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서 - 김혜령

2006.08.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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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은 벌써 방바닥을 가로질러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옆자리가 비어 있다. 구겨진 이부자리에 부연 새벽빛만 흥건하다. 나는 더듬던 손을 거두어 숙취로 부어오른 얼굴을 쓸어 내린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연의 생일이었고, 포도주 한 병을 함께 비워냈고...... 연과 경주하듯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은 방바닥에 흩어진 옷가지가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흐느끼듯, 흐느끼듯 동작이 고조되던 어느 한 순간에 연이 폭발하듯 울음을 터뜨렸고, 전화벨이 울렸다. 아니, 전화벨이 먼저였는지 연의 울음이 먼저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연은 말없이 울기만 했고, 전화 역시 말없이 끊어졌다. 돌을 삼킨 깊은 우물처럼.
나는 잠시 어젯밤 연의 울음과 전화벨이 갈라놓은 의식의 균열 속을 들여다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빛 속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내민다. 느릿느릿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검은 털로 덮인 어깨 죽지에서 눈부신 빛이 솟는다. 흐린 눈빛과는 달리 윤기 흐르는 곰의 몸은 오랜 세월 축적된 에너지로 순간순간 날개를 펼치듯 발광할 수밖에 없는 듯 싶다.
스위스 베른시. 도시 입구에 우물처럼 깊이 파놓은, 콘크리트를 바른 커다란 수렁 속에 도시의 마스코트 곰이 살고 있었다. 나는 손에 말아 쥔 관광지도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 서너 번은 족히 그 자리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연을 만났다. 연도 길을 잃고 지친 것이 분명했다. 도시는 길목마다 비슷비슷한 시계와 울긋불긋한 조각분수로 가득했으니 워낙 길눈이 어두워 제 집 앞에서도 수시로 길을 잃는 나나 연이 길을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각기 그 자리에 돌아올 때마다 갇힌 곰보다 더 낙담한 심정으로 그늘진 수렁을 내려다보았다. 윙윙 자동차가 달리고 기차가 오가는 도시의 진동이 지친 발바닥을 간질였다. 곰은 가끔 고개를 들었지만, 그 시선이 제가 갇힌 콘크리트 벽의 어느 만큼이나 기어오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시는 라일락과 수국과 아카시아와 등꽃으로 찬란한데. 그들의 합창으로 고막이 터질 것 같은데.  
기지개를 켜느라 머리 위로 한껏 뻗은 손에 뭔가 풀썩 쓰러진다. 맥이다. 입이 손청소기처럼 삐죽한 태이퍼(tapir). 언젠가 연이 동물원 앞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목각인형을 만드는 히스패닉 노인으로부터 산 것이다. 그 태이퍼의 한국말 이름이 맥이라는 사실에 나는 마치 베른의 곰을 건널목에서 본 것 마냥 잠시 아연했었다. 인간의 악몽을 먹는다는 중국전설 속의 동물이 미국 동물원에서 뻐젓이 태이퍼라는 이름을 달고 어슬렁거리고 있다니.
어젯밤 의식의 균열 속에 빠졌던 그 다음 순간에도 나는 지금처럼 머리맡의 맥을 일으켜 세웠던 것 같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연에게 엉겁결에 말했다. 내일은, 내일은......
저, 저어, 무얼 찾고 계신지는 모르지만, 아까 이쪽 길에서 카페를 본 것 같은데...... 균열 속, 수렁 앞의 내가 다시 웅얼거렸다.
내일은, 내일은 우리 동물원에 가자. 울고 있던 연이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이 피식 웃었다. 우울히 곰을 바라보던 연도 그렇게 피식 웃었다. 영어를 알아듣는, 게다가 한국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도 대화의 한 구석에 수줍게 한두 마디 꺼내 곁들일 줄 아는 여자. 그 여자가 웃을 때마다 나는 기쁨 속에서 마음을 졸였다. 웃음처럼, 풍선처럼, 연처럼, 그렇게 한순간 피식,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황급히 벽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열려진 벽장 안에는 이미 전등이 켜져 있지만 구석에 함부로 쌓아놓은 옷 무더기의 높이로 보아 연의 트렁크는 아직 그 자리에 있는 듯 하다. 나는 한숨을 쉰다. 순간적 위기의식으로 흐려진 나쁜 숨결을 내보내기 위해 길고 천천히. 누워 있는 몸의 한 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흐흐, 이러다 내가 날아가 버린다면...... 또다시 부질없는 상상에 매달리는 버릇에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쯧쯧 혀를 차 본다.
