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여, 잘있거라 / 어네스트 헤밍웨이

2012.02.28 09:26

김영교 조회 수:596 추천:9

마초여! 잘있거라
9 김창현      
글쎄, 헤밍웨이를 진정한 의미의 마초라고 부를수 있을까?
1960년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키자 쿠바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아이다호의
케첨에 정착한지 1년. 메이요 크리닉에서 받은 두차례의 전기쇼크요법도 허사 였던가.
귀가한지 이틀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빨간색 가운을 걸치고 햇빛이 쨍쨍하게 내려쪼이는
현관으로 나가 엽총구를 물고 방아쇠를 당겨 62년의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이때 모린 다우드가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의 제목이 <마초여! 잘있거라.>

미국 마초는 이렇게 살아야 되는건가?

나는 항상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읽은 헤밍웨이의 일생은 배신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었다. 그를 도와주거나 키워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배신이란 선물을 안기고
돌아섰다는게 내가 가진 편견이다.
나는 항상 그런 의문을 갖고 그의 작품이나 행적을 더듬어 왔다.
심리학용어로 마초란 뜻은 남성우월주의자를 일컫는 용어라지만 원래 스페인어의
뜻은 “남자” 혹은 “남성 스러움”을 의미 하지 않을까?.
어깨넘으로 영문학을 좀 들여다 보고 몇몇 과목은 대학다닐 때 학점까지 딴게 있지만
내가 헤밍웨이를 들여다보는 프리즘은 역시 그의 파리생활 7년이란 짧은 세월에
한정되곤 한다. 내가 불문학이란 언저리를 돌았기 때문에.
흔히들 우리는 헤밍웨이를 수식할 때 4번 결혼에 3번 이혼 하고 공평하게 여자 하나
마다 한편의 대작품을 남겼다고 평한다.

조강지처였던 여덟살 연상의 해들리 리처드슨과 이혼 하며 남긴게 The Sun Also Rises 1926,
그러나 그 소설속에는 해들리는 흔적도 없다. 심지어 Andres Weiss가 쓴 Paris was  a Woman,
Portaits the left bank에 보면 첫아내 해들리가 아서 외삼촌으로부터 유산으로 받은 8천달러를
경마로 다 날리자 아내의 친구인 폴린 파이퍼와 한집에 동거 하기까지 원했다.
그때 돈 8천달러는 어머 어마한 돈 이었다.
그게 무슨 마촛가? 조영남이지. 어느날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릎팍도사란 프로에 나와 아내
윤여정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와 한집에 좀 같이 살자고 졸랐다고 뻔뻔 스럽게 떠들데.
물론 당시 파리에 이렇게 배짱 좋게 산 친구는 있었다. 바로 에즈라 파운드가 영국출신 화가인
아내 도로시외에도 바이올니스트 올가 럿지, 또 셰익스피어란 여자등 집으로 불러들여
죽기전까지 삼각관계를 즐겼지 아마.
화가난 올가 럿지는 파운드와 사이에 난 사생아를 아예 산부인과 병동에서 유산의 아픔에
시름하던 어느 시골 여자에게 주어 버렸다. 또 한 여인 셰익스피어도 임신뒤 끝까지 애 아버지는
누구라는걸 함구 했다. 대시인 파운드에 대한 보복심에 이글 이글.

