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교에 대한 소고/양왕용문학박사

2012.09.18 16:41

김영교 조회 수:348 추천:2

  필자는 2011년 11월 5일부터 2012년 1월 10일까지 큰 아들 내외가 있는 LA를 다녀왔다. 머무는 동안  LA를 중심으로 한 미국 서부지역 교포 문인들의 왕성한 활동을 접하고 필자는 진작부터 해외문인들의 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나, 앞으로 새로 쓰여질 한국문학사에는  해외 거주 교민들의 한국어 문학작품들도  한민족문학이라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편입되어야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 가운데 이민 1세대와 1.5세대의 여류시인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작품을  <미주시정신>, <미주시학>, <문학세계> 등의 최근호에서 읽고  그 일반적인 소감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주로 모국어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시작행위를 하고 있었으나, 오랜  미국체험에 의한 독특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었으며 1.5세대의 경우 국내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앞으로 미주시인들의 독특한 시작 행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볼 작정이다. 교민들에게 한인교회가 신앙뿐만 아니라 삶의 구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특히 개신교 문인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우선 2010년 4월  제5시집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서울, 서울문학 출판부)와  2011년 1월 신앙시집 『감사의 겉옷을 입고』(서울, 도서출판 말씀)를 연이어 발간한 김영교(1941-)시인의 작품세계와 최근의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김영교 시인은 경남 통영에서 출생하였으나 서울에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여 서울 사대부고를  나와 60년대 후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의 명문 사학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유학을 하다가 미국에 정착한 이민 1세대이다. 13년 동안 영주권을 얻지 못하여 친정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 못한 애한을 가지고 있다. 그가 최근에 엮은 제3수필집 『꽃구경』(2012.4 서울문학 출판부)에 의하면 두 번의 암투병을 이기고 나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경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국내의 문예지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고 수필 역시 국내의  계간지에 데뷔한 이래 미국과 한국의 문학상을 네 번이나 받았다. 한국의 현대시인협회,  이화여대동문문인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으로 국내문단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는 한 편, 미주시인협회 부이사장과 미주시학, 미주문협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두 번의 암을 극복한 건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창작교실을 지도하고 미주 언론에도 활발하게 기고하고 있다. 또한 미주문협이 운영하는 인테넷 사이트에  <김영교의 문학서재>를 열어 그 곳에도 왕성하게 작품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위와 같은 문단 경력보다 LA의 대표적인 한인교회인  나성영락교회 시무권사로 봉사하면서 교회의 각 종 문화선교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바이다. 그리고 청교도적 신앙과 양심을 가진 사업가 남편 사이에서 출생한 두 아들 가운데 큰 아들은 헌신적인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고, 암투병 과정에서 아름다운 고부간의 사랑을 나눈 90이 넘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행복한 크리스천 가정을 꾸미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

  김영교 시인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70세가 되면서  두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런데, 한 권은 시집이라 하였고 다른 한 권은 신앙시집이라고 하여 표면적으로 보면  그는 시와 신앙시를 분리하여 창작하는 시작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하게 분석하여 보면 그의 시작 태도는 시와 신앙이 통합된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우선 두 시집에서 어떻게 그 양상이 드러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꼭 필요한 크기의 날개만 달고
   세상을 날게 하소서
   온화한 웃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날게 하소서

