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을 꿈꾸는 밤 -이근일
2011.09.23 08:00
또 하나의 죄를 몸 속에 쌓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사찰앞을 서성거립니다 담 너머 법당안에 연등이 환하게 켜지고 나는 그곳에 등을 돌리고 앉은 부처를 봅니다 슬픔보다 하얗고 차가운 눈송이들이 순간 내 늑골을 마구 뭉개며 밀려왔다, 밀려나가고 나를 에워싼 몇그루 순백의 시간들 사이에서 나는 자꾸 비틀거립니다 캄캄한 허공에 아름다운 원을 그리는 저 한쌍의 새처럼 나는 지난날의 그 붉은 방을 허공에 떠올려 봅니다. 당신과 내가 있고, 막 불을 피운 난로가 있고 우리가 숱하게 지새운 눈물의 밤들이 난로 위 주전자에서 부그르르 끓고 있는 그러나 이내 몰아친 눈보라가 그 붉은 방의 창문을 뭉개고 꼬옥 껴안고선 말없이 더운 김으로 피어오르던 한 몸뚱이를 뭉갭니다 전생에 품은 그 불순한 사랑에 대한 업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쌍의 새가 뾰족한 입을 맞추며 포르르르 떨어져 내리는 밤, 나는 술에 취해 자꾸만 비틀거립니다 눈보라 속에 붉은 한시절 잃고 그만 쓰러집니다 당신을 잃고, 나를 잃고 1979년 경기 고양 출생 200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84 | 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 한길수 | 2011.09.03 | 3007 |
83 | 뼈로 우는 쇠 -조유리 | 한길수 | 2011.10.13 | 806 |
82 | 실종 -한용국 | 한길수 | 2011.10.03 | 776 |
81 | 달의 통로 -박지웅 | 한길수 | 2011.11.13 | 688 |
80 | 열렸다, 닫혔다, 사라졌다 -박강우 | 한길수 | 2011.07.03 | 659 |
79 | 유리세공사 -권지현 | 한길수 | 2011.10.13 | 653 |
78 | 장미수 만드는 집 -유미애 | 한길수 | 2011.11.13 | 650 |
77 | 만일의 세계 -이장욱 | 한길수 | 2011.04.03 | 630 |
76 | 화랑게에 대한 반가사유 -김경윤 | 한길수 | 2011.10.13 | 574 |
75 | 전화보다 예감을 믿는 저녁이 있다 -박용하 | 한길수 | 2011.07.23 | 567 |
74 |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 한길수 | 2011.03.13 | 559 |
73 |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한길수 | 2011.02.23 | 548 |
» | 붉은 방을 꿈꾸는 밤 -이근일 | 한길수 | 2011.09.23 | 545 |
71 | 말풍선 -김기택 | 한길수 | 2011.04.03 | 538 |
70 | 감꽃 -박성우 | 한길수 | 2011.04.13 | 521 |
69 | 우체국 가는 길 -전다형 | 한길수 | 2011.10.13 | 509 |
68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 | 한길수 | 2011.04.03 | 508 |
67 | 무너진 건물 틈새로 -유현서 | 한길수 | 2011.10.03 | 506 |
66 | 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이진명 | 한길수 | 2011.09.13 | 504 |
65 | 凡우주적으로 쓸쓸하다 -최금진 | 한길수 | 2011.05.13 | 4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