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2005.03.25 09:48

한길수 조회 수:558



나희덕[-g-alstjstkfkd-j-]나희덕 시인의 시선은 익숙한 삶의 구석, 초승달처럼 비어 고요한 일상에 머문다. 시인의 시선엔 연민이 가득차 있되, 끊임없는 자기반성도 놓치지 않는다. 마음 속에 '사금파리' 하나를 묻어놓고 스스로 거기에 찔려 아파하는 것이다.

남들은 이미 다 잊었을 그것, 사라져버린 시대와 인간을 시인은 여전히 기억한다. 시들기 이전 황어의 빛나는 비늘을 기억하고, 빈 집에서 우두커니 자신을 기다렸을 그림자를 기억한다. 하지만 시인의 발걸음은 무거운 기억에 짓눌려 무겁지 않다.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러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재로 지어진 옷' 중)

시인의 걸음은 고요하고 또 느리다. 잠시 멈추어 주변을 돌아보되 정체하지 않는다. 이는 시인이 상처와 얼룩을 지우고 또 베어낸 후에야 비로소 자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잊지 않되 우리의 삶이 결국은 '빛을 향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꽃과 잎이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기에
붉디붉은 그 꽃을 아주 잊기로 했습니다"('붉디붉은 그 꽃을' 중)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어도
빛을 찾아나선 삶이기는
마찬가지, 아, 하고 누군가 불러본다"('빛은 얼마나 멀리서' 중)

시인은 햇빛과 그늘 사이 어느 곳에도 온전히 머물지 못한다.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시인에게 어려운 일이다. 삶과 죽음, 빛과 그림자, 붉게 피었다 말라가는 꽃, 대립되는 시어들이 시인 안에서 함께 머문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걸음을 멈추고' 중)

마음 한켠 나무 한 그루를 기르는 시인은 그리하여 '어치가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겨울 아침',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다짐한다. 어린 것들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또 이내 떠나보내는 것이 순리임을 배우고, 때로 상처가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힘이 됨을 깨닫는 것이다.

삶에 지칠 무렵 조용히 머리를 쓸어줄듯 싶은, 신체의 일부에 비유한다면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처럼 느껴지는 시집이다. - 박하영(2004-09-07)

'따뜻함'과 '단정함'의 이미지하면 떠오르는 나희덕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간명하고도 절제된 형식과 시어가 돋보인다. 등단 15년째를 맞은 시인의 눈길은 이제 '따뜻함/단정함'의 지층 아래에까지 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어둠'과 '밝음'처럼 대립되는 시어들은 이내 길항의 관계 속에 조용히 녹아든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 도식 속에 삶의 복합성을 구겨넣으려는 태도와 정면 배치되는, 모성적 따뜻함과 포용을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걸음을 멈추고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9년 제17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그 외에 김달진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반 통의 물>, 시론집으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다. 2004년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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