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꿈꾸는 빈 통/시집
2006.01.31 11:23
<너 그리고 나, 우리> 시집
나에게는 소중한 통 두개가 있었다.
밥통과 젖통이다.
거스름 계산에 굼뜬 나는 <밥통>이라고 늘 놀림을 받았다
그 후 살아남기 위해 나는 암(癌)씨에게 밥통을 내주었다
가슴이 풍만하지 않아도 젖이 잘 돌아
시어머니 앞에서도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곤 했는데
“아들 둘 건강한 게 다 에미 덕이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지금 나의 밥통은 없어지고 젖통은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다
둘 다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귀하다, 무척 귀하다
어느 날 퇴근길의 이웃 친구에게
밑반찬 좀 싸느라
부엌 한 구석에 놓여있는 김치통과 반찬 통들을 둘러보았다
세상에는 통들도 참 많다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만 받아 담는 쓰레기통이며
그리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채곡채곡 받아 담는 우체통까지
언젠가는 사랑이 채워져서
누군가의 바램,
그 크기만큼 요긴함에 쓰일
기다림의 빈 통들
밤마다 나는 꿈을 꾼다.
밑창에 질펀한 탐욕의 찌꺼기
말짱하게 비워내는
빈 통의 꿈을.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90 | 그리움은 새 | 김영교 | 2006.03.06 | 432 |
189 | 날개짓처럼 투명한 것에 대하여 | 김영교 | 2006.03.06 | 393 |
188 | 어머니 강 | 김영교 | 2006.02.03 | 430 |
» | 밤마다 꿈꾸는 빈 통/시집 | 김영교 | 2006.01.31 | 688 |
186 | 어느 아름다운 재혼 | 김영교 | 2006.01.30 | 612 |
185 | 전화 응답기 | 김영교 | 2006.01.25 | 387 |
184 | 부토(腐土) | 김영교 | 2006.01.19 | 415 |
183 | 길 I | 김영교 | 2006.01.18 | 449 |
182 | 신호등 | 김영교 | 2006.01.16 | 694 |
181 | 귀천 | 김영교 | 2006.01.06 | 353 |
180 | 형체도 없는 것이 - 4 | 김영교 | 2006.01.04 | 525 |
179 | 형체도 없는 것이 - 3 | 김영교 | 2006.01.04 | 337 |
178 | 형체도 없는 것이 - 2 | 김영교 | 2006.01.04 | 333 |
177 | 형체도 없는 것이 - 1 | 김영교 | 2006.01.03 | 353 |
176 | 게으름과 산행 | 김영교 | 2006.01.03 | 503 |
175 | 발의 수난 | 김영교 | 2006.01.03 | 631 |
174 | 초록이 머무는 곳에 | 김영교 | 2006.01.02 | 437 |
173 | 눈이 되어 누운 물이 되어 | 김영교 | 2006.01.02 | 299 |
172 | 연하장 설경 by 김영교 | 김영교 | 2006.01.02 | 363 |
171 | 소야등 | 김영교 | 2005.12.26 | 2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