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의 역사(계속)

2007.02.08 08:31

김영교 조회 수:592 추천:32

(1) 고전수필 한문수필은 고려에서 조선말에 이르는 한문으로 된 모든 수필류를 말하는 것으로 방대한 양을 이루고 있다. 대개의 경우 한문학에서는 잡기(雜記)나 필기(筆記) 등의 기(記), 야록(野錄)이나 쇄록(鎖錄) 등의 녹(錄), 전문(傳聞)이나 야문(野聞)의 문(聞), 총화(叢話)·야화(野話) 등의 화(話), 쇄담(鎖談)·야담(野談) 등의 담(談), 수필(隨筆)·만필(漫筆) 등의 필(筆)의 문장이 수필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한문수필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권4에 언급되어 있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 破閑集≫,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閒話滑稽傳≫·≪필원잡기 筆苑雜記≫, 최보(崔溥)의 〈표류기 漂流記〉 등 18종뿐 아니라 이밖에도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 詩話叢林≫ 등 많은 문헌들에서 산견(散見)되는 수필들을 포함한다. 물론, 이 중에는 비평이나 소설적인 것들도 많아 일률적으로 수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들 중 수필적 성격의 문장들을 총괄하여 한문수필이라고 한다. 한문수필은 이제현이 ≪역옹패설≫ 서문에서 말한 대로 낙수를 벼룻물로 삼아 한가한 마음으로 수의수필(隨意隨筆)하여 울적한 회포를 풀거나, 닥치는 대로 적은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평적인 것과 설화적인 것이 혼재해 있으나 대체로 수필적인 것이 매우 많다. 고려시대에는 ≪역옹패설≫을 비롯하여 ≪백운소설 白雲小說≫·≪파한집≫·≪보한집 補閑集≫ 등의 문집이 있으며, 그 중 기행수필인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월일기 南行月日記〉와 울지 않는 닭에 의탁하여 인사(人事)를 풍자한 김부식(金富軾)의 〈아계부 啞鷄賦〉 등이 유명하다. 조선시대에 와서 한문수필은 크게 융성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 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村談解蓬≫,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弁齋叢話≫, 최보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 김정(金淨)의 ≪제주풍토기 濟州風土記≫, 그리고 임진왜란 후에는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 懲毖錄≫,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 등 여러 양상의 수필이 나온다. 그 중에서 ≪열하일기≫는 북학파(北學派)의 거성인 박지원이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중국에 들어가 여행한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문수필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특히, 1780년(정조 4)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압록강을 건너 요양(遼陽)으로 가는 15일간의 견문·풍속 등을 실은 〈도강록 渡江錄〉과,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562리에 걸친 여행을 기록하면서 ‘북진묘기(北鎭廟記)’·‘거제(車制)’·‘희대(喜臺)’·‘점사(店舍)’·‘교량(橋梁)’ 등 짤막한 글을 수록하고 있는 〈일신수필〉이 유명하다. 그밖에도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 西浦漫筆≫, 고증적인 수필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星湖塞說≫, 보고 들은 것을 단편적으로 기술한 안정복(安鼎福)의 ≪잡동산이 雜同散異≫, 인문지리지이면서 당시 인심의 기미를 담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擇里志≫ 등 여러 양상의 수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한문수필들은 관조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시인이나 묵객 등이 그들의 사상과 생활 감정을 여러 형태로 담은 것으로서, 비평적이면서도 해학과 풍자를 보여준다. 국문수필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주로 여인들에 의해 쓰여진 수필이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운문(韻文)이 성했으나 서민문학이 흥성해진 이후에는 주로 여인들에 의해 기행문이나 일기문 형식의 국문수필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국문수필은 궁정수필(宮廷隨筆)·기행수필(紀行隨筆)·의인체수필(擬人體隨筆)로 나누어진다. 