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에 맞는 봄 / 오세윤

2012.03.07 23:47

김영교 조회 수:392 추천:3


대장 내시경
                              

그렇게 고기를 좋아하더니, 결국·····.”
대장내시경으로 떼어낸 다섯 개의 용정 중 직경 1.5cm인 하나가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혼자 속으로 자조 섞어 씹어댄 말. 원래 짜고 맵게 먹어온 식성에 고기는 또 얼마나 즐겨했던가. 특히 삼겹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식탐이었으니 이 나이에 몸이 온전하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소 읽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개월 여, 지난 연말부터였다. 이틀이 멀어라 회식이 잦던 연말 끝 무렵, 중식당에서 있은 동창 송년모임을 끝내고 온 날 밤부터 뱃속이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방귀가 잦아지고 아랫배가 무지근 불쾌하면서 반설사가 연달아 이어졌다. 다음날 일찍 후배의 병원을 찾아 정장제를 처방받았지만 사흘을 복용해도 별반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간간이 점액변이 나오면서 겨우 참아낼 정도로 배가 기분 나쁘게 아팠다. 아무래도 음식물로 인한 세균성 장 질환에 이환된 것 같았다. 항생제를 5일간 복용하고야 변이 정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완치된 건 아니었던 듯, 괜찮으리라 싶어 술을 한 잔 하거나 기름기 도는 음식을 먹고 나면 여지없이 재발했다. 그럴 때마다 약에다 의존하거나 한 두 끼 굶는 것으로 속을 다스리고는 했지만 기대대로 쾌하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인가 의심도 해 보았지만 갑자기 그런 증후가 나타날 만큼 신경 쓸 일도 생활의 변화도 없는 터, 아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장승배기에서 내과를 개원하고 있는 이용국 동문에게 전화를 넣어 문의했다. 증상을 듣더니 대뜸 대장 내시경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다. 대장에 암이 생기면 평시의 장 습성(Bowel habit)이 변해 그런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면서 검사한지 2년이 넘었으면 다시 해보는 게 원칙이라고 말한다. 결국 두 달을 지내놓고 나서야 인근의 준 종합병원을 찾아가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조직검사소견을 내 보이면서 담당의가 혹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는지 알기위해 CT촬영을 해야 하겠다며 5시간 공복이어야 하는데 어떠냐고 묻는다. 마침 점심을 거른 터, 바로 혈관으로 조영제를 주입하고 촬영을 받았다. 고맙게도 전이는 없었다. 그 자리에서 보험공단에 암 등록을 하고 수술을 받기위해 대학병원에 진료예약을 마쳤다.


그간 건강에 자신했던 오만을, 섭생에 무심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병원 문을 나섰다.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면서 언제부터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까를 헤아려봤다. 이미 3년 전에 첫 증상이 나타났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더운 한여름이기에 아랫배의 산통을 동반한 설사를 나는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은 탓으로만 돌렸다. 죽을 먹으면서 정로환이나 정장제를 복용하면 며칠 안에 증상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곧잘 재발했다. 몇몇 의원을 전전하다 비에비스 나무병원으로 민영일동문을 찾아가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고서야 효과를 보았다. 그 뒤로도 두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재발했지만 그때마다 인근 의원에서 같은 처방으로 약을 지어 복용해 증세를 다스리고는 했다. 그런 중에도 대장에 암과 같은 불유쾌한 병변이 생겼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그러기 겨우 2년 전에 위·장 내시경을 하면서 1cm미만의 작은 용종을 몇 개 떼어냈던 때문이었다.


용종을 그냥 두었을 때 10년 후 대장암이 될 확률 8%이고 20년 후에는 24% 라는, 용종의 직경이 1cm미만이면 암 발생 확률이 1% 이하라는, 2cm 이상이라야 35%에서 암으로 발전한다는 통계상의 의학지식을 나는 너무 과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60세 이상 한국인의 30%가 용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대수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오만과 설마가 병을 키운 원흉이었다.
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지만 마음은 의외로 담담했다. 위가 아닌 대장이라 다행이라 싶은데다 크기가 작고 전이가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진료실을 닫고 지낸 지난 10년간을 돌이켜봤다.
글을 쓰는 기쁨을 얻은 덕에 다른 자지레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산 축복받은 10년. 아프지 않고 평화롭게 맞은 아침들. 화사하게 봄을 맞고 건강하게 가을에 들어 산에 오른 10년을 돌아본다. 꺼림칙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으려 애쓰며 산 날들. 바른 마음이 이르는 대로 살고자 한 늙마의 날들. 늦게나마 그런 날들이 주어진 게 얼마나 고마웠던가.
글을 쓰면서 알게 된 한 벗이 하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잘 먹고 잘 싸는 게 행복이야.”
그때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행복한 줄을 모르다가 이제야 비로소 절감한다. 나이 들었으니 당연하다는 듯 찾아든 병, 포용은 못해도 밉다는 생각을 덜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효연囂然히 창밖을 내다본다. 저무는 저녁 뜰에 봄비가 고요하다.





지나고 나서야


주섬주섬 먹은 나이
어느새 일흔 둘


무릎이 시큰거려 지하철 계단을
난간에 기대 절뚝거리며
게걸음으로 내려간다.


친구를 만나러 사당에 가는 오늘 아침 내 몸은
성한 곳이 단 한군데도 없다


술 잘못 먹어 배탈난지 한 달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엊저녁부터는
바튼 기침에 콧물까지 난다


종이에 왼손 검지마저 베었으니
