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 피천득

2012.02.01 17:05

김영교 조회 수:466 추천:3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 경험의 표현이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어 그 내용의 농도가 진하다.

짧은 시간에 우리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눈을 통하여 인생의 다양한 면을 맛볼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으면서 침통한 비극을 체험할 수도 있다. 문학은 작가의 인격을 반향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을 통하여 위대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의 친구다. 같은 높은 생각을 가져볼 수도 있고 순진한 정서를 같이할 수도 있다. 외우 치옹의 말같이 상실했던 자기의 본성을 되찾기도 한다. 고전을 읽는 그 동안이라도 저속한 현실에서 해탈되어 승화된 감정을 갖게 된다.

사상이나 표현 기교에는 시대에 따라 변천이 있으나 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정이다. 그 속에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자연적인 슬픔, 상실, 고통’을 달래주는 연민의 정이 흐르고 있다.

가문의 자랑도
권세의 호강도
미와 부가 가져다 준 모든 것들이
다 같이 피치 못할 시각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길은 무덤으로만 뻗어 있다.
대양의 어둡고 깊은 동굴은
순결하고 맑은 보석을 지니고
많은 꽃들이 숨어서 피었다가는
그 향기를 황야 바람에 말려버린다.

토머스 그레이의 이 <촌락묘지에서 쓴 만가>는 얼마나 소박한 농부들의 심금을 울리고 얼마나 많은 위안을 주어왔을까. 영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이 시는 또 얼마나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해왔을까. 어떤 학자의 말같이 같은 언어로 엘레지를 배우면서 자란 영국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1차대전에서도, 2차대전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의 적과 싸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느니
           사랑을 하고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낫다.

테니슨이 그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시구는 긴 세월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물을 씻어주었을까.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이 2행의 시구는 (한시)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많은 선비에게 긍지와 위안을 주어왔을 것이다.

문학에 정의 극치는 아무래도 연정이라 하겠다.

           다른 이들 나의 님 되어 오다.
           너 굳은 맹세를 저바림이라
           허나 내 죽음을 들여다볼 때
           잠의 높은 고개를 올라갈 때
           술에 취했을 때
           갑자기 너의 얼굴 마주친다.

W.B. 에이츠는 모드 곤에게 배반을 당했다.'유럽의 미인’이란 예찬을 받는 재기발랄하고 용감한 여자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이츠에게 사랑을 주어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매시지를 보내왔다. 다른 사람이란 애란 독립운동 투사인 한 젊은 장교였다. 예이츠가 그 편지의 겉봉을 찢을 때 그의 생애는 두 토막 났다고 한다.

황진이, 그는 모드 곤보다도 더 멋진 여성이요 탁월한 시인이었다. 나의 구원의 여상이기도 한다. 그는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동짓달 기나긴 반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밤이여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진이는 여기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다시 그 공간을 시간으로 환원시킨다. 구상과 추상이, 유한과 무한이 일원화되어 있다. 그 정서의 애틋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수법이야말로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154수 중에는 이에 따를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마 어느 문학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 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다.

바이런의 소네트가 아니라면 쉬옹의 감옥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것이요, 수십 년 전에 내가 크레인의 시 <다리>를 읽지 않았던들 작년에 본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가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보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개는 그렇게 좋아해도 고양이는 싫어하였다. 그러던 내가 이장희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를 읽은 뒤로는 고양이이게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얼마 전 <신한국문학전집>에서 지용의 향수를 반갑게 다시 보고 오래 잊었던 향수가 새로워졌다. 제가 식어진 질화로와 엷은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돋아 괴시는 짚베개가 그리워졌다. 사실 나는 질화로가 하나 갖고 싶어서 지금 구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는 밀레의 그림에서 보는 여인상이다.

<향수>에 이어 생각나는 노천명의 <고향>.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이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어라.

장연이 고향인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혼이 있어 고향에 돌아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리라.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직 미모를 잃지 않은 중년부인이 그가 처녀시절에 가졌던 수첩 속에서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들을 발견한다. 그가 춤을 약속했던 파트너들, 여인은 그 이름들을 찾아 한가한 여행을 떠난다. 지금 나는 그런 순례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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