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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김형효
2004/4/11(일)

설악을 끌어안고 잠든 시인 이성선  

아름다운 언어로, 영혼도 아름답게 몸안에서 사르다 간 시인


시인 이성선은 보다 한긋 정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형의 마음밭은 온통 그곳에 가 있다. 그는 육신의 움직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글쎄, 내가 보기로는 땀에 흠뻑 젖은 육체 노동에서 핵심의 정신이 노오랗게 고름맺힌 양 썽나 있어야 진짜일 텐데. 어쩐지 형의 고름은 참 독할 것 같다. 그러나 점점 노장(老莊)의 색채 의혹이 짙어간다. 쉼표 하나만 휑덩그러이 만들어놓고 이승을 그냥 떠나진 않을 테지.암, 이성선 형이 누구처럼 선시 쓰는 신선으로 전락해선 안 되지, 안 돼. 손쉽게 승천하고 말 테니까 <김강태,평론가>

설악의 혼령을 온몸에 부둥켜 안고 살아온 시인 이성선(1941년~2001년 5월4일)이 어제 승천하였다. 그동안 서울에서의 갖은 유혹도 뿌리치고 고향의 혼령을 찾아 인간의 심연을 다독이며 시심만으로 살아온 시인이 설악을 끌어안고 깊은 잠 속에 들었다. 시와 함께 아니 영원히 시속에 살기 위해 설악으로 아니면 속초의 깊은 바다 속이나 갈매기 울음소리를 따라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성선 시인이 보여준 시세계에 대해 짧은 평을 곁들여 보자.

오늘날 시적 흐름이 서정과 서경 그리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잡설에 가까운 시를 작품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시(詩)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해체된 의식으로 몰아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시가 가져야할 엄격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인 이성선의 글쓰기는 새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언어의 무균질적 아름다움 속에서 현대의 병폐적인 것들이 숨어버린다는 점도 있지만,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의식과 격리된 쓰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원론적 의미에서 시세계를 생각하고 작품에서의 그의 언어가 갖는 특별한 성과는 그의 삶과 생활 양태속에서 시적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의 쓰임은 뛰어난 가치로 평가 받을만한 것이다.

현 시점에서 시적 언어의 쓰임을 두고보자면 먼저 우리 시사의 전반부를 훑어 바라본 연후에야 그 원론적 논의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럼에도 본고에서 그러한 이야기의 일부라도 이야기하려면 우리 시가문학에서의 시적발전 과정과 외국사조의 유입의 양갈래를 철저하게 해부 분석해 본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 시인의 작품이 일생을 통하여, 변모하고 진보하는 것은 사회, 또는 내부의 끊임없는 충동에 대한 변혁일 것이다.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박노해 시가 그런 경우다.

지금은 석방되어 별다른 시적 그리고 시어의 변화를 조망하기 힘든 지경이긴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론 "단지 외부의 적만 향해서만 목소리를 높이는 사상과 투쟁에서 나아가, 삶의 안쪽에서 자기 자신과도 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이 진정한 혁명적 삶이란 것을 깊이 깨우친 사람" 만이 진정으로 깨달은 자가 아닐까. 많은 철학가, 문학인, 사상가들이 후세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이 '변혁'을 위하여 그가 바친 노력과 의지, 현실을 돌파하려는 끊임없는 예술혼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박노해, 김지하적 민중시(시대적 당위성과 이념적 설득력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동어반복과 도식성을 되풀이함으로써 질을 떨어지는 경우)의 변혁은 사회적, 시대적 요구에 적절한 변화라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성선의 경우는 민중시가 아닌 서정시임에도 불구하고 도식성과 동일주제의 되풀이로 작품의 질을 저해하는 부분이 유달리 많다.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깊이를 낮추게 한다.


새벽 세시는 되었을까
술이 지나쳐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다가
깨어 마당에 나가
참지 못해 내갈기는 오줌발


그런 내 앞에
질펀하게 깔린 동해 바다 쪽으로
하늘에서 궁둥이를 내려까고
늦은 달아, 너는 지금
무얼하고 있느냐.


너도 술이 덜 깨어
얼굴 붉게 상기된 채
바다 가까이 내려앉아
부끄러움도 잊고
오줌 누고 있구나.


