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시세계

2006.03.16 01:26

한길수 조회 수:890 추천:82

1. 들어가며 한국 현대시사에는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풍랑의 거친 소용돌이가 있었다. 1950년대를 전후로 시는 전장시로부터 출발하는데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구상, 박인환, 유치환, 박두진, 조지훈 등 많은 문인들은 이에 대응하여 격시(激詩)를 쓰고 '문총구국대'를 조직하여 1•4 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특히 체계적으로 활동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광수, 김동환, 김억, 정지용, 김기림 등은 납북되고, 설정식, 이용악 등 좌익계 시인들은 월북하고, 박남수, 이인석, 양명문 등은 월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단은 재편될 수밖에 없었고,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멍에를 벗을 수 없는 비극적 현실에 빠져들게 되었다. 월북, 납북작가라는 미명하에 1988년 해금이 되기 전까지 작품을 공개적으로 다루지 못했는데 그 중 우리의 문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광복 후 우리시단을 이룬 청록파 시인을 탄생시켜 현대문학을 빛내게 했던 정지용이라는 시인을 소개하면서 그가 가졌던 문학 세계와 정신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한 축이 되었던 시인의 문학이 어떻게 변화되고 승화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정지용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영일 정씨. 1923년 휘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 후진양성과 주옥 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를 빛냈다. 휘문 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박팔양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하였다. 대학에 재학할 때에는 시 ‘카페 프란스’, ‘DAHLIA’, ‘이른봄 아침’, ‘바다’, ‘향수’ 등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은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를 보여주고 전위적인 모더니즘의 실험성까지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당시 시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30년대에는 박용철이 주재하는 신문학 동인으로 참가, 창간호에는 ‘이른봄 아침’, ‘경도압천’, ‘선취’, ‘2호에는 바다’, ‘피리’, ‘갑판위’, ‘저녁햇살’, ‘홍춘’ ‘호수1’, ‘호수2’등을 발표하였다. 1933년에는 카톨릭 청년지 창간에 참여하여 시 해협의 오전 2시, 비로봉, 임종, 시계를 죽임, 다른 한울, 또 하나 다른 태양, 불사조, 나무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이 있으며, 산문집 <지용 문학독본>이 있다.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조선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였으며 그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이북통신>이라는 주간지에 ‘지용월북’이라는 기사가 실리자 스스로 출판사에 돌아다니며 월북 사실이 없음을 해명하기도 했던 정지용, 납북되기 전후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억측과 오해, 더 많은 시를 쓰고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나이에 한국 전쟁 발발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게 끌려나가 문화선 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뒤 소식이 끊겼다. 1953년 전후에서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일제 강점기와 8.15 광복,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 수난의 수레바퀴를 그대로 밟고 간 아픔을 온 몸에 짊어져야만 했던 시인의 삶이 비극적 행각으로 끝난 것은 분단된 우리 겨레의 아픔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정지용의 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아픈 가슴을 안고 사는 한국인 모두에게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지속적으로 우리 민족사와 함께 지용의 시들은 영원히 살아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의 문학 또한 이념논쟁 등으로 우리의 망각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용문학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의 희미해진 망각 속에서 되살아나 한국인의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지용의 대표적인 시중의 하나인 <향수>는 지금도 수많은 독자들이 읽고 있으며 그들에게 고향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과 다시금 그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정처 없는 회귀감을 느끼게 해준다. 2. 시인의 대표작품과 시세계. 정지용 시인의 작품 <유리창>, <호수>, <바다>, <백록담>, <장수산>등 많은 시편들이 고등학교, 대학의 문학시간에 읽혀지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를 감상하고 있다. 정지용 시의 방법론과 비교문학, 분석비평, 의식비평, 원형비평, 문학사회학적 관점 등 다양하게 동원되면서 심화되었다. 이들 논문의 질도 국문학 연구 가운데 어느 분야에 비해 손색이 없다.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시를 거론하게 될 때 흔히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이 상 등을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게 되는데 1920년대의 한국시가 낭만적, 주정적, 감상유로파적 습벽을 벗어나지 못했던데 비해서, 1930년대 초기의 한국시는 우선 주지적 작품이나 감각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시와 시인들을 거론하는 것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 모더니즘시를 보여 준 시인이다. 