   높이 올라 더 많이 보고
   멀리 날아 더 넓게 보며
   낮게 떠 정확하게 보는
   총명한 시력을 주소서

   때론 무서운 폭우
   날기에 힘든 어둠을 뚫고
   인내의 새벽녘
   비상하는 날개를 주소서
    
   내 삶의 계곡에는
   기쁨의 햇살
   감사의 바람 뿐
  
   오늘 하루도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
   당신의 하늘을 허락하소서

   -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전문

㈁ 잃어버린 노래 찾아
   새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

   놓아버린 시(詩)를 찾아
   새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

   감사의 겉옷 입고
   새 한 마리
   지금
   어디쯤 날고 있을까

   - <새 한 마리 날아가고 있다>전문

위의 두 작품 가운데 (ㄱ)은 시집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의 제목이 된 것이고,  (ㄴ)은 셋째 연 첫행 ‘감사의 겉옷을 입고’에서 신앙 시집 『감사의 겉 옷을 입고』의 제목을 따온 작품이다. 따라서 두 시집의 작품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주목할 점은 작품의 주도적 이미지 즉 작품 상징이 모두 ‘새’라는  점이다. ㈀의 경우 시적 화자는 ‘새’이다. ‘새’가 ‘당신’에게 기도하는 어조를 가진 작품인데, ‘새’와 ‘당신’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경우 김 시인이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새’는 바로 김 시인의 페로소나이다. 말하자면 김 시인 자신을 새로 상징한 것이다. 김 시인이 새를 빌어 소망하는 것이 다분히 기독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신앙적이며 김 시인의 신앙적 삶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연에서 ‘꼭 필요한 크기의 날개’만을 소망하는 것은 세속적인 욕심에 대하여 절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한 절제의 날개를 가진 새이지만 ‘온화한 웃음으로/사람들의 가슴을 날게 하소서’라는 두 행에서는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사랑의 실천을 표출한 것이다. 둘째 연은 시인으로서의 많은 체험과 그에 대한 시적 인식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점에서 신앙이나 기독교 세계관의 표출이라고 보기는 힘든 일반적인 소망이다. 그리고, 셋째 연은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달라는 소망의 표출이다. 이에 비하면 넷째 연은 삶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기쁨의 햇살’과 ‘감사의 바람’이라고 감각화한 점에서 보혜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연은 시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말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평범한 일상도 하나님의 섭리로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그의 신앙이 담겨져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이 시는 충분히 시와 신앙이 통합된 상상력에 의하여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신앙이라기 보다 지금까지 소홀히 한 시, 즉 시작행위를 찾아 나선 시인을 상징한 ‘새’에서 일종의 메타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 새와 ㈁의 새는 본질적으로 삶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의 새가 신앙 혹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새의 겉옷이 ‘감사’라는 신앙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점이다. 암투병의 과정을 극복하고 70이 넘은 생물학적 나이에도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확신하면서 그는 시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일상의 사물이나 사건들에서 김 시인의 신앙적 상상력이 시와 어떻게 통합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표보기로 한다.

㈀ 대추와 함께
   홍삼 달이는 일
   더위가 심해 멈췄다

   그때 마침 병문안 온 ‘샌 페드로 대추차’
   시음을 기다리는 웰빙의 저 진액

   대추 몇 접 응집해야 나올 섬유질 피
   모자라는 적혈구 수치를 체워 줄
   친구의 수고는 디베랴 호수
   가슴을 철석철석 파도친다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나를 위해 다 쏟은
   땀과 눈물과 피의 진액

