 되살립니다.

스스로 자기를 타이르며 ‘기 죽지 말고 살자’고 다짐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이 되어>

 

  왜 사느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질문을 받는 사람도 모르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도 모릅니다. ~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삽니다.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사랑 때문에’ 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그것이 정답이고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왜 사냐고 묻거든>

 

  이처럼 최근 그분의 글에는 그의 삶과 연륜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꿈 같은 인생인 걸> <남기고 갈 것은 없다> <나의 소원 한가지> <이일 저일을 생각하니>

등등 그가 지나온 세월과 더불어 점점이 얼룩진 삶의 흔적들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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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길 교수보다 8년 연상인 김형석(金亨錫)교수 역시 지난해 펴낸 그의 에세이집

『백년을 살아보니』에서 연륜에 연유한 소박한 글을 담담히 쓰고 있다.

<오래 살면 좋을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늙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오래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등등 이분은 전문 문필가답게 이제껏 써온 그분의

다른 글들처럼 고즈넉하게 사색을 담아 쓰셨는데 그 가운데 연륜의 무게가 순히 얹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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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들과 더불어 함께 생각되는 분이 조 순(趙淳)교수다.

김동길 교수와 같은 연배(1928년생)인데, 세분 모두 다 쟁쟁한 분들 아닌가.

영문학에서, 철학에서, 경제학에서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태두인 분들이다.

조 순 교수는 그의 노계(老計―(중국 송나라 주신중이 말한 5計 중에서 4계에 해당하는

노년의 계획)를 웃으며 아무 대답없이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 밝혔는데

봉천동 자택을 30년째 지키어 살고 있음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노계의 일단이라 연관지어 소회하고 있다.

 

  세분을 함께 떠올려 생각함은 이분들이 모두 엇비슷한 고령에 들어선 까닭에

연륜에서 느끼는 감회와 감상은 공통하지 않을까 해서다.

또 김동길 교수의 솔직 담백한 최근의 글들이 던지는 메시지가 바로

이분들의 사고와 사려를 살피게 한 것이다.

 

  나이 들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부닥치는 삶의 문제들―

어떻게 남은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마무리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노년기를 품위 있게 보낼 것인가 등은 인간으로 태어나

<늙음>을 피할 수 없는 대다수 나이 든 사람들의 크나 큰 과제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해 있어(2000년에 이미 7.2%/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일 때 고령화사회 /

14%이상이면 고령사회/ 20%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

너나없이 노인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간에 사람은 나고 살고 죽는다. 때문에 필연의 이 세가지 테마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우리를 단련하고 담금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곧 삶이요, 인생 아닌가. 그리하여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연륜에 따르는 갈등과 고민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세분들의 노년에서 그분들의 감성과 사려를 살피다 보니 더없이 적막하고 호젓함,

애써 감추고 있는 쓸쓸함, 외로움 등의 느낌을 외면할 수 없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그처럼도 걸출한 일가를 이룬 분들이 그럴 진대는

다른 일반인의 노년기 삶이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더구나 이런 것들은 고령화 사회, 노년에 대해 밀어내는 우리의 사회인식으로 해서

한결 가속화 되고 무게를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을 처음 공으로 타게 됐을 때(만65세) 왠지 누가 볼까 부끄럽고 주뼛대던 심사가

이제는 뭔지 모르게 미안쩍어 불편해진 마음으로 바뀌어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65세 이상 노인 어쩌구 하면 무슨 죄라도 진 기분으로

심리적 압박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어쩐 일일까.

 

  노년이 되면 물론 기억력도 떨어지고 한편으로 통찰력도 줄기 마련이지만

한 인간이 죽음을 맞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 이가 있다.

이는 노년이 되기까지 살아온 그들의 경험과 경륜, 지혜와 덕망이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공자가 죽었을 때 살아있는 논어를 잃었다고 했던 것도 쉽게 이해된다.

 

  “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귀감이 되는 분들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나 자신의 일인 양 안타깝다.

그리고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노년층을 짐스럽게 의식, 무의식으로 밀어낸다는 사실이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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