정지용의 시는 1925년 <학조>에 ‘카페 프랑스’, 1927년 <문예시대>에 ‘산에 색시 들에 사네’, 동년<조선지광>에 ‘갈매기’, ‘갑판위에’ 등을 발표했고, 그 후 박용철과 같이 정교한 언어미를 창조하는 <시문학>에 참가했다. 1934년 전후해서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을 맡는 등 이미지즘을 구축하는 데 탁월성을 과시했다. 1980년대 해금되면서 지용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가 대학원의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지용의 시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많은 연구를 짧은 시간에 살펴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의 주요 작품을 통해 정지용이 추구했던 한국적 모더니즘 시세계와 전통지향적 시들을 감상하려고 한다. 정지용이 남긴 시집으로는 1935년 10월 시문학사에서 낸 "정지용시집"과 1941년 9월 문장사에서 간행한 "백록담"이 있다. 그리고 1946년 6월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지용시선"이 있으나 이 시집은 박두진이 "정지용시집"과 "백록담"에서 25편을 뽑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시는 두 시집에 실린 122편과 그 밖의 20여 편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첫 시집 "정지용시집"에 ‘바다 1’ 등 총 89편이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5부의 ‘밤’ 과 ‘람푸’ 는 <카톨릭 청년> 4호에 발표된 산문 ‘소묘 4.5’를 각각 개제하여 실은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89편의 시에서 ‘말 2’, ‘산소’, ‘종달새’, ‘바람’ 등 네 편을 제외한 85편은 이 시집 이전의 수록지가 밝혀졌다. 1926년 <학호> 창간호에 실린 ‘카페 프란스’와 ‘슬픈기차’등 10여편의 시를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지광>, <신민>, <시문학>, <카톨닉 청년>, <문예시대>, <신소년>, <문예월간>, <신생> 등 그 당시의 잡지에 발표한 초기 시를 모은 이 첫 시집은 당시의 시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는 3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대체로 첫 시집 이후에 발표한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1939년에 창간한 <문장> 지에 실린 ‘장수산 1’ 과 ‘백록담’ 그리고 같은 잡지 22호에 발표했던 ‘朝餐’, ‘비’, ‘忍冬茶’ 등이 주축이 되어 있다. 두 번째 시집은 자연을 깊이 관조하고 있는 시세계를 보여 주는데 형태 면에서 산문시 형태가 월등히 많다. 1) 고향의 향수와 이국의 바다 정지용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은 충북 옥천읍 하계리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시인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에 진학하면서부터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지만 언제나 잊지 못할 곳으로 그리워해 왔으니 그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시가 ‘향수’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러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업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전체적으로 유장한 흐름을 보이는 가운데 연마다 후렴시행이 따라와 음률적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1923년 3월에 쓴 것으로 ‘해설피’ ‘참하’ ‘함추름’ ‘휘적시든’ ‘서리 까마귀’ 등이 보이는데 지용은 시어 선택에 있어서 어형을 변화시킨다거나 두 단어를 합성한다거나, 양성모음으로 바꾸어 쓰는 등의 우리말에 새롭게 의미를 첨가하여 강조하는 언어적 기법을 최대한 활용한 시인이다. 흔히 향수라고 하면 내 고향이 얼마나 그리운 곳인지, 고향을 떠난 삶이 얼마나 서글픈지 감정을 직접 토로하기 쉬운데 그런 시가 범람하던 시기인 1923년에 쓰여진 이 작품이 감정을 절재 해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로만 감추고 있다는 것은 이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감상 벽을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절제된 감정은 아들을 잃은 뒤에 썼다는 ‘유리창 1’에 잘 나타나있다. 향수와 관련해서 짚어보아야 할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곧 고향에서 살던 유년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며 동시에 맑은 동심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1932년 <동방평론>에 발표한 ‘고향’의 경우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고향 상실감을 표출하고 있다. 고향이 안온하고 자족적인 공간이라면 이국의 체험은 그것과는 대척적인 자리에 선 공간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재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매 끝에 홀로 오르니 힌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고향> 이 작품은 정지용이 그리던 고향과 다시 찾아온 현실의 고향이 너무나도 먼 거리감과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감과 이질감은 고향의 풍광과 인정이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작자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장년기에 접어들어 고향에 돌아온 작자는 그 성장 이전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유년기의 꿈을 모두 상실하고 난 마음의 변화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시 경향을 김용직은 ‘소극적 저항’이라 불렀는데 시인이 가톨릭 세계에 귀의하면서 중기시의 양상인 종교시로 선회하게 된다.