   지금 여기
   일어나고 있는 내 안의 성찬식
   목이 메인다

   - <보은의 대추차>전문

㈁ 창 밖 쏟아지는 햇살 아래
   남향을 품고 자리 잡은
   장독대
   고요함이 목구멍까지 하얗다

   소란한 세상소리 가두고
   빗소리 바람소리 잠재워
   크고 작게 감싸안은 불룩한 사도의 모습

   가마 불길 껴안고 태우고 녹여 빚어진
   열림의 눈
   적요를 건너
   내림을 꽂혀
   빛으로 일어서는 장맛
   내음은 마을까지 번진다

   다채로운 당신의 장독대
   별빛 시린 내 영혼
   비워 더 낮게 엎드리는
   기도 항아리

   - <장독대 풍경>(『감사의 겉옷 입고』 수록) 전문

  ㈀은 시집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에 수록된 작품이고 ㈁은 신앙시집 『감사의 겉옷을 입고』에 수록된 작품이다. 그런데 ㈁의 경우는 같은 제목으로 유사한 작품이 시집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에 마지막 작품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아마 시집의 작품은 첫 작품이고 신앙시집의 작품이 그것을 개작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그런 면에서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 작품의 의도 파악이 훨씬 용이하다.
  ㈀은 첫째 연에서 대추와 함께 홍삼 달이는 일을 여름 더위 때문에 멈추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에서 시적 상상력이 출발한다. 그런데, 둘째 연에서는 그 때 친구가 병문안 오면서 ‘샌 페드로 대추차’를 가지고 온 일이 시로 형상화된다. 이 대추차에다 셋째 연부터 시적 상상력을 집중시킨다. 친구의 병문안 오면서 가져온 대추차의 섬유질 핏빛 원액은 모자라는 적혈구 수치를 채워줄 만큼 시인의 마음을 감사와 감격이 넘치게 만든다. 만약 이러한 일상사로만 이 시가 끝났다면 평범한 작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셋째 연에서 김 시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다 쏟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된다. 말하자면 핏빛 대추차 원액에서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희생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체감하는 신앙을 김 시인은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연에서 친구가 가져온 대추차를 마시는 행위는 또 하나의 성찬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사건들을 신앙적 상상력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시집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의 경우 역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장을 담아 장독대에 놓고 먹는 김 시인의 집안 풍경에서 시적 상상력은 발동한다. 이러한 전통을 간직한 것은 김 시인의 시어머니의 삶의 태도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아파트 생활이 일반화된 한국의 주택문화에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다. 이렇게 일상적인 상상력을 발동할 수 있는 시적 제재임에도 불구하고 김 시인은 장독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둘째 연처럼 세상의 온갖 비난과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오로지 말씀 전하는 사도, 그것도 어쩌면 바울 사도를 염두에 둔 사도의 모습으로 장독대의 항아리를 비유하고 있다. 셋째 연에서는 장독 항아리의 빚어지는 고난의 과장과 그 장독에 담가진 장맛 내음의 번짐을 사도의 복음전파 과정과 그 확산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넷째 연에서는 장독대 전체가 주님의 다채로운 모습이라면 내 즉 김 시인 자신의 영혼은 그 항아리 가운데 낮게 엎드려 있는 기도 항아리가 된다는 인식으로 시를 끝맺는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시집에 실려 있는 이 작품보다 시집 『새롭게 떠나는 작은 새』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에서 김 시인의 기도하는 자세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의 연구분으로 절제된 시어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시집의 작품은 연구분이 되어 있지 않고 차이가 많이 나는 다음과 같은 뒷 부분에서 이러한 의도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다채로운 당신의 장독대
   이민 하늘 별빛 시린 내 영혼
   낮게 엎드리는 항아리
   눈물로도 덜 구워져
   오늘 더 굽히는 무릎
   기도 항아리
   나

   - <장독대 풍경>(『새롭게 나는 작은 새』 수록) 끝부분

지금까지 살펴본 네 작품들로 볼 때 김 시인의 시는 시와 신앙시라고 해서 비유와 상징의 전개 과정을 통한 시의 형상화 방법에는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신앙이나 기독교적 세계관의 바탕위에 사물을 보며 시와 신앙이 통합된 상상력으로 시를 창작하고 있다. 이러한 시작 태도나 방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기도나 간구가 아닌 본격적인 시가 충분히 되고 있다. 이러한 시작의 원동력은 그가 비록 늦게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하여도 이민 생활의 어려움과 암 투병이라는 병마를, 그 자신의 표현처럼 ‘목수청년’ 예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한 특별한 체험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3)

2010과 2011년 시집 발간 이후 발표된 각 종 문예지와 그의 인터넷 「문학서재」의 작품을 중심으로 시와 신앙의 통합적 상상력이 얼마나 확산되고 더욱 견고해졌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단순하게 사는 일이 왜 힘들까? 나는

   산을 밀어 평지를 만드는 힘 없는데도
   일상의 잔뿌리 힘차게 뻗어나
   어느덧 복잡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주위 배경에 휘말리는 삶
   강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데
   나는 나다운 느낌과 의지대로 살고 싶은데

   하나를 가지려면 둘을 버리고
   둘을 가지려면 다 버리라고 한다
   버리지 못해 무겁고 거절하지 못해 바빠지는가

   집중도 몰입도 어려워지고
   시력도 흐려지고 결단도 흐려지고 일 처리도 흐려진다
   분명한 게 하나도 없다

   생각과 에너지가 흩어져 나는 널브러져 그만 약해지고 만다
   내가 ‘사람답게’ 살기는 더욱 더 힘들어진다
   그 힘에 붙어있는 문학의 잎사귀들

   그때 비로소 ‘나의 시’가 걸어 나온다
   옆의 나무와 얽히지 않는 단순한 가지 하나일 때
   햇빛을 받고 바람이 소통
   바로 이 때가 나는 잘 사는 때임을 눈치챘다

   단순하게 사는 그 때가 나다워지는 때이고
   바람에 거스리지 않고 물 흐르는 대로 흘러
   바로 우주와 하나가 되는 그 때가
   그 때임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하게 사는 일이> 전문 (<미주 시학> 2011년 봄호)