연이 내게 올 때 가져온 그 트렁크를 아직도 옷과 화장품 따위로 채워두고, 이따금 열어보고 내용물을 바꾸어 넣기도 한다는 걸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처음 몇 달은 그저 연이 아직 트렁크를 풀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고, 다음엔 불안하고 서운해서 곁눈질로 흘겨보며 지내다가, 차츰 그 트렁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할 줄 알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연이 없을 때면 가끔 연의 트렁크를 열어보기도 한다. 사진첩이나 오래된 편지를 열어보듯. 트렁크 속엔 내가 선물한 스웨터나 나이트가운, 스카프, 향수병들이 치약, 칫솔, 속옷과 생리대, 아직 만기가 되지 않은 미국 여권 사이에 얌전히 담겨 있다. 더러는 누구에게 받았는지 포장을 풀지 않은 선물도 들어 있다. 가끔 나는 그 트렁크에 내 물건들을 대신 담아 넣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나는 연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한다. 내 앞에 열리지 않는 이 세상의 많은 문들에 비해 자물쇠도 열쇠도 없는 연의 트렁크는 친절한 편에 속하는 것이다.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댔지? 내가 나무꾼과 선녀 얘기를 꺼냈을 때, 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하필 셋일까? 안고 갈 팔이 둘 밖에 없어서 그럴까. 그럼, 선녀가 문어는 아니었을 테니까. 흐흐, 셋이란 숫자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 연은 내 목에 가는 두 팔을 감으며 말했다. 난 아이를 셋이나 낳을 생각은 없을뿐더러 아마 그건 옛날 사람들이 그저 즐겨 썼던 숫자 중의 하나일 뿐일 거야. 셋, 여덟, 열 둘, 백, 천. 뭐 그런, 완전을 의미하는 듯한 거 말야. 그런데 그거 알아? 연은 금세 웃음을 지워버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뭘? 저기 달이 왜 탈바가지 얼굴을 하고도 탈이 아닌가 하는 거? 나는 한국말을 배우는 연이 언젠가 탈, 탈, 무슨 탈, 하던 걸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아니, 우리가 올해 서른 셋, 부활할 나이라는 거. 금방 숫자에 집착하지 말랬잖아. 우리는 낄낄거리고 웃었지만 서로의 불안을 알고 있었다. 부활해서 어쩌자는 건지는 몰라도, 부활해도 시원치 않을 나이에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는, 아니 헤매다 못해 가끔은 길도 보이지 않는 견고한 콘크리트 수렁에 빠져 있는 듯한 자신에 대한 경멸과 초조감을 감추느라 우리는 그날 밤 학대에 가깝도록 서로를 탐했다. 다음 날 우리는 히히덕거리며 법원으로 달려가서 자폭하는 기분으로 결혼서약을 했고 반년 후엔 림을 낳았다. 림(╫∙). 나와 연, 우리 안에서 자라는 싱싱한 숲. 우리의 외로움을, 우리를 숨겨주는 숲.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끝내 헤어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아름다운 숲 속이라면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젯밤 그 전화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연의 울음은? 나는 기억의 우물 속으로 내려가 더듬더듬 화, 수, 정...... 그런 여자들 이름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연이 듣고 무슨 십이 간지 같네, 하며 웃었던, 내가 멋대로 지어 붙인 이름들. 연은 모르겠지만, 그녀들을 만난지도 오래되어 그 이름들에서는 이제 이끼냄새가 난다. 습하고 적요하다. 현실과 유리된 기억이란 그런 것일까. 가슴에 한 줄기 물을 끼얹듯 서늘한 그늘 속으로 들어선 느낌. 문득 현실의 빛과 색깔이 사라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나라는 사람을 채우고 있는 건 모두 그런 것들뿐이라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나는 기억의 어둠 속에 혼자 주저앉아 찬찬히 여자들의 이름을 더듬어보지만 그녀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현실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은 없다. 더구나 그런 환영들이 손가락을 움직여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날카롭게 의식을 가르던 전화벨 소리. 연의 핸드폰이 먼저 울렸던 것도 같고. 그게 꿈이었나, 현실이었나,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린다. 발가숭이 림이다. 그르르르르. 하얀 비누거품을 뒤집어 쓴 림이 가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침대 위에 올라와 으르렁거린다. 나는 곰이다, 북극곰이다. 이불 위로 하얀 비누거품이 미끄러져 내리고 뭍에 오른 인어공주 마냥 매끈한 분홍빛 팔다리가 드러난다. 림, 림. 아휴, 이 꼬마 말괄량이. 감기 걸리겠다. 헐레벌떡 뒤따라 온 연이 림의 작은 몸에 텐트 같은 타월을 덮어씌우며 침대 위에 함께 뒹군다. 림을 끌어안은 연의 얼굴에 울음의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이다.

플라밍고와 기린과 하마를 보고 손바닥만한 그늘에 몰려 서서 피자를 먹었다. 걷기에 지친 림을 업거나 목마를 태워가며, 나는 연과 함께 곰과 코뿔소와 코끼리를 보고, 호랑이를 본다. 맥은...... 맥의 형태는 곰, 코는 코끼리, 눈은 코뿔소, 꼬리는 소, 발은 범과 비슷하다고 한다.
수풀 속에서 한 차례 물뿌리개가 고개를 흔들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기어오른다. 아지랑이 속으로 가물가물 한 아이가 걸어간다. 누굴까? 구겨진 그림 같다. 오래된, 아주 오래된...... 기억의 우물 바닥에, 아니 그 우물을 파고 또 파서 뚫고 나온 지구 반대편에나 있을 것 같은...... 햇빛에 지친 맥이 토해낸 것 같은......
잠이 든 림을 안고 벤치에 앉아 쉬노라니 공작새가 한 마리 긴 꼬리를 끌고 다가온다.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자존심의 상징으로 알려진 그 새들은 내 가방에서 삐죽이 나온 감자 칩을 못 본 척 딴청을 하며 주위를 맴돈다. 저 새들이 꼬리를 펴면......
공작이 꼬리를 펴면 뭐가 보이는지 알아? 언젠가 연이 내게 물었다. 글쎄, 부채? 연은 내 싱거운 대답에도 얼굴의 긴장을 풀지 못했다. 뭐가 보이는데? 눈. 무수한 눈. 나를 보면서도 보지 않는 척, 있으면서도 없는 척, 숨어버리는 눈.
나는 연의 눈길을 찾았다. 연은 어느 새 옆 벤치로 옮겨가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 메시지를 듣고 있는 걸까. 얼굴을 덮은 그늘 때문에 연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눈이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 창경원이었을 거야. 나는 오래 전에 연에게 해주었던 말을 혼자 입 속으로 되뇐다. 연의 얘기 속에서 어린 연이 되어 창경원을 헤매었던 봄날의 기억은 지금 내 옆에 앉은 연의 숨결을 느끼는 일보다 더 내게 생생하다.