낙산사 바다엔
너와 나의 거름 보시로
붉게 피어난 홍련꽃 ―《거름 보시》




아름다운 사람 하나 길을 나섰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산 아래 와 섰네.
앞에 웃고 피어 있는 개망초꽃 한 송이
샘물에 얼굴 비추고 떨며 피어 있네.
알 수 없는 향기에 이끌린 오후. ―《개망초꽃》




산 아래 붓꽃 한 자루 피어 있다.


한밤에 촛불 앞에
내가 앉아 있다.


밖에서 돌아오면 나는
세상을 향해 이런 얼굴로 핀다. ―《붓 꽃》



오늘의 시점은, 분단 이래의 여러 금기체계가 무너지고 가치관과 감수성의 차이가 크게 무너지고 있다는 점에서, 80년대는 갈등과 혼란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모색과 추구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80년대 후반의 민중시가 그랬듯 90년대 후반인, 지금에 돌이켜 본 서정시도 민중시 못지 않은 동어반복과 도식성을 되풀이함으로써 질이 떨어지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현대시의 태동을 상징파 수입에 두고 있고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우리의 연구가 상징파 혹은 상징주의를 상정하고 있는데 대하여서 지엽적으로 발생될 수 있는 다른 견해들에 대해서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주의를 재차 삼차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이성선 시인의 시들은 상징적 전통을 간직한 우리 언어의 복원으로 언어 미학적으로 승화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사의 현대성과 사회성 그리고 체제 저항적 글쓰기와 궤를 함께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이성선 시인에 시의 시의성이나 현실적 협의로서보다는 문학사적인 의미에 한(限)한다. 그것은 언어적 쓰임에 있어서 서구라는 문학적 상황을 살펴보아도 가장 강력한 원천성을 갖고 있는 시어의 쓰임 때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아쉬운 것은 선(禪)적인 의미와 맞닿는 시어와 시쓰기는 자칫하면 헛돌아가는 톱니바퀴와 다름없이 될 것이다.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의 법문과 법어가 중생들을 향하여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면 이를 어찌할 일인가?


설악은 나의 지붕이다 ―《나의 집.1》에서


바라만 보아도 눈부시다. ―《겨울 설악산》에서


산아 오늘 네게 못 가고
멀리서 바라만 보며
흔들리는 마음 가누지 못하고 있다. ―《산사랑》에서



산에 시를 두고 돌아왔네.

그는 한자루 피리와
시 한수로 떠돌았다. ―《못난 서정 시인》에서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써
당신에게 보냅니다. ―《가을 편지》에서



밤중 법당의 종소리가
이승을 흔든다.
대청에 앉아
달빛으로 마루를 닦던
조실 스님
나비가 되어
첩첩 산중 밤하늘로
푸드득
날아간다. ―《법당 마당》에서



잎이 떨어지자 한 칸씩 원고지처럼 하늘이 비어가자 그곳에 영혼의 잉크 물로 당신에게 편지를 띄운다는 내용이다. 잎이 떨어지자 원고지처럼 한 칸 두 칸 비어 가는 하늘/과 같이 묘사적 부분이 있어야 자연스럽겠으나 지나치게 의미를 띄어 관념적인 부분을 끌어들인 느낌을 준다.

지나치게 일차적인 상상력이므로 시인의 감상이 구태의연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따라서 "맑은 영혼의 잉크물"에 가서는 시적 감동의 저하로 나타나기도 한다. 《법당마당》에서는 종소리가 이승을 뒤흔드는 객관적 타당성이나 묘사가 생략되어 "조실스님/나비가 되어"에 가서는 거짓말이 심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푸드득"이라는 과장된 의성어에서 더욱 심화된다.


어느 산이 내 모자를 쓰고
구름 얹은 듯 앉아 있을까. ―《산에 시를 두고》에서


산을 바라보는 일은
산을 뛰어 넘는 일이다. ―《뿌리 없는 램프 하나》에서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이성선 시인의 시 몇 편을 통하여 언어적 쓰임의 특질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힘겨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시가 읽히기 시작하는 시기에 시들이 자국의 언어로서 재탄생(혹은 모방)되는 상태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근대시(혹은 현대시)로서 자리매김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언어미학적 측면에서 우리의 시문학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근원적으로 합당한 해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쓰임에는 효용적인 부분도 있다. 특히나 시어가 이야기로 인식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방과 이식의 편린들을 조합해서 그 결론적인 의미를 도출해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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