위의 작품은 시집 발간 이후의 시작 태도를 피력한 일종의 메타시라고 볼 수 있다.  LA이민 사회에서의 삶은 한인들이 많지 않은 다른 미주 지역에서의 삶에 비하여 복잡한 인간관계로 얽힐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김 시인은 이러한 복잡함 보다는 단순하게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살고 싶은 소망을 가로막는 것은 버리지 못함 때문이라고 셋째 연에서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넷째 연에서는 나이를 먹어 집중과 몰입도 어렵고 시력과 결단력도 흐려져서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괴감까지 가진다. 김시인이 소망하는 단순함은 그가 이룩하고자하는 ‘문학의 잎사귀’ 혹은 ‘나의 시’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그는 사람답게 살고, 생활이 단순하고 굵어야 그 힘에 붙어있는 문학의 잎사귀들이 무성하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나의 시’가 쓰여진다고 보고 있다. 일곱째 연에서는 단순해야 시가 창작된다는 것에 대해서 부연하고 있다.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아야 햇빛도 잘받고 바람이 잘 소통되 나무의 자람도 훨씬 건강해 진다는 자연의 섭리까지 등장시킨다. 물론 이 작품에서 단순한 삶과 신앙적 삶의 공통점이나 지향점이 동일하다는 주장까지는 이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궁극적인 관심에 몰두하면 세상의 잡다한 관심들은 끊어지는 법이다. 바람에 거스르지 않고 물흐르듯이 순리대로 살면서 우주와 하나되는 삶이 바로 나다워지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데 그는 오로지 하나님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바로 그 길이라는 점을 이 시 속에서는 고도의 상징적 의미로 감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ㄱ) 터질 듯 답답한 가슴
    어두움에 들켜
    남몰래 울고 있다

    물새들 떠난 빈자리
    바람이 비를 몰고 와
    소리내어 바닥을 치며 울고 있다
    더 부추기는 저
    난타

    시퍼렇게 멍이 들대로 들어
    이제는
    쉰 목소리로 피울음을 울어댄다

    산기 있는 산모는
    출산의 고통을 파대 기치며
    산더미 높이의 숨 멎는 요동
    돌아보지 않으려 구부리다
    휘인 등뼈의 해안선
    겨울 바다에 가면
    이를 악물고 무섭게 덮친 적막을 만난다

    지구가 한 방향으로 쏟아지면서
    칠흑에서 터뜨린 양수
    분만의 감격

    아, 온 천지를 흔들고 있다

       -<겨울 바다> 전문 (<미주시정신> 2011년 여름호)

(ㄴ) 옷 다 벗은 나무는 춥다
   알몸으로 하늘을 받쳐 이고
   뻗은 가지마다 불끈 진 주먹

   내공(內功)이 남달라
   땅, 하늘과 소통
   초록 힘 사방에서 불러온다

   무거운 구름 쏟아지면
   맨살은
   거구로가 없는 비에 기대어
   한없이 낮게 엎드릴 줄 알아
   마냥 젖어들고 또 젖어들어

   껍질 남루할수록
   나이테 호흡이
   우주 혈맥일 줄
   겉으로 내색 않는 저 느긋한 심성

   휘몰아치는 낯설음의 바람
   가파른 이민 언덕의 겨울 나무
   흔들리면서도 의연하여
   새롭게 접목하는 뿌리
   다주어 가득 차지하는

   봄 볕 한 줌

      -<넘  보지 마라 겨울 나무를> 전문  ( <미주시학> 2012년 여름호)
  
