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움 만물시장

2011.04.27 06:02

한길수 조회 수:796 추천:88

제법 쓸 만한 헌옷들이 옷걸이에 늘어져있고 수공예품 LP판 놋그릇 골동품 헌 신발들이 잉크처럼 엎질러진 좁아진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녔던 서울 황학동 중고시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검은 봉투에 담고도 삐죽 올라온 옷깃 보여도 누가 흉보지 않던 넉넉한 웃음 짓는 그을린 얼굴과 진열된 물건들 눈요기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싱싱했던 기억이다 미국 살면서 눈발 한번 못보고 맑은 날이 비오는 몇 날을 개 눈 감추듯 화창한 봄날 건조하고 밋밋하다는 푸념이 새순처럼 자라있다 이민자의 천국이란 명성에 흠가지 않던 연휴나 명절도 평일처럼 일 나가며 앞만 보고 살아가는 게 익숙해져 계절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고 웬만한 큰일에도 덤덤해지는 다소 쓸쓸한 일상의 연속이다 황학동 중고시장을 절묘하게 옮겨다 놓은 듯 한눈에 들어오는 ROADIUM* 만물시장이 있다 유효기간 일 년쯤 지난 비누 칫솔 간식 통조림도 술 한 잔 걸친 취객처럼 널브러져 아이들 많은 사람은 한 묶음씩 사간다 빠르게 진화하는 전자제품 유명상표 비슷한 가방들 신상품 청바지까지 보증 없어도 환갑 넘은 나이에 회춘하는지 소비자가 더 늘어만 간다니 불황속에 호황인 곳이다 갔다버려도 좋을 오래된 물건은 골동품으로 둔갑하고 주인만 잘 만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먼지 툴툴 털며 엉덩이 춤추며 나선다 고국 생각으로 태평양 바라보다 눈에 가득 출렁이는 그리움 훔쳐내는 일도 심드렁해지면 가끔 만물시장에 가라 헐값주고 산 그림이 렘브란트나 모딜리아니 작품이었다고 기사 실리듯 낙타 바늘귀 지나가듯 횡재하는 상상하며 구경하고 기막힌 수제품 만들며 열심히 사는 모습 보면 불끈 삶의 의욕으로 화색이 돌 것이다 히스패닉 상인에게 “꼬모 에스타?**”하면 해맑게 웃음으로 화답하는 엘에이에는 이국정취 물씬 풍기는 황학동 중고시장이 있다 * ROADIUM; 엘에이 남서쪽 토렌스 시에 있는 만물시장 이름. ** 꼬모 에스타(Cómo está?); 스패니쉬 언어로 “안녕하세요?” 라는 뜻. - 2011년 <시와 경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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