궁중수필은 궁중에서 생활하던 여인들에 의해 쓰여진 수필로, 국문수필 중 그 분량이 가장 많고 또한 뛰어난 작품도 많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던 실상을 나인들이 기록한 〈계축일기 癸丑日記〉,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등극 등 궁중 생활을 기록한 〈한중록 恨中錄〉과 같은 것은 우아한 용어와 여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감정의 기미를 그리고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의 군사·정치 생활을 기록한 〈산성일기 山城日記〉, 사도세자의 참변을 그린 〈혜빈궁일기 惠賓宮日記〉 등도 섬세한 필치의 궁중수필이다. 기행수필로는 1776년(영조 52)에 박창수(朴昌壽)가 지은 〈남정일기 南征日記〉, 이희평(李羲平)이 1795년(정조 19)에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맞아 수원의 장헌세자 능에 참배하고 그 광경을 그린 〈화성일기 華城日記〉 등이 있다. 김창업(金昌業)이 1713년(숙종 39) 청나라에 사행(使行)하고 그곳 견문을 기록한 ≪연행일기 燕行日記≫, 그리고 정조 때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 戊午燕行錄〉 등도 있다. 이 기행수필 중 뛰어난 것으로서 ≪의유당관북유람일기 意幽堂關北遊覽日記≫가 있다. 이 작품은 함흥판관 신대손(申大孫)의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가 쓴 것으로, 그 중 특히 일출광경과 월출광경이 묘사되어 있는 〈동명일기〉가 뛰어나서 기행수필의 백미로 꼽힌다. 한편, 의인체수필로는 순조 때 유씨 부인이 바늘을 부러뜨리고 애도하는 심정을 제문형식으로 쓴 〈조침문 吊針文〉과, 일곱 가지 침선도구(針線道具)를 희화적인 대화로 쓴 〈규중칠우쟁공기 閨中七友爭攻記〉가 유명하다. 이밖에도 숙종 때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 스님과 양반의 유희적 문답을 쓴 〈양인문답 兩人問答〉, 일장의 꿈을 그려 한량(閑良)을 풍자한 〈관활량의 꿈〉 등은 해학적인 내용으로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 기타 서찰양식(書札樣式)도 많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국문수필은 다양하면서도 섬세한 생활감정이 잘 드러나고 있으나, 단순한 기록이나 사실적인 서술이 대부분이어서 본격수필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2) 근대수필 근대수필은 처음에는 기행적인 수필로 출발하여 수상적 수필과 병행하다가, 1930년대에 와서야 산문문학의 한 장르로서 본격적인 수필로 형성된다. 본격적인 수필은 주로 한문수필과 국문수필로 이루어진 고전수필의 기행적 성격을 계승하고, 서구수필의 개성적인 시각을 수용하여 이원적(二元的) 근저에서 출발한다. 기행가사와 국문수필에서 계승된, 산수를 즐기고 기리는 기행적 수필과, 생활의 통찰이나 내적 세계의 성찰을 주로 하는 수상적 수필의 두 경향이 1920년대에는 상호 견인하면서 병행하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필이 형성된다. 이것은 1895년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 태동하여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의 기행적 수필, 박종화(朴鍾和)·변영로(卞榮魯) 등의 단상(斷想)·상화(想華)·만필(漫筆)과 같은 명칭으로 일컫던 수상적 수필이 병립(竝立), 상충(相衝)하면서도 본격적인 수필의 기초가 되고 있다. 물론, 1910년대 ≪학지광 學之光≫(1914)이나 ≪태서문예신보 泰西文藝新報≫(1918) 등에 발표된 일련의 수필이 근대수필을 태동시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근대수필은 1910년대의 태동기, 1920년대의 병립·상충기, 1930년대의 형성기, 1940년대의 침체기로 나뉘며, 1950년대 이후 전후문학(戰後文學)에 이르러 현대수필의 단계로 넘어간다. ① 1910년대의 수필 : ≪학지광≫에 선보인 최승구(崔承九)의 〈남조선의 신부〉(1914), 나혜석(羅惠錫)의 〈이상적 부인〉(1919) 등은 근대수필의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붓 가는 대로 쓰면서도 완결과 통일미를 갖춘 개성적인 수필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기행 소감이나 단상의 양상을 띠어 근대수필의 초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최남선의 〈반순성기 半巡城記〉(소년, 1909.8.)나 〈평양행 平壤行〉(소년, 1909.10.), ≪청춘 靑春≫ 7호에 발표된 한샘의 〈동경 가는 길〉(1917.5.) 