그게 하루였을까, 한 달이었을까. 연은 내게 말했다. 내가 흘러내리는 타이츠를 입고 그 길을 헤매었던 게.
다음에 내린다. 엄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린 연은 있는 힘을 다해 승강구를 향해 나아갔다. 성벽처럼 앞을 가로막는 무심한 몸통들 사이를 작은 나사못 마냥 파고들었다. 모처럼 이루어진 엄마와의 나들이에 연의 조그만 몸은 기쁨으로 터질 듯 팽팽해서 무엇이라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이 열리고 버스에서 고꾸라지듯 퉁겨져 나왔다. 숨이 탁 트이는 듯 했다. 넘어진 자리에서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손잡아 일으켜줄 엄마가 없었다. 오라이, 오라이. 버스 문이 닫히고, 버스 안에 빼곡이 담긴 얼굴들 사이에서 파마머리 하나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 저만치 떠나는 버스 유리창 안쪽에서 한 여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휘젓고 있었다. 휘젓던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연보다는 눈도 피부색도 머리카락도 짙었던 여자. 그 여자의 검은 눈동자는 먼지 낀 버스 유리창을 뚫고 연의 손가락질 받는 흰 피부도 뚫고 그녀의 깊은 어딘가에 날아와 박혔다.
연은 습관처럼 엄마를 부르며 두어 걸음 내달리다 말고 스르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가 코앞에 문을 닫고 그녀의 모든 것을 그 자리에 꽝꽝 박아 놓은 듯 싶었다.
끼익끽 비명을 지르며 버스들이 시커먼 바퀴로 굴러와 섰다가는 가고, 섰다가는 갔다. 버스가 떠날 때마다 숨막히게 더럽고 매캐한 연기가 연의 얼굴을 덮었다. 동네 아이들이 연의 얼굴에 흙을 뿌리고 달아나듯. 수많은 다리들이 연의 눈앞을 오갔다. 올려다보아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햇빛이 눈을 찔렀다. 이제는 결코 누구의 얼굴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느 새 얼굴이 사라진, 버스 속에서 팔을 휘젓던 여자의 판토마임이 연의 망막에 되돌아갔다. 너는 이제 거기 있어야 한다. 여기가 아닌 거기. 우리가 아닌 너. 혼자.

무릎 위의 림은 무슨 꿈을 꾸는지 오물오물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방울처럼 작게 몸을 웅크린다. 연은 아직도 전화기를 잡고 있고, 아이의 얼굴 위에 내린 나무 그림자가 느리게 손을 흔든다. 내가 아는 연, 내가 아는 림은 그 얼굴 속 저만치로 떠나버린 것만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연은 걷고 있다. 기와를 얹은 돌담이 있고 연분홍 꽃을 구름처럼 두른 나무들이 있다. 풍선을 들고 깡총거리는 아이들이 있고, 떼를 쓰며 우는 아이들도 있고, 등에 업혀 잠든 아이도 있다. 흘러내려 다리에 성가시게 휘감기는 하늘 색 타이츠를 입고 연은 걸어간다. 엄마가 새 타이츠를 꺼내 입히며 놀러가자 말했을 때, 연은 제 다리가 둥실 하늘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타이츠의 늘어진 주름마다 흙먼지를 꾀죄죄하게 담고 어딘지 모를 길을 걸어갈 뿐이다. 높이 솟은 돌담에 깔릴 듯, 주저앉을 듯, 꽃잎 날리는 나무 사이로 꺼질 듯, 걸어간다. 버스들 사이로, 다리들 사이로, 먼지 사이로, 사라지지 못하는 연이 걸어간다.

아직도 걸어간다. 내 옆 벤치에, 잠든 림을 끌어다 무릎을 내어주고 앉아서도 연은 걸어간다. 벽장 속, 옷 무더기에 묻힌 트렁크를 끌고, 아니 그것도 없이, 연은 걸어간다. 연과 림의 얼굴 위로 하나 둘 구름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그림자 사이로 아이가 걸어간다. 연 같기도 하고, 림 같기도 하고, 화, 정, 수, 경, 운, 또는...... 어느 구겨진 그림 속의 아이 같기도 한......

어느 새 깨어난 림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앙앙, 벌써 밤이잖아. 벤치 위 나무그늘을 지나는 구름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나 보다. 앙앙앙, 원숭이도 못보고, 얼룩말도 못보고, 그리고...... 앙앙앙......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연이 꿈에서 깨어난 듯 입을 연다. 림, 일어나서 하늘을 봐. 아직 파랗지? 밤이 아니지? 림의 통통한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머뭇 수줍게 퍼져가던 미소가 한순간 활짝 문을 연다.
연은 또 어느 꿈의 길목을 헤매다 돌아온 걸까. 나는 한 손으로는 림의 작은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구겨진 동물원 지도를 잡고 벤치에서 일어선다. 감자 칩 부스러기가 무릎에서 떨어져 내린다. 공작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어린 연을 철창너머 한없이 바라보던 무수한 눈은 아직도 내 몸 곳곳에 붙어 있다.