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도 제철에 울고, 인정스레 웃고 맞이하는 꽃도 모두 옛날 그대로지만,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작자의 이러한 실향의식은 그가 고향을 마음에 지니지 못한 채로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같이 헤매다 돌아왔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정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황량해진 마음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과의 이질감에서 빚어진 자학적인 실향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산꽁’, ‘뻐꾹이’와 ‘꽃’, ‘하늘’과 같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속성을 대응시켜 실향자의 비애의식은 한결 고조되고 있다. <고향>의 반복적인 효음으로 그 비애의식은 보다 어둡고 서글픈 탄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지용은 위 시처럼 2행 단위로 띄어쓰기를 선호하였고 2행 단위 띄어쓰기 시형은 지용이 <문장>을 통하여 추천한 박목월과 조지훈에게도 흔히 보이며 영향관계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릿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정지용의 시 가운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를 대라면 ‘유리창’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절제된 언어미가 뛰어난 시이다. ‘유리창’은 자신의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고 유리창에 서린 입김을 지우는 심사로 외로움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어의 선택이 탁월하다. ‘유리창’을 보면 生子와 死者가 만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날개를 파닥거리며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대상은 죽은 사람의 영혼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우고 보아도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작자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유리창을 닦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물먹은 별은 작자 자신의 눈물인 것이다.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에서는 자식을 산새로 비유하고 그 아픔을 절제하여 나타내고 있다. ‘차고 슬픈것이 어른거린다’로 객관화되어 있는 표현은 화자가 바로 슬픔의 주체인데도 불구하고 비정하리만큼 차갑게 객관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감상주의를 배제란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의 객관적 비정성은 감정을 차갑게 절제하는 주지적 시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찟긴 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들러 손질하고 물기를 시쳤다. 이 액쓴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회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지구는 연닢인양 옴으라들고.... 펴고.... -<바다9> 정지용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는 바다를 노래한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정지용은 직관을 통한 사물의 명징성과 신선한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바다>라는 사물을 의인화하여 사생한 해도라고 할 수 있다.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을 <뿔뿔이 달어 날랴고>한다고 표현했고, 끝없는 물이랑을 이루어 몰려와서 물에 부딪혔다 흩어지는 것을 <도마뱀떼>로 보았으며, 그 빠른 움직임을 <재재발렀다>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처럼 시각적 동태를 청각화하여 들으려는 표현기교는 정지용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엘쓴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에서 <엘쓴 해도>는 그의 상상력으로 조형한 해도로 또는 자의대로<애써 만든 바다>로 해석된다. 지구를 둘러싼 바다, 그것은 마치 지구를 받쳐든 것 같고, 찰찰 넘치고 돌돌 구르는 물결들 따라 오므라들기도 하고 펴지기도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간추린 내용이다. <바다>가 주는 시각적 인상을 선명하게 조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바다>라는 한 사물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그것이 말하는 언어와 몸짓을 통하여 그 내밀한 의미를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틈엔가 작자는 <바다의 물결>을 통하여 도마뱀떼의 재재바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는 그런 기진한 상태도 작자 자신이 <바다>와 일치 되었을 때만이 바다의 이러한 상태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된다. 생애에서 알려진 것처럼 지용은 1923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경험하게 된 근대의 문물들과 서구의 지식과 정서는 안목의 확대를 가져오며 시에서도 포말리즘의 기법을 시도해 보고 있다. 일본을 오가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바다는 고향에서 바라보던 산천과는 아주 다른 감흥을 주었을 법하다. 2) 사회 참여와 시창작. 해방이 되자 정지용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시를 쓰기 위해 전환을 시도한다.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문학이라고 하느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 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적이 없다."고 토로한 지용은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전반에 걸쳐진 비리를 비판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 활동을 벌인다. 