해들리는 빅토리아시대의 구식 냄새를 풀풀 풍기는 여자였지만 헤밍웨이에게는 첫아들
범비까지 낳아주었고 여류 명문대학중 하나인 Bryn Mawr를 중퇴한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해들리 가계도 미국 기준으로 보면 뼈대있는 집이다. 조부가 세인트루이스 공립도서관을
설립했고 미시시피 서안에서 제일 대규모였던 제약회사를 설립한 기업가였다. 외조부도
일리노이주 힐스보로에 학교를 세웠고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시티 유니버시티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집에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두 대나 놓고 산 필그림의 후예들이다.
해들리와 헤밍웨이의 묘한 공통점은 둘다 아버지가 권총 자살을 했다는 점이다. 해들리의
아버지는 주식을 하다가 몇만달러를 잃고 빌린 돈 까지 모두 날리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 이면에는 남편에게 그칠줄 모르는 잔소리를 쫑알 거리는 어머니 플로렌스의 극성도 어른
거린다.
헤밍웨이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지만 역시 기센 아내 그레이스의 가위에 눌려 살다가
1928년 12월 자기 아버지가 쓰던 권총으로  오른쪽 귀 뒤를 쏘아 자살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말을 잘 안할려고 들지만 그레이스는 자기에게 피아노를 배운 제자
루스 아놀드와 평생을 사랑을 즐겼던 양성애자였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친 어머니에게
대놓고 반항했다.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그리스, 라틴어교육 까지 강요 당했고 집안 형편으로는 충분히 대학
진학을 해도 될 처지였지만 헤밍웨이는 집을 떠나 1차대전에 뛰어든다.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부상을 입은 것은 1918년 7월8일 자정 직전 이태리전선 포탈타디피아베에서
였다. 적십자사 구급차 운전병으로 근무하기위해 5주전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여덟살.
전방에 있는 부대에 초콜릿과 담배를 전달하는 임무를 자진해서 나섰다가 오스트리아군이 쏜
박격포 파편 28개가 다리에 박혔고 오른쪽 다리에는 기관총알도 두발 맞았다.
미군으로 최초의 부상자가 불행히도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상은 헤밍웨이를 평생 따라 다닌다. 꿈을 통해, 악몽을  통해, 또 소설을 통해 평생 불을
켜놓지 않고는 잠을 들 수 없는 버릇도 이 전상 뒤에 생긴 일상 이었다.
이 육체적 부상 이외에 여기서 헤밍웨이는 첫사랑이 통한으로 끝나는 아픔도 경험한다.
멍추같이! 첫사랑이란 항상 그렇게 끝나야 한다는걸  헤밍웨이만 몰랐나?
상대는 헤밍웨이보다 일곱 살반이나 더 나이 많은 아그네스 폰 쿠로프스키. 그녀도
워싱턴 DC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다가 활달한 성격 이었기에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간호학교를
거쳐 헤밍웨이보다 불과 며칠전 그가 입원해 있던 밀라노 병원으로 전출되어온 여자였다.
둘은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다. 헤밍웨이는 여자가 처음이고 아그네스는 워싱턴 있을 때
이미 의사와 열렬한 사랑을 나눈 그 방면의 베테랑.
적십자사의 상급자들이 두 사람이 열애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두연인을 멀찍암치 갈라 놓는다.
피렌체등을 전전했던 헤밍웨이는 매일  아그네스에게 편지를 띠웠고 당연히 결혼까지 갈걸로 믿었다.
그러나 토레디모스타로 전출된 아그네스는 그곳서 이탈리아군 장교 도미니코 카라촐로를 만나
사랑에 빠져 1919년 3월7일 마지막 절교의 편지를 헤밍웨이에게 보냈다.
이 첫사랑은 그를 평생 따라 다니는 火印으로 그의 뇌리에 남고 만다.
문학사가들은 또 여덟살이나 연상인 해들리를 만나 결혼까지 한 것은 헤밍웨이의 깨어진 첫사랑의
아품의 연장선상의 문제로 본다.

해들리와 헤밍웨이가 결혼뒤 1921년 12월8일 파리에 등장한다.
손에는 시카고에서 사귄 작가 셔우드 앤드슨(1876-1941)이  네명의 파리문단의 미국계 작가들에게
써준 소개장 넉장. 처음부터 헤밍웨이 마음속에는 이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옹호자로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또 앤드슨이 써준 소개장 글 속에는 스물두살의 헤밍웨이가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고 이 부부를 ‘알면 알수록 유쾌한 사람들’이라고 표현 했다.
앤더슨이 써준 소개장 가운데  2통은 파리의 마당발인 루이스 갤런티어와 세익스피어& 컴파니를
운영하는 실비아 비치에게.그리고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파리 센느강 좌안을 완전히 한손안에
틀어쥐고 피카소를 비롯 스캇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엇, 손톤 와일드등을 도와준
희대의 대모, 여걸(Amazone)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였다.
1920년대 센느강 gauche(左岸)에 대한 개념이랄까 풍경,풍속도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으면 도무지 파리를, 아니 유럽 문화계를 파악 하기가 힘든다. 그리고 배꼽밑의 안부를 따지는건
촌놈이다. 어찌 그리 많은 동성애자가 우글 우글하는지...이게 다 나는 유럽이 깡패노릇 하던시절
금과 향료를 찿아 먼 항로에 올랐던 뱃놈들의 문화고 囚人들의 삶의 또 다른 하나의 유산 이라고
생각 한다.