아빠, 얼룩말, 얼룩말. 옆에서 깡총대던 림이 종을 울리듯 내 팔을 잡아당긴다. 나는 무심코 공작새 팻말을 향해 걷다 말고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얼룩말을 보면 눈이 아른거린다. 온몸을 감은 줄무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의 길들처럼 눈 속에서 얽혀들고 흩어진다. 림이 찾는 원숭이 우리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가도, 가도 보이는 건 얽히고 흩어진 줄무늬의 얼룩말, 곰,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다시 지도를 살피고 걸어도 얼룩말, 곰, 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그리고 얼룩말뿐이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동물 우리마다 냄새가 지독하다. 갇힌 짐승들의 냄새에는 들리지 않는 울음이 섞여 있다. 그 오래 전 봄날 창경원에서도, 베른의 곰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가.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할 연과 림을 향해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연이 팔을 휘젓고 있다. 입을 벌려 무어라 말을 하지만 들리지 않고, 연의 눈동자만 나를 향해, 아니 나를 뚫고 어디론가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다. 림이, 림이...... 연의 온몸이 그렇게 헐떡였다. 화장실에 같이 갔었는데...... 먼저 나와서 기다린 댔는데...... 금방 따라 나왔는데......
연과 나는 갈라져 림을 찾는다. 화장실로, 휴게소로, 원숭이 우리 쪽으로...... 하마는 물 속에서 잠이 들었고, 코끼리들은 긴 코를 흔들며 뿌웅뿌웅 나팔을 분다.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심장은 걸음보다 앞서 저만치 뛰어간다. 림, 림, 호흡마다 그렇게 헐떡이며 뛰던 나는 어느 새 연, 연, 그렇게 부르며 뛰고 있다. 흩어지고 엉켜드는 길들. 어지러운 줄무늬 위에 노을을 짊어지고 얼룩말들은 무심히 꼬리를 흔든다. 더 이상 누구를 부를지 모르는 입은 훅, 훅, 삭은 냄새를 뿜어낸다.

창경원엔 벚꽃이 한창이고, 한복입고 시골서 올라온 아낙네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싯누런 금이빨이 보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서로를 부르고 웃으며 몰려다닌다.
나는 어린 은의 손을 잡고 깡총깡총 그 길을 간다...... 은을 찾아 울먹울먹 그 길을 뛰듯 걸어간다...... 수없이 걷고 또 걸으며 찾고 또 찾던, 무엇을 찾는지도 잊을 만큼 찾던  그 길을 대학생의 몸을 입은 내가 경과 함께 걸어간다.
경은 운을 닮은 여자였다. 그리고 운은...... 얼마나 걸었을까, 경의 하얀 얼굴 위로 벚꽃 그림자가 무더기 무더기 참 많이도 지나갔다. 그렇게 꽃 그림자가 지날 때마다 경의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열리고 그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열리고...... 그렇게 더, 더, 깊은 곳에 숨은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다. 좀 전 불란서 문화원에서도 나는 요령부득의 영화보다는 경의 얼굴 위를 스치는 빛의 무더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 빛 사이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아니 얼굴 속의 무엇을 찾고 있었다.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 하나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계란이요, 계란, 삶은 계란 사쇼, 하고 외친다. 때묻은 옥색 저고리 밑으로 퉁퉁 불은 젖이 늘어져 있고, 등에 업힌 아이는 아주머니보다 더 커다란 목청으로 울고 있다.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청년 하나가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욱, 욱, 소리를 내며 먹은 것을 토해낸다. 아까 노란 가발 쓴 여자를 끼고 히히덕거리며 가던, 얼굴이 검고 마른 청년이다. 토사물에서 썩은 술 냄새가 난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에게서 종종 맡아지던 냄새. 울컥, 연의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이 있다. 점심에 엄마가 사준 짜장면, 그 국수발이 올올이 머리를 세우고 지렁이처럼 목구멍을 기어오른다. 검은 승용차들의 빤질한 표면은 그 모든 것들을 미끄러트리며 시야를 빠져나간다.

호랑이, 코뿔소, 코끼리, 곰, 얼룩말의 우리 주변을 되짚어 샅샅이 살펴보지만 림은 보이지 않는다. 수풀 속에서 언뜻 보이는 것이 있어 가보면 붉은 꽃송이, 까르르 웃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면 푸드득 새들이 날아오른다. 림은 오늘 아주 오래 오래 숨바꼭질을 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은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에게 타이른다. 세상은 림의 얼굴이 아닌 꽃송이들, 림의 팔다리가 아닌 나뭇가지들, 림의 웃음이 아닌 소리들, 림이 아닌 계집애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수풀 속에서는 자꾸만 아이의 가뿐 숨소리가 들려온다. 수풀에서 수풀로 내 걸음을 따라, 내 걸음을 피해, 자리를 옮기며 누군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시선에 끌려 더 깊은, 더 깊은 수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언제나 그렇듯이 길모퉁이 나무 밑에는 꾀죄죄한 아이 하나가 멍하니 쪼그리고 앉아 있다. 돌아서면 나무가 되고, 전신주가 되고, 새가 되고, 바람이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 같은 아이에게서는 눈물과 땀으로 발효된 시큼한 냄새가 난다. 은을 잃은 뒤 어머니에게서도 종종 그런 냄새가 났다. 아이는 그 지독한 냄새에 눌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쩌면 영원히.
나는 뺨에 매달리는 아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경의 어깨를 감싸고 샛길로 들어선다. 샛길은 굵어지고 가늘어지고 휘어지기를 거듭하며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개천가로 이어진다. 소리 없이 떨어진 벚꽃잎이 군데군데 거품이 부글거리는 더러운 개천을 타고 흘러가고 있다. 바람이 불 때면 휘날리는 경의 머릿결을 타고 개천의 악취가 맡아지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숨을 멈추고 흩어지는 벚꽃잎만 바라본다.