위의 두 작픔들은 제목이나 시적 공간에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 인용한 시집들의 작품이나, 바로 앞에서 인용한 메타시 <단순하게 사는 일이> 등의 작품에 비하여 절제된 어조와 축약된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말하자면,  ‘단순함의 시학’을 실천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신앙고백이 드러나지 않는 점도 또다른 특색이다. 따라서 신앙적 상상력이나 기독교적 세계관은 보다 더 정치한 분석이나 해석으로 찾아볼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ㄱ)에서는 ‘겨울바다’를 찾아간 체험을 다분히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겨울바다는 우리나라의 겨울바다가 아니라 캘리포니아 태평양 연안의 겨울바다이기 때문에 한국의 겨울바다처럼 매섭게 추운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겨울바다 그것도 어두움이 다가오는 휘인 등뼈처럼 굽은 해안선의 겨울바다에 서 있다. 분명히 김시인 자신의 체험에서 착상된 작품일 것인데, 시적 화자가 김시인 그 자신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전혀없다. 그만큼 시가 객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겨울바다가 예사롭지 않다. ‘남몰래 울고 있다’고 끝맺음하는 첫째 연이나, 둘째연의 전체적 분위기는 다분히 슬픔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감각적으로 볼 때에는 역동적 이미지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다가 셋째연에서 파도소리를 ‘시퍼렇게 멍이 든 쉰 목소리로 피울움’을 토하고 있다고 보아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어조에 다다른다. 원래 ‘겨울’의 상징성은 죽음이나 절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한다. 그러나 넷째 연에서 바다의 파도치는 모양을 산모의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면서 이러한 보편적 상징성을 벗어날 예감을 보여준다. 그러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휘인 등뼈의 해안선’의 겨울바다에 가서 만나는 것은 ‘이를 악물고 덮친 적막’이다. 이렇게 절망보다 더한 적막은 다섯째 연에서 ‘칠흑에서 터뜨린 양수’가 쏟아지면서 분만의 감격을 누림으로써 급격하게 반전한다. 말하자면 겨울 바다의 파도의 울음과 칠흑같은 적막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전주곡인 셈이다. 그래서 마지막 연 ‘아 온 천지는 흔들고 있다’는 결코 절망의 이미지가 아니라 위대한 탄생을 알리는 희망의 이미지가 된다. 겨울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상징한 것이지만 이 작품 속에서의 ‘겨울’은 새로운 탄생, 어쩌면 죽은 이후의 부활을 상징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적막한 겨울 바다에서의 탄생과 부활을 생각한 것은 바로 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상상력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그의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겨울 바다’에서도 새로운 탄생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ㄴ)의 경우는 ‘겨울 나무’를 시적 제재로 삼고 있다. 제목 속에는 ‘겨울 나무’에 대한 시인의 의도를 ‘넘보지 마라’고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겨울 나무’의 내포 즉 상징성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결코 안락하거나 쾌적하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까닭 역시 ‘겨울’이라는 계절의 상징성이 절망이거나 죽음 혹은 고난과 시련이라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나무의 시련보다 강인한 점과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가 시적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이 김 시인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연의 첫 행에서 우선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 나무에서 추위를 느끼면서 시는 출발한다. 그러나, 둘째 행과 셋째 행에서 겨울나무가 하늘을 받쳐이고 있다고 인식한 점이나 뻗은 가지를 불끈지고 있는 주먹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서 ‘겨울 나무’의 강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둘째연에서는 내공이 남달라 땅 하늘과 소통하고 봄과 여름의 잎새들의 색깔인 초록 등을 불러온다고 겨울나무를 의인화 시켜 소통과 통합의 달인으로 비유하게 된다.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잦은 비에는 낮게 엎드릴 줄 알아 시련을 이기고 비록 껍질이 남루 할수록 더욱 느긋한 심성을 갖게 된다고 의인화 시킨다. 이상과 같이 이 작품에서 ‘겨울 나무’가 단순한 겨울 나무가 아니고 그 동안 전개한 의인화 현상처럼 사람으로 비유할 여지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첫행에서의  ‘휘몰아치는 낯설음과 바람’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교포를 포함한 미국 사회에 바람직하게 정착하는 외국인들을 겨울나무로 비유한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물론 이러한 이민들을 비유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 부분으로 인하여 이 시에서의 겨울나무의 내포는 분명히 이민 생활의 어려움에서 그것을 굳건하게 극복한 미주 한인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이 시의 약점이 될 수 있겠으나, 미국 특히 LA와 같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는 이민 온 사람들을 겨울 나무처럼 대단한 각오가 없이는 뿌리 내리기 힘들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비유이다. 이 작품 역시 한행 뿐인 마지막 여섯째 행  ‘봄 볕 한 줌’ 에서는 겨울 나무를 상식적인 상징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러한 ‘봄 볕 한 줌’으로 인하여 겨울 나무는 절망과 죽음이 아니라 봄이 오면 초록 이파리로 다시 부활하는 희망과 소생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 점 역시 김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 즉 부활신앙에 근거한 상상력의 전개라 볼 수 있다.

       (4)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신앙과 시의 통합이 고도의 상징적 기법을 통하여 형상화된 시들이다. 그렇다고해서 김 시인은 이러한 시들만 계속 창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종 신앙적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사물들과 예수님의 탄생과 같은 사건을 형상화 한다. 그 가운데 다음의 두 작품이 대표적인 것이다.