등은 기행수필의 양상을 띠고, ≪학지광≫에 발표된 최승구의 〈남조선의 신부〉, 전영택(田榮澤)의 〈독어록 獨語錄〉(1916), 나혜석의 〈잡감 雜感〉(1917. 4.), 이광수의 〈천재야, 천재야〉(1917.4.), ≪태서문예신보≫에 발표된 이일 (李一)의 〈만추(晩秋)의 적막〉(1918.11.)·〈고독의 비애〉(1918.12.) 등은 수상수필의 양상을 띤다. 이들 수필은 기행의 소감과 거기에 서린 역사의 시각, 그리고 내성적인 성찰이 많아 문인들의 자아각성에 의한 새로운 문화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격동기를 살아가는 시각이 생활주변과 자아에 대한 내향적 성찰로 변이하고 있음을 말한다. 최남선이 근대적 잡지인 ≪소년≫이나 ≪청춘≫을 펴내면서도 비교적 기행수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반면, 다른 작가들은 일본에 의해 중개된 서구의 자아의식을 수용하여, 사물과 자아를 투시하고 성찰하는 새로운 양식의 수상적 수필을 보여준다. 그러나 1910년대의 이러한 수필의 태동은 시나 소설에 비해 그 의식이 투철하지 못하여 수필이라는 장르를 확고하게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시는 최남선·최소월(崔素月), 소설은 이광수·현상윤(玄相允) 등 그 장르의 작가가 뚜렷이 나타나는 데 비해, 수필은 뚜렷이 내세울 수 있는 작가가 없이 누구나 붓을 들어보는 비장르적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왜소한 기행적 수필이나 양적으로 많은 수상적 수필 등은 1920년대의 정립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② 1920년대의 수필 : 근대수필의 형성기인 1920년대의 수필문학은 수필 장르의 정립, 그리고 기행수필과 수상수필의 병립 양상으로 나타난다. 1920년대에 발표된 수필적인 문장으로는 ‘기행’이라는 장르 명칭으로 김환(金煥)이 쓴 〈고향의 길〉(창조 2, 1919), 남궁벽(南宮璧)의 ‘오산편신(五山片信)’〈자연〉(폐허 1, 1920), 박종화의 ‘감상(感想)’〈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 (백조 1, 1922), 이광수가 쓴 ‘상화(想華)’〈감사(感謝)와 사죄(謝罪)〉(백조 3, 1922), 주요한(朱耀翰)이 쓴 ‘감상수필’〈어렸을 때 본 책〉(조선문단 18, 1927) 등이 있어 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명명됨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에 ‘수필(隨筆)’이라는 명칭이 보이며, ≪동광 東光≫에 이르러 그 명칭이 굳어진다. 이렇게 수필이 여러 명칭으로 불린 것은 수필 양식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혼동된 양상이며, 후반기에 수필이라는 명칭으로 포용된 것은 수필 양식이 형성, 정착되어감을 의미한다. ≪조선문단≫ 18(1927.1.)의 ‘수필감상’란에 주요한·방인근(方仁根)·김억(金億)·최상덕(崔象德) 등 11명의 수필이 실려 있음은 그러한 정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1920년대의 수필양식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선문단≫과 ≪동광≫이다. ≪조선문단≫은 시(노래)·소설 (창작)란과 더불어 수필란을 정하여 고정시켰고, ≪동광≫은 종합지이면서도 매월 대여섯 편의 수필을 발표하여 수필문학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광수의 〈의기론 義氣論〉·〈우덕송 牛德頌〉 등 문학적 향취가 서린 본격적인 수필도 여기에 발표된 것이다. 생활과 인생에 대한 통찰과 달관으로 개성적 성찰을 보이는 수상수필은 1920년대 수필의 한 경향을 이룬다. 오상순(吳相淳)의 〈시대고(時代苦)와 그 희생 (犧牲)〉(폐허 1, 1920)에서는 시대상황을 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광수의 〈우덕송〉에는 덕을 지향하는 의미가 아로새겨져 있고, 최학송(崔鶴松)의 〈그리운 어릴 때〉에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동심이 그려져 있다. 또한, 염상섭(廉想涉)의 〈국화(菊花)와 앵화(櫻花)〉(조선문단 16, 1925)에는 꽃의 의미로써 망국민의 심경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수필의 또 다른 경향은 최남선과 이광수에 의한 기행수필이다. ≪서유견문≫과 그 맥락이 이어지는 이 기행수필은 산수를 즐기며 거기에 묻힌 역사와 민족혼을 찾으려는 시도로서, 도도히 흐르는 대하(大河)와 같은 작품으로 나타난다. 이미 〈남유잡감 南遊雜感〉(청춘 14, 1918)을 발표했던 이광수가 금강산의 수려한 산수와 그 유적에 깃들인 인생과 역사를 점철한 〈금강산유기 金剛山遊記〉(1925), 이미 〈반순성기〉를 썼던 최남선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옛날 마한인(馬韓人)을 주로 한 백제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 쓴 〈심춘순례 尋春巡禮〉(1926)와, 백두산을 찾아 역사적인 안목으로 개인적인 심정이나 사적(史的) 정황을 그린 〈백두산참관기 白頭山參觀記〉(1927) 등은 기행수필의 3대 백미를 이룬다. 