나는 이 길을 수도 없이 걸어다녀. 꿈속에서까지도. 꿈속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도 이 길을 거쳐서 가지. 내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경은 그 길을 '스왕네 집 쪽 (*)'이라고 이름 붙였다. 길의 끝에는 새로 들어선 슈퍼마켓과 은과 내가 머리를 깎던 이발소 옆으로 늘 어둠에 짓눌린 나의 옛집이 있을 뿐이었지만, 우리는 해가 지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말 잃어버린 무엇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 듯이 충실히 그 길을 걸어갔다.
여러 번 엇갈리던 약속 끝에 겨우 경을 다시 만난 날, 나는 그 길에서 경에게 개천 너머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게르망뜨 쪽 (*)'으로 갈까. 나는 그날 경에게 골목의 그 여자, 아니 그 기억, 운에 대해, 그리고 은에 대해, 길모퉁이의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게르망뜨 쪽'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경이 내 눈길을 피한 채 되물었다. 유럽의 어느 작가가 장장 십 삼 년 동안 방음이 된 방에 틀어박혀서 썼다는 일곱 권의 책. 그는 정말 그렇게 자신을 감금하고 앉아서 제 안에 잃어버린 무엇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그는 과연 찾았을까. 일곱 권을 다 읽어보지 못했으니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면 그걸 경과 나의 첫 권, '스왕네집 쪽'에서 찾지 못한 건 분명해 보였다. 아니 오늘은 그냥, '스왕네 집 쪽'으로 가자. 경은 내게 양해를 구하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스왕네 집 쪽'으로 걸어다녔다.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우리의 만남이 이미 그 책의 뒤 표지에 몸을 부딪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갇혀 하얗게 질려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화, 수, 정...... 그 여자들과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은 미로를 함께 헤매고 다녔어도, 서로의 가슴에 온전한 시선을 주지 못했고, 서로의 아픔과 상실감을 어렴풋이 느낄 때쯤이면 황급히 외면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연마저도......  

후다닥. 어디선가 작고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림? 나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내달린다. '동백나무 숲'. 팻말은 삭아서 반쯤 부서져 있다. 꽃이 진 동백나무 숲은 진한 녹음으로 습하고 적요하다. 문득 기억의 우물 속으로 굴러 떨어진 듯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둠에 내 눈이 익숙해질 즈음, 나무 밑에서 입을 맞추고 있던 한 쌍의 남녀가 서로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멋쩍은 미소를 짓고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푸드득 새 한 마리가 이건 온전히 네 몫이라는 듯, 앉아 있던 그늘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발끝에 송이째 떨어진 동백꽃이 툭툭 채일 때마다 숲에는 한 치 두 치 어둠이 차 오른다.
나는 황급히 주머니를 뒤적인다. 어둠이 더 짙어지기 전에 연에게 빨리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다. 림을 찾았느냐고, 내가 여기 있다고. 하지만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전화기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다. 몸 속 어디선가는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리는데 온몸 어디를 더듬어봐도 전화기는 만져지지 않는다. 나무들만 간지럽다는 듯 버석거릴 뿐이다.
숲 속의 어둠이 내 발목을 덮고, 무릎을, 허리를 덮고 마침내 가슴에 차 오를 때쯤 저만치 그 집이 보인다. 그 집. 집은 현상액 속에 잠긴 사진처럼 천천히 몸을 흔들며 깨어나 나를 마주 본다. 그 집. 은과 내가 살던 집.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꺾고 털썩 주저앉는다.  

열두 살 때까지 내 별명은 벙어리였다. 대문만 나서면 누구나 나를 벙어리라고 불러서 나 자신도 아예 이름을 잊어버리고 그냥 나는 벙어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내겐 영환이라는 내 이름보다는 차라리 은환, 또는 은이라는, 사라진 내 쌍둥이 누이 이름이 훨씬 덜 서먹해졌다. 그건 밤이고 낮이고, 대문 밖이고 안이고, 늘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이름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은환의 이름이 항상 내 귀에 이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그 이름은 한 순간 내 머리와 가슴속을 마치 빈 독을 울리는 바람같이 맴도는가 하면, 다음 순간엔 내 살 속으로 뼈 속으로 자취도 없이 스며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마, 봄날 꽃잎이 허공을 맴돌다가 문득 사라져버리는 걸 본 일이 있다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꽃잎이 사라진 다음 나뭇가지가 보일 듯 말 듯 이유 없이 흔들리는 걸, 또 잠깐, 아주 짧은 한 순간, 세상이 선뜻 어두워지는 걸 느낀 일이 있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내 뼈와 손톱과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 하나 하나의 끝까지 은환의 이름으로 차 올라 떨리고 있었다는 걸.
집에서 나는 환이라고 불렸다. 물론 그건 은환이 사라진 다음부터의 일이고, 그 전까지 우리는 영이와 은이로 통했다.
은은 다섯 살에 내 곁을 떠났다. 우리는 그때까지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어른들이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각각 딴 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데려가도 소용이 없었다. 깨어보면 어느 엉뚱한 방 윗목이나 심지어는 벽장 속에 함께 잠들어 있기가 일쑤였다. 우리는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잠들었다. 우리는 사내아이 옷이건 계집애 옷이건 같은 옷을 사달라고 졸랐고, 어른들이 오래 입히려고 큰 옷을 사오면 옷 하나에 둘이 같이 들어가기도 했다. 누군가 억지로 벗길 때까지 온종일이 지나도 우리는 불편한 줄을 몰랐다. 그럴 수 없을 땐 한 시간이 멀다하고 서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어른들은 억지로 내 머리를 짧게 잘라 머리모양으로 우리를 구분하려고도 해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은이 제 머리도 똑같이 잘라 달라고 떼를 쓰다가 제 손으로 직접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날 은은 쥐가 뜯어먹은 듯한 머리를 하고 이발소 의자에 날름 올라앉아서 거울 속에 보이는 얼굴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â영이와 은이ä는 둘이 아닌 한 아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은환이 가고 난 뒤 환이란 이름 하나로 두 아이가 불리게 되었듯이.