앤드슨은 닻을 몽파르나스에 내리라고 조언을 해주었지만 해들리 헤밍웨이 부부는 훨씬 후진 동네인
카르디날 드 르무앵 74번지에 있는 낡은건물 4층에 짐을 푼다.

헤밍웨이와 해들리가 에즈라 파운드를 찿아가자 시인은 장광설을 늘어 놓는다. 헤밍웨이는 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하고 웃음을 자아내게하는 과장된 태도와 부스스한 보헤미안 머리를
풍자한 소묘 한편을 썼다. 루이스 갤런티어는 당장 출간을 권했다.
이글을 계기로 헤밍웨이와 파운드는 아주 가까워 졌다.권투도 하고 테니스도 같이치고.
파운드는 헤밍웨이 산문에 날카로운 논평을 가했다. 파운드가 파란색 연필로 교정을 보고나서
돌려준 원고에는 형용사를 빼라는 표시가 가득했다. 이를 통해 헤밍웨이는 신문기사를 쓰는것과
시를 쓰는 것은 엄청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헤밍웨이에게 신문기자의 길을 접고 소설을 쓰게 만든 여자는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단문 위주로 짧게, 검약하게 쓸 것, 가급적이면 형용사의  사용을 줄일 것등을 요구했다.
소위 말하는 ‘비정체’라는 헤밍웨이의 문체의 기본 골격을 잡아준 사람은 스타인 이다.
그래서 대실 해미트와 레이먼드 챈들러등이 포함된 하드보일드 문학이 정립 되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The Sun Also Rises 서문에서 쓴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란 구절도 처음 언급한 사람은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스타인이
어디를 가다가 차가 고장이 나 정비공장에 맡곁는데 수리공들이 게으름을 피우니 화가난
스타인에게 정비공장주인이 무책임한 수리공들의 태도를 비난한 말이 바로 이 ’잃어버린 세대‘란
말이다.
Lost Generation이란 말은 즉 제1차 세계대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일컷는 말로 변질되고 말았다. 또 조금 文名을 날리기 시작했다고 배신을 때리기 시작한
헤밍웨이에게 날린 분노 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차츰 작가로서의 문명을 얻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배신을 때려 버린게 파리로 올 때
4명의 작가에게 소개장을 써준 셔우드 앤드슨에게 다. ‘봄의 분류’란 작품으로.
이 작품은 이미 첩이된 아내 해들리의 친구이자 헤밍웨이의 두 번째 아내가 될 폴린 파이퍼는
부추겼고 해들리는 출판을 말렸다.
수 많은 도움을 준 거트루드 스타인과도 차츰 틈이 벌어진다. 헤밍웨이가 이제 좀 컷다는 이야기다.
평생 스타인의 부인이자 요리사, 그녀가 쓴글의 편집자 였으며 뮤즈역을 근 25년 해낸 토클러스는
처음부터 헤밍웨이를 그렇게 평가 해주지 않았다.
스타인과 헤밍웨이가 틀어진 결정적 계기도 바로 그 문제의 ‘봄의 분류’란 작품 때문 이었다.
스타인이  헤밍웨이에게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쓰레기 같은 인간” “저질” “지옥에나 떨어져라” ....
20세기 미국문학의 거장들 뒤에는 카리스마로 가득찬 여걸 스타인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이런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헤밍웨이는 들었으니 얼마나 헤밍웨이란 인물이 내가 자라난
儒家의 말로 표현하면 인(仁)이 덜된 그릇인지 확연하게 알수가 있다.