이러한 기행수필은 그 뒤 ≪기행 지리산≫(조선일보사, 1937)·≪산(山)찾아 물따라≫(박영사, 1966)의 이은상(李殷相)에 와서 더 세련되어진다. 이와 같은 1920년대의 수상수필과 기행수필은 병존하면서 193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수필문학으로 정착하게 된다. ③ 1930년대 이후의 수필 : 1930년대에 오면 문학적 수필이 발표되고, 수필이론이 정립되어 본격 수필문학의 시대로 들어간다. 또한, 수필문학 전문지인 ≪박문 博文≫이 나오고 ≪문장 文章≫·≪인문평론 人文評論≫ 등에 수필 고정란이 설정되어 수필의 발표 광장이 많이 마련된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수필의 이론적 추구, 개인적 수필과 사회적 수필이라는 본격적인 수필유형의 형성, 그리고 발표 무대의 확장 등과 더불어 근대수필의 성숙을 이루게 된다. 먼저, 수필론의 정립은 외국 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 의해 추구된다. 김기림(金起林)은 〈수필을 위하여〉(신동아, 1933.9.)에서 수필의 문학성과 그 영역을 추구하고, 김광섭(金珖燮)은 〈수필문학소고 隨筆文學小考〉(문학 창간호, 1934)에서 수필의 형식과 그 표현에 대한 이론을 모색하며, 김진섭의 〈수필의 문학적 영역〉(동아일보, 1939)에 이르면 비로소 문학 양식으로서의 수필론이 정립된다. 1930년대는 이렇게 수필론의 정립으로 그 지향성이 마련되고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어 그 성숙기를 맞는다. 그것은 1935년 ≪조광 朝光≫이 속간되고, ≪박문≫·≪문장≫·≪인문평론≫ 등 수필의 발표 무대가 마련되고, 이병기(李秉岐)·김진섭·이양하·정내동(丁來東)·고유섭(高裕燮)·고형곤(高亨坤)·이상(李箱)·이효석(李孝石)·이희승 등 많은 작가들이 의욕적으로 수필을 발표한 결과로 이루어진 현상이다. 우선 양적으로 볼 때 ≪동광≫에 100편, ≪조광≫에 450편, ≪박문≫에 130편, ≪문장≫에 260편, ≪인문평론≫에 50편 등 도합 990편으로 거의 1,000편의 수필이 발표된다. 또한, 질적으로도 김진섭의 〈인생예찬 人生禮讚〉·〈교양 (敎養)의 문학(文學)〉, 이양하의 〈신록예찬 新綠禮讚〉, 이광수의 〈산거기 山居記〉(문장, 1939.7.), 이희승의 〈청추수제 淸秋數題〉, 이효석의 〈청포도의 사상〉(조선일보, 1936.9.), 이상의 〈권태 倦怠〉 등 뛰어난 수필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이러한 본격적인 수필은 수필문학의 두 양상인 개인적 수필과 사회적 수필의 유형을 형성하게 한다. 개인적 수필로서는 이양하의 〈신록예찬〉·〈조그마한 기쁨〉, 이효석의 〈사온일 四溫日〉·〈화초〉, 피천득의 ≪금아문선 琴兒文選≫의 수필, 노자영(盧子泳)의 〈산사일기 山寺日記〉, 김유정(金裕貞)의 〈그믐달〉 등이 있는데, 대체로 직관적·관조적이며 자연과 인생을 투시하고 그에 몰입하는 경향을 띤다. 사회적 수필로는 김진섭의 〈인생철학〉과 〈주부송 主婦頌〉, 이상의 〈권태〉, 고유섭의 〈고려청자〉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체로 깊은 성찰이나 진리를 단언적으로 표현하여 본격적인 수필의 또 하나의 경향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두 유형으로 나누어 전개된 본격적인 수필은 이광수의 〈인생의 향기〉와 이은상의 〈무상 無常〉과 같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또한 김진섭의 〈생활인의 철학〉이나 이상의 〈권태〉와 같은 사색의 앙금을 보이기도 하며, 김유정의 〈그믐달〉이나 이희승의 〈청추수제〉처럼 싱그러운 감상이 담겨 있어, 시나 소설과 더불어 1930년대 문학을 성숙하게 한다. 그러나 1940년대는 민족항일기 말의 국어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신문·잡지들이 폐간되면서, 시나 소설처럼 수필도 침체현상을 보이게 된다. 또한, 광복 직후에도 남북 대립과 민족문학 모색의 혼란 속에서 수필은 새로운 변모를 가져오지 못한 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이미 발표한 수필들을 정리하면서, 박종화의 ≪청태집 靑苔集≫(1942), 이광수의 ≪돌베개≫(1948), 김진섭의 ≪인생예찬≫(1947), 이양하의 ≪이양하수필집≫(1947) 등이 간행된다. 이밖에 마해송(馬海松)의 ≪편편상≫(1948)·≪속편편상≫(1949) 속의 날카로운 감각,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 檀君聖跡巡禮≫(1948) 속의 민족의식의 심화 등이 이 시기에 주목된다. 이처럼 근대수필은 태동과 정립·성숙·침체기를 지나 1950년대의 새로운 변모를 지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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