내가 은을 보았던 마지막 날......

짙은 나무그늘 속에 뭔가 반짝이는 게 있다. 기막히게도 수화기가 내려진 공중전화가 아무도 없는 숲 속 한 구석에서 신음하듯 뚜우 뚜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급히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넣고 연의 번호를 누른다. 신호를 들으며 비틀린 전화선을 만져본다. 차갑다. 아무 것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다.
오늘은...... 오늘은 못 가.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짜고짜 연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연, 연아...... 의식을 가르던 어젯밤의 전화벨이 되살아나 나를 꿰뚫고, 내 갈비뼈를 부술 듯 세차게 파닥이며 솟아오른 연의 이름은 뻣뻣하게 굳어진 혀에 매달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림이, 림이 없어졌어. 내 잘못이야, 내 잘못...... 내가 아이를 두고 그런 마음만 먹지 않았어도...... 안돼. 안돼, 이렇게는...... 연의 울음소리를 삼킨 수화기는 어느 새 단정하게 제 자리에 올라앉아서 소리 없이 나를 내려다본다. 차라리 뚜우 뚜우 신음소리라도 들었으면 싶다.

내가 은을 보았던 마지막 날......
은은 내 옷을 입고 있었다. 노란색 코끼리가 수놓아진 물색 스웨터에 하늘색 바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아침부터 눅눅한 습기로 가득 찬 어둑한 방안에 나란히 누워서 우렁우렁 소리가 울리도록 실컷 노래를 부르다가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빗줄기가 하얗게 주렴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옥색 처마 모퉁이에 매달린 새 모양의 함석홈통이 한없이 빗물을 토해내는 걸 바라보았고, 은은 하수구로 누런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열었다 하고 있었다. 빗줄기를 따라 젖은 세상이 자꾸만 낮은 곳으로, 더, 더, 깊고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그 흘러가는 세상 한 귀퉁이를 들치고 여러 번 꾸었던 꿈처럼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안방 쪽에서 어머니의 숨죽인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비에 젖은 종이처럼 풀어진 웅얼거림이 되어 내 귀를 먹먹하게 틀어막았다.
무슨 소리가 들리니? 내 물음에 은은 응, 누가 부르는 것 같애, 하고 빗줄기 너머 먼 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은처럼 귀를 막았다 열었다 해보았지만 쏴아쏴아 물소리만 들렸다 끊어졌다 할뿐이어서 나는 곧 싫증을 내고 말았다. 그것이 툇마루에서 잠들기 전에, 아니 이 세상에서, 내가 본 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꿈에 은이 말했다. 난 간다. 웃고 있었다. 오래 오래 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는 꿈속의 은은 이빨이 햅쌀같이 작고 고운 아이였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은은 그 자리에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안방에 어머니도 없었다. 장롱 한 구석에는 빈자리가 어둠을 물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집안은 습한 침묵의 무게에 잔뜩 눌려 있었다.  
며칠 후에 돌아온 어머니는 흩어진 머리에 충혈된 눈으로 은을 찾고 있었다. 은이 없어졌다고, 굳이 내 옷으로 갈아입고 나간다기에 골목에서 노는 줄 알았더니 어느 새 없어졌다고, 어머니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뻘건 눈을 치뜨고 골목을 살피며 허방을 짚듯 더듬더듬 말했다. 매일 아침이면 어머니는 어디까지인지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가 밤이 되면 꺼칠한 껍질만 남은 모습으로 혼자 돌아오곤 했다. 떨어진 꽃잎들이 빗물을 타고 자꾸만 어디론가 흘러갔고, 마침내 어느 날인가 어머니마저도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남은 나는 온종일 툇마루에 앉아 은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더듬었다. 은은, 그리고 은과 함께였던 영은, 그날 어디로 간 걸까. 찬바람이 한줄기 내 귓불을 건드리며 활짝 열린 대문을 빠져나갔다. 대문밖에는 멈춰선 허공이 허옇게 시야를 지우며 굳어져 가고 있었다. 얼굴이 굳고 입술이 굳고 그 속의 혀와 목구멍이 굳어져 내 속에는 바람이 떠도는 빈 독만 남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열었다 하는 게 나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되었다. 귀에서 손을 뗄 때마다 은의 모습이 흘러갔다. 물에 잠길 듯 잠길 듯 그 모습이 저만치 흘러가면 나는 다시 귀를 닫고 또 열어, 그렇게 풀무질하듯 은을 실은 물결을 키워내려고 기를 썼다. 은은 그렇게 어디로 흘러갔을까. 어디로 보내려고 나는 그렇게 열심히 풀무질을 했던 것일까. 어디로 나의 은을 흘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가끔 잠에서 깨어날 때면 물살에 흘러가는 은이 내민 손이 천장 귀퉁이에서 급히 사라지곤 했다.

저만치 언덕이 보이고, 나뭇가지 사이로 누군가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림? 연, 연아.  숨이 차도록 달려간 나를 새끼 기린이 긴 목을 빼고 신기한 듯 바라본다. 그 눈 속으로 분홍빛 구름이 흘러간다. 림도 연도 정말 이 동물원 어디에,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일까. 푸르르 깃을 치는 나뭇잎들 사이로 온종일 코를 짓누르던 갇힌 짐승들의 진한 몸냄새를 날리며 저녁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타고 나뭇잎 사이에 숨어 있던 모든 어둠이 한꺼번에 내게로 몰려드는 것만 같다. 그 어둠의 결마다 눈이 달려 있다. 길모퉁이에서, 얼굴 속에서, 또 그 얼굴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 켜켜이 나를 바라보다가 우수수 흩어져 사라지는 눈.  