이시기에 그가 남긴 시는 ‘애국의 노래’, ‘그대들 돌아오시니’는 논의할 수 있는 성질의 작품도 아니다. 1950년 2월호 "문예"지에 발표된 ‘곡마단’은 감격이나 환희가 사라지고 난 뒤의 작품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반성적 화자가 나타나 있다. 지용의 시는 사물과 정서를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에서 출발했으며 이런 시작 방법론은 엄격한 시어의 선택과 시인의 자세로까지 이어지는데 언어에 대한 지용의 이런 견해는 언어의 연금술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모국어 전반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나타나 그의 시에는 적절하게 살려 쓴 방언, 고어, 그리고 새로운 조어까지 제자리에 잡아 빛나고 있다. 엄격한 금욕주의자로서의 모습은 언어 선택에까지 이어지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시를 바라보는 입장과 동궤의 것이다. 시작에 있어서의 이러한 태도가 곧 감정의 절제라는 현대적 방법으로 나타나면서 극기와 허정의 세계로 한없이 자신을 밀고 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나히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疲勞)웁다. 이제 태양(太陽)을 금시 일어 버린다 하기로 그래도 그리 놀라울리 없다. 실상 나는 또하나 다른 태양(太陽)으로 살었다. 사랑을 위하연 입맛도 일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슬지라도- 오오, 나의 행복(幸福)은 나의 성모(聖母)마리아! -<또 하나 다른 태양(太陽)> 종교적 주제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거나 시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여타의 종교시보다 이 작품은 시적 투명성, 간결성과 뚜렷한 이미지가 보인다. 종교적 열의도 절제되어 있으면서 한결 간곡하게 다가오는 작품으로 성모마리아를 또 하나 다른 태양으로 모시고 있기에 태양을 잃어버린다 해도 놀랄 것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도 존귀한 자신의 몸도 화자의 행복이요 사랑인 성모마리아를 섬기는 것이다. 伐木丁丁이랫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좆지않고 뫼ㅅ새도 울지않어 깊은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란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아간 뒤 조찰하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란다. 차고 凡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속 겨울 한밤내- -<장수산> 이 작품의 내용은 <아람도리 큰 소나무가 꽉 들어찬 장수산>의 깊은 계곡에는 <멩아리>도 <다람쥐>도 <묏새>도 울지 않는 산중의 고요가 오히려 뼈를 저리게 한다. 눈과 밤이 한데 어울려 <조희>보다 희고 <달>도 보름을 기다려서야 비로서 산골에 나타나는 이런 바람도 없는 산중에서는 유심한 고요에도 흔들리는 <시름>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선과 악 등 일체의 속루(俗累)를 끊고 장수산의 깊은 정적 속에 파묻힌 작자의 마음은 보다 투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즉, 고요한 적막 속에 어느덧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게 되고 순간적인 자아를 버리고 대자연과 더불어 무위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된다. 작자는 고요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조하여 그 대상의 생명적 실체를 포착하여 시로 형상화 하고 있다. 나와 자연이 합치되어 자신도 하나의 풍경으로 무아경에 이룰 수 있게 되며 서정적 자아의 내면이 지향하는 세계는 겨울산의 순결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지만 순백의 공간을 함께 이루는 정신의 어떤 높이가 있고 텅 빈 듯한 산의 여백에 동참하는 마음의 너그러움이 있다. 시인은 마음에 일어나는 심한 고뇌를 감지하면서도 순수에 대한 지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겨울산의 절대 고요에 동화되기 위해서는 슬픔은 물론이고 미래의 이상까지도 배제할 때 겨울산의 얼어붙은 정적, 순백의 공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옴겨다 심은 종려(種櫚)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쟈.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心臟)은 벌레 먹은 장미(薔薇) 제비 처럼 젖은 놈이 뛰여 간다. <오오 패를(鸚鵡) 서방! 꾿이브닝!> <꾿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밤에도 경사(更紗) 커-틴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여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강아지야 내발을 빨어다오. 내발을 빨어다오. -<카페 프란스> 1926년 발표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송되었던 작품으로 <바다 2>와 같은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흐름의 시들은 <카페 프란스>와 함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화자와 앵무새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고 활자의 크기와 활자체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다.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에서 보이는 이른바 형태주의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루바쉬카, 보헤미안, 뻣적 마른 놈이 밤새 불을 켜두고 있는 카페 프란스로 향하고 있다. 루쉬카는 러시아의 남자용 블라우스로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게 시작한 이 시절 대학생들의 유행이었다. 비오는 밤, 유학생 셋이 비를 맞으며 카페를 찾아가는 정황은 가볍고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여급으로 보이는 울금향 아가씨도 이들을 반가워 하지 않는다. 자작은 한일합병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한 친일파나 일본이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내린 작위로 이완용은 백작, 유길준은 남작 등 8명은 작위를 거절하더나 반납하였다. 