더구나 스콧 피츠제럴드와 관계는 어땠고.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에 비하면 내눈에는 약점이 많은
정말 인간적인 품성을 지닌 작가다. 술을 이기지 못했고 비록 프린스턴이라는 명문을 나왔지만
가정이 빈한하고 아일랜드계의 핏줄을 가진 열등감, 또 아내 젤다문제로 숱한 속앓이를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 보다는 문단 진출이 빨랐기에 진심으로 우정을 갖고 헤밍웨이를
도와줄려고 했고 끝까지 그마음 변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여자문제에서는 한없는 나약함을 보여 주었다.열네살 때 만난 상류사회 출신인 기네부라와의
실연이 마음속에 큰 멍으로 남아 있고 또 사랑하는 아내 젤다도 에두아르 조장이란 잘생긴 프랑스
해군 항공대 비행사와의 염문을 뿌리니 심적 고통이 오직 했으랴!
젤다의 투정중에 피츠제럴드는 아무 여자도 만족 시켜줄 수 없는 아랫도리의 크기를 가졌다는 불평에
스콧은 고민 끝에 이현안을 헤밍웨이에게 털어놓다.

“진료실로 가보세”
“진료실이 어딘가?”
“어디긴 어디야 화장실이지”
화장실로 스콧 피츠제럴드를 끌고간 헤밍웨이는 친구의 아랫도리를 검사했다.
“자넨 완전한 정상이야!” 헤밍웨이는 판정을 내려 주었다.
“그러면 왜 젤다는 그런 말을 했을까?”
“그것은 자네가 주도권을 못잡게 하기 위해서지,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낡은 수법이야”
“이제 내말 믿겠나?”
그래도 스콧 피츠제럴드는 반신반의 였다. 그만큼 젤다의 말을 믿고 있었다. 할수없이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데리고 길건너 루브루박물관으로 데려갔다. 조각상들을 하나 하나 보여 주면서
활동하지 않을때의 남성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거라고 강조했다.
헤밍웨이가 1921-1926년 사이의 파리생활을 기록한‘Paris est une fete'에서 나는 이글을 읽고
문득  無崖의 대자유인 春城스님의 고사가 떠 올랐다.

늙은 춘성이 어느날 전차를 탔더니 예수를 전도하는 사람이 다가와
“죽은 부처 믿지 마시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죽어 천국 갑니다”
춘성왈 “니는 내 X을 믿거라! 내 X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아마 피츠제럴드는 부활(?)의 개념이 없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문단에 먼저 입신한 피츠제럴드에 먼저 접근할려고 애썼던 헤밍웨이는 이제 자기도
열굴을 내 밀기 시작 하자 슬슬 피츠제럴드를 멀리 하기 시작한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비망록에
헤밍웨이를 의식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름지기 친구란 결점을 감싸주어야 하는 법이거늘” 끝까지 친구로서 의리를 지킨 사람은
결점 많은 스콧 피츠제럴드로 나는 생각한다.

벌써 10여년 전인가, 솔트 레이크서 엘로스톤을 향해가면서 나는 아이다호를 가로 질렀다.
문득 헤밍웨이가 삶을 마감한 케첨이 이 어딘가 상상만 했을뿐 들리지를 못했다.
년전 투우의 발상지란 스페인 남부 절벽도시 론다에 들렸을 때 축제가 한창 이었고 내가
본 것은 헤밍웨이란 길이름 하나.
작년이 헤밍웨이가 죽은지 50주년, 판권 문제가 자유로워 졌는지 서점에는 헤밍웨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름전 교보에 들렀다가 내가 빼든 책은 ‘헤밍웨이와 파리의 아내’ 첫부인 해들리에
관한 거의 르뽀르따주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눈이 나빠져 근 보름을 씨름하며 읽고 이글을 긁적인다.

나는 명색이 신문 기자라는걸 하면서 얼마나 헤밍웨이의 그 간결한 문체를 좋아하고 흉내 낼려고
애썼던가?        나라는 놈은 좋아 할수록 흉부터 먼저 끄집어 내고 꼬집어 볼려는 심보를 가지고
있다. 내가 아무리 편견을 갖고 지꺼려도 헤밍웨이는 대문호 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헤밍웨이에게 과연 ‘당신은 먀초요’ 묻는 밑바닥 의식은 宋의 사대부의 名節을 이야기한
范仲淹의 岳陽樓記에서 출발 하는지도 모른다.

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

근육이 울긋불긋 하다고 분명 마초가 될수는 없다.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인가를 반문 할줄아는 사내만이 갖는 특권이지.

                Feb  28  2012
                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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