하늘을 향해 솟은 언덕을 나는 천천히 걸어 오른다. 하늘을 향해 솟아 있던 돌계단. 그 위에서 울고 있던 여자. 운을 끌어안았을 때 나는 나의 은을, 나 자신을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었다. 은, 나의 은...... 나는 언덕을 달려간다. 그렇게 운을 찾으면, 그렇게 은을 찾으면...... 그러면 연도 림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입을 열지 않는 나를 아이들은 집요하게 집적거리고 놀려댔다. 새로 들어온 선생들이 일부러 모르는 척 내게 뭘 시키면 다른 아이들이 먼저 기다렸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려 대답했다. 걘 말 안 해요. 벙어리예요. 아니 바보래요, 킥킥. 그들의 가슴에서는 무구한 벌레를 밟는 듯한 비열한 쾌감의 비명이 비죽비죽 비어져 나왔다. 조용히 해라. 오늘은 영환이가 읽을 거야. 처음엔 제법 심각한 사명감과 도전의지를 미소로 포장하고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선생이 마침내 패배감에 질려버린 얼굴로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너 정말 병신이니? 와르르 웃던 아이들이 킥킥 눈치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너는 하고 싶은 말도 없어?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선생이 돌아서기가 무섭게 누군가 내게 구겨진 종이를 던졌다. 아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고 있는 건 내 연습장이었고, 내게로 던져지는 건 함부로 찢겨지고 구겨진 그림들이었다. 어디론가 자꾸만 걸어가는, 그래서 자꾸만 사라지는,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이의 그림.  
나는 그저 스르르 일어나 걸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귀에 솜을 틀어막은 듯 와와, 웃음소리가 멀어져 갔다. 교문도, 운동장도, 아니 하늘이며 땅까지도 모두 다 헐겁게 열려 있는 봄날이었다. 내 몸의 표피도 그렇게 활짝 열려 잔 바람에도 세상이 내 속으로 밀려왔다 나갔다 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나도 세상도 모두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허공 같았다.  
나는 교문을 지나, 멀거니 바라보는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마주보며 거리로 나갔다. 개천을 따라 새로 포장한 길가에 벚꽃잎이 어지럽게 떠돌며 허공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자꾸만 자꾸만 걸어갔다. 그 몽환 같은 빛과 꽃잎의 점묘화 속으로 나도 점점이 부서져 버리고만 싶었다.
개천이 끝나는 곳에서 거리가 출렁거리고 어깨동무를 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긴 바암 지새에우고......
그날 나는 은을 다시 만났다. 어느 골목이었던가. 내가 담벼락에 기대 서 있을 때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억눌린 울먹임이 그늘처럼, 물처럼, 발 밑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골목 전체를 흔들었다.
돌계단에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더운 봄날이었지만 여자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여자는 부끄러운 듯 울음을 멈추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동그란 얼굴이 하얗고 이빨이 햅쌀같이 작고 고운 여자였다. 아니, 그건 그저 나의 기억이 만들어낸 착각인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여자의 억지 웃음이 곧 다시 울음으로 변했고, 나도 모르게 여자의 털모자를 벗겼고, 그 속에서 쥐가 뜯어먹은 듯 함부로 잘린 머리카락을 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고, 여자는 울며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에 갇혀 소용돌이치던 삭은 울음의 냄새가 훅, 내 몸 속으로 옮겨왔다. 그녀의 혀가 어망 속 물고기의 몸부림처럼 거세게 내 입안을 훑고 다니며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내 혀를 애무했다.
나는 그때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았고, 그러니 은이 살았어도 중학생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 여자가 은일 거라고 확신했다. 은이 살았다면, 은이 환생했다면 꼭 그랬을 거라고. 여자가 앉은 돌계단은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하늘에 어둠이 한 겹 덮일 때 어디선가 독경소리가 들려왔고, 내 눈에선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뺨이 뜨거웠다. 오래 열리지 않던 내 안에서 짐승 같은 울음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 나는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은과 수없이 옷을 바꾸어 입지도 않았고, 내가 은이라고, 아니 나는 은이 아닌 영이라고, 아니, 아니,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마구 저으며 울다가 깨어나지도 않았다.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덥고 축축한 기운에 깨어나 속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누군가 톡톡 유리창을 두드렸고, 곧이어 여린 풀잎을 찢듯 가녀린 새소리가 내 귀, 아니 그보다 훨씬 깊은 무엇을 울렸다. 유리창엔 새파란 새벽하늘이 몸을 비비고 있었다.
안녕?!
나는 입을 열어 유리창 밖, 어딘가에 있을 은에게 인사했다. 뻣뻣하던 혀뿌리에 뜨거운 통증이 감겨들었다. 나는 내 가슴 위로 흘러간 그 구름 같은 기억을 운이라 이름 붙였다.