이른바 그들 귀족과 2세들은 조선과 일본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그들은 가난한 유학생들의 노여움을 샀으리라 짐작한다. 화자는 이국종 강아지를 불러 하소연하듯 비애의 감정을 안으로 다스리며 시를 맺고 있다. 3. 정지용 문학제 http://jiyong.or.kr/index.html를 클릭하면 정지용 문학관을 보다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작년에 제 18회 지용제에 관한 행사 내용을 살펴보면 정지용 시화전과 공예전, 문학상 수상식 등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이 행사를 통해 정지용의 삶의 향기를 더욱 가까이 느끼며 그의 문학을 접하고 대화하며 문학적으로 정지용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옥천의 문학축제였다. 제18회 지용제 2005. 5. 13(금) ~ 15(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일원(관성회관, 정지용생가) 옥천군, 옥천문화원 각 문화예술단체 문화관광부, 충청북도, 중앙일보, 지용회, 옥천교육청 위 치 :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 규 모 : 부지 182평(건평 22평) 생가복원 : 전통초가한옥 2동 ('96.7.30 준공) - 본체 : 1동(16평) - 행랑채 : 1동(6평) 부대시설 : 담장 1식, 안내판 1개, 이정표 1개, 시비건립 1개, 지용생가 표지석 1개, 현대문학사적지 표지석 1개. 4. 나가며 정지용의 주요 작품과 윤곽을 짚어봤다. 결론적으로 정지용의 시의 특징은 첫째가 시어 구사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고, 줄째는 시의 형식면에서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성법에 기초한 2행의 동시로서는 독특한 줄글식 산문시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인의 감정이 시에 노출되는 것을 엄격히 배제한 대상묘사로 이미지즘의 시세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한다면 정지용의 작품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이 암울했던 시대에서 자연과 서정을 궁핍한 생활에 어떻게 문학으로 승화시켜 노래할 수 있었으며 순수시에 영향을 준 과정을 알아 보는 것이다. 아울러 좀 더 많은 텍스트를 가지고 시인의 시대별 흐름까지 살펴 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 줄인다. 정지용 시인의 탁월한 시어와 서정은 오늘날 시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고 강조하며 이런 시 한편 쓸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진다. * 주요연혁 발췌 1902(1세)년 음력 5월15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아버지 연일정씨 정태국과 하동정씨 정미하 사이에 독자로 태어남. 지용의 아명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 하여 지용이란 발음의 한자를 맞춘 것임. 1913(12세) 동갑인 은진 송씨인 송재숙과 결혼 1918(17세) 휘문고보에 입학, 이때부터 습작 활동을 시작함. 1919(18세) 12월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이 발표됨 지용의 유일한 소설. <요람> 동인지를 김화산, 박팔양,박소경 등과 함께 주도하였음. 1922(21세) 휘문고보를 졸업. 이때까지 계속 아버지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함. 1924(23세)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25세) 공적인 문단활동 시작.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와 동시 및 시조를 발표함. 1929년 동지사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 문예지 <근대풍경>에 일본어로 된 시들도 많이 투고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북원백추의 관심을 받게됨. 주요작품으로 ‘기차’, ‘해협’, ‘다시해협’, ‘슬픈 인상화’, ‘풍랑몽’, ‘옛이야기 구절’, ‘호면’, ‘새빨간 기관차’, ‘뻣나무 열매’, ‘오월소식’, ‘발열’, ‘말’, ‘내 마음에 맞는이’, ‘무어래요’, ‘숨ㅅ기내기’, ‘비둘기’ 등이 있음. 1929(28세) 동지사대학교를 졸업.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이후 16년간을 재직함. 시 ‘유리창’을 씀. 1930(29세)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 1930년대 시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됨. 주요작품으로는 ‘이른봄 아침’, ‘Dahlia’, ‘경도 가모가와’ ‘선취’ ‘바다’, ‘피리’, ‘저녁 햇살’, ‘갑판우’, ‘홍춘’, ‘호수1,2’ 등이 있음. 1933(32세) <카톨릭 청년>의 편집고문. <구인회> 문학친목단체를 결성. ‘해협의 오전 3시’, 산문 ‘소곡’등을 발표. 1935(34세) 제 1시집 "정지용시집"을 시문학사에서 출간 1939(38세) <문장>지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 시킴. 1941(40세) 제2시집 "백록담"을 문장사에서 출간. 1945(44세)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로 직장을 옮김. 담당과목은 한국어와 나전어(羅典語) 1946(45세) 경향신문이 주간이 됨.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 1947(46세) 경향신문사의 주간직을 사임하고 이화여대 복직함. 서울대 문리과대 강사로 출강하여 *시경*을 강의함. 1948(47세) 2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임하고 녹번리 초당에서 서예를 하면서 소일함. 1949(48세) "문학독본"이 박문출판사에서, "산문"이 동지사에서 출간됨. 1950(49세) 6.25동란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 (부인 송재숙씨는 70세 일기로 1971년 4월 15일 별세) * 참고문헌 김재홍, <한국현대시의 사적 탐구>, 일지사, 1998. 김용직, <한국현대시 해석,비판>, 시와시학사, 1991. 민영, 최원식, 최두석, <한국현대 대표시선Ⅰ>, 창작과 비평사, 1990. 송하선, <한국 명시 해설>, 국학자료원, 1998. 김학동, <정지용 연구>, 민음사, 1997. 김종태 편저, <정지용 이해> 태학사, 2002. 오세영, <한국현대시인연구> 월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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