(ㄱ) 가진 것이라곤
    여린 불빛 한줄기

    바람 한 가닥에 사그라지는
    나약한 모습
    제 몸 태워서 흐르는 아픈 밝음으로
    빛 심지 세우면
    펼쳐지는 가시(可視)의 세상

    갈한 깜빡임은
    가상(架像)의 초심(初心) 다시 타올라
    흐느끼며 마셔버리는
    절정의 한 목금 헌화(獻火)

    눈 뜨자마자
    가 닿는 묵시의 트임
    깊고 어두운 각질 사라져
    직행의 환한 뻗음이 세상을 건진다.
    나를 건진다.
    참아서, 참아서 녹아내리는 그리움에서
          
        -<그리움의 촛불 하나> 전문  (<해외문학> 2012년 16호)

(ㄴ) 빛이 짓밟힌 땅위에는
    밤이 흥청댄다

    12월에는
    땅은 소음과 합세
    반란을 일으키곤

    별 마저 얼어 붙어 아득한 거리
    고요한 어둠에 원군을 청해도 들리지 않는다

    이미 자리를 떠난 성좌들
    어지러운 흔들림에 숨막히는 움직임
    겨울바람과 어울려 광란의 춤을 춘다

    땅의 밤을 뭉갠다, 평화롭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위해
    아기 하나가.

       -<땅 위의 밤> 전문 (http://home,mijumunhak.com/kim youngkyo)

(ㄱ)은 윤동주(1917~1945) 이래 많은 크리스쳔 시인들이 시적 제재를 사용한 ‘초’를 제재로 한 작품이다. 이 시 역시 앞의 다른 시들처럼 절망에서 마지막에 반전하는 의미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의 화자는 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시 밖에서 관찰하거나 인식하는 의미 구조와 어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첫째 연에서 ‘초’는 그야말로 나약한 빛 한 줄기에 지나지 않는데, 그 나약함은 둘째 연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러나 초의 희생으로 가시의 세상이 전개된다. 이러한 현상적 인식에서 벗어나 꺼져가는 촛불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형상을 생각하며 그 불꽃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절정의 한 모금 헌화’로 인식하여 시 밖의 관찰자로서의 화자인 시인 자신의 신앙을 담금질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한 담금질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희생으로 내가 구원 받았다는 확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어두움이 사라진 환하고 밝은 것으로 바꾸게 할 예수님의 능력까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다른 시인의 경우 대부분 관념적이다. 그러나 김시인은 초가 녹아버리는 것을 그리움으로 비유하여 다분히 정서적으로 끝맺음을 한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상투성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ㄴ)의 시는 2011년 12월 1일 인터넷 사이트 미주문학 홈페이지 <<김영교의 문학서재>>에 올린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촛불’이라는 사물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희생과 그에 대한 신앙고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하여, 이 작품은 아기예수 탄생이라는 4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사건이 직접 제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먼저 전개되는 것은 아기예수 탄생보다 12월의 땅위의 밤 풍경이다. 12월의 밤은 세계 어느 곳이나 한 해가 가는 마지막 달이라는 점에서 소란과 흥청댐으로 충만하게 된다. 특히 미국 LA와 같은 대도시는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트리가 점화되고 크리스마스 축제 그 자체가 거대한 이벤트가 되어 각종 상품이 구매자들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란스러움은 인류의 구원자로서 아기예수 탄생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세속적이고 인간의 욕망을 발산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땅위의 밤’은 그 아무리 흥청댄다고 인류를 원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명제 앞에서는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강보에 쌓인 채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예수에 의하여 무참히 뭉게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지극히 감정이 절제된 어조로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첫째 연부터 넷째 연까지는 ‘땅위의 밤’ 그것도 광란의 밤을 형상화하다가 마지막 다섯째 연에서 ‘거룩한 밤’에 의하여 땅위의 밤은 뭉개어진다는 극적 반전의 의미 구조를 가진다.

       (5)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영교 시인의 시는 신앙 즉 궁극적 관심이 사물로 상징화 된 작품이나 다소 노출된 작품을 불문하고 절제된 어조와 응축된 시어 그리고 극적으로 반전하는 의미 구조의 시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그의 ‘단순함의 시학’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으로 이러한 작품들로 또 한권의 시집이 엮어진다면 우리는 한국 기독교시문학사에서 보기 드믄 시와 신앙이 통합된 상상력의 시인을 가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70세가 넘었지만 역동적 어조와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된 시를 쓰는 시인을 가졌다는 보람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동적 어조와 감각적 이미지가 단순한 사물과 사건의 제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김 시인의 원숙한 신앙고백이 상징적으로 들어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시편들이라는 점도 깨닫게 될 것이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5
어제:
9
전체:
647,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