운은 늘 나를 부르고 있었으나 나는 운을 다시 보지 못했다. 나는 이제 폐기물로 악취를 풍기기 시작한 개천을 건너 고등학교에 갔고, 어깨동무한 사람들이 파도처럼 목놓아 노래부르며 밀려오고 밀려가던 거리를 지나 대학에 갔다. 버스를 타고 달리면 뒤섞이는 상점의 간판들과 나무와 하늘과 사람들 사이로 어딘가에 외로이 입을 벌리고 있을 그 골목에 차 오르던 푸른 어둠이 언뜻언뜻 시야를 가로막곤 했다. 종종 우는 듯, 웃는 듯 울먹이는 누군가의 숨결이 내 귓불을 뜨겁게 달구곤 했지만, 운을 만났던 그 골목은 내 삶의 미로 속으로 속절없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가끔 캠퍼스와 거리가 노래부르고 구호 외치는 사람들의 물결로 출렁일 때면, 나는 그 골목을 찾아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었다. 그 도시 안에 그 골목과 비슷하게 어둡고, 비슷하게 습하고, 비슷한 음식냄새와 쓰레기 냄새를 풍기는 골목은 참으로 많기도 했지만, 운을 만난 그 골목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긴 이미 내 살과 뼈 속에, 혼 속에 들어가 박혀 제멋대로 자라나는 그 길을 세상의 길바닥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길을 찾고 싶었다. 운을 찾고 싶었고, 은을 찾고 싶었고, 또 무엇인가 내가 잃어버린 것을, 어머니를, 어쩌면 처음부터 갖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 어둠 속에 묻혀버린 그 무엇의 그림자라도 찾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경을, 화를, 정을, 수를 만나고 잃었으며 연을 만났다.  
연. 아직도 트렁크를 풀지 않는 연, 늘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연,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꾸만 가고 있는 연, 어쩌면 내 삶의 어느 미로에서 무심히 지나쳤을, 지금도 지나치고 있는지 모를, 소리 없는 울음 같은 연,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길을 잃는 연, 잃어버린 길에서 끊임없이 마주치던 연, 전화벨 소리로 나를 가르고 내 안의 수렁을 보게 하는 무수한 눈 같은 연...... 나의 거울 같은, 나의 연...... 나는 단숨에 언덕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우우, 아아.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원숭이들이 비명을 지르더니, 긴 팔을 휘저으며 나를 따라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뛴다. 저렇게 길다란 원숭이 우리가, 저렇게 많은 원숭이들이 모두 어디 있었는가. 우우, 아아. 신이 난 원숭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내달린다. 언덕을 내려와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내 앞까지 따라온 새끼 원숭이 한 마리가 손뼉을 치며 팽이처럼 맴을 돈다.    
얼룩말 한 마리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온몸에 찍힌 어지러운 줄무늬를 번득이며 우리 앞으로 다가와 꼬리를 휘젓는다. 문득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얼룩말이 바라보는 곳에 계집애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여린 나뭇가지처럼 가는 분홍빛 팔다리. 은 같기도 하고, 연 같기도 하고, 눈물에 젖어 구겨진 그림 같기도 한......  
피자를 토해낸 림이 지친 얼굴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아, 림. 나는 훌쩍 림을 안아 올린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구나 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거짓말 같다. 림은 눈물과 땀으로 발효된 작은 몸을 나사못처럼 내 가슴에 들이박는다.
우우, 아아. 나무에서 뛰어내린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끌어안고 비명을 지른다.
앙앙, 맥 찾으려고, 엄마 맥 찾아주려고, 맥 그림이 있어서 따라갔는데, 앙앙앙...... 잃어버린 것들은 항상 이런 냄새를 내는 것일까. 우리에 갇혀 온종일 지독한 냄새를 풍기던 저 짐승들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상실된 것들일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나를 잃어버린, 나로부터 상실된 누구......
언제 왔는지 연은 저 만치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녀의 뒤 철창 안에서 입이 길쭉한 짐승 하나가 무엇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성거리고 있다. 태이퍼. 맥. 악몽을 소화시키기에는 너무 유순해 보인다. 그래서 그도 더러는 악몽을 토해내는 것일까. 그리고 되새김질하는 것일까.

지친 림을 재우고 나는 연과 함께 창가에 앉는다. 들소떼처럼 몰려가는 구름 사이로 달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탈바가지 얼굴을 내민다. 우리는 포도주 한 병을 비우고 누가 빠른가 경주하듯 서둘러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다. 흐느끼듯, 흐느끼듯, 동작이 고조되고 울음인 듯 웃음인 듯 모를 서로의 것들을 밀물처럼 썰물처럼 토해내고 삼키기를 거듭한다. 마침내 폭발하듯 울음이, 아니 어쩌면 웃음이 터져 나올 때까지.
연의 전화가 배경음악처럼 울리다가 그친 다음 이번에는 집 전화가 울린다. 또다시 전화는 말없이 끊기고, 그 바람에 떨어진 맥 인형을 주워 제 자리에 놓으며 연이 말한다.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할게. 난 그냥 여기 있겠다고.  
나는 전화벨이 갈라놓은 어두운 수렁 속을 바라보며 묻는다. 연아, 넌, 부활하면, 무엇이 되고 싶니? 수렁 속에는 곰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하고 범 같기도 한 짐승이 청소기처럼 삐죽한 입으로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 갇힌 짐승의 눈 속으로 한 아이가 걸어간다. 자꾸만 길을 잃는 아이. 림 같기도 하고 연 같기도 하고 은 같기도 한...... 아이 속의 어른 같기도 하고 어른 속의 아이 같기도 한 그 모습은 걸어도, 걸어도 제 자리로 돌아온다. 림. 연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원한다면? 연이 또 날아갈 듯 피식 웃는다. 으음, 화, 수, 정, 또 뭐랬지? 그 십이 간지 같은 여자들이 다 돼 줄 수도 있지. 너는? 나? 나는 어쩔 수 없는 맥이지. 숲을 지키는, 숲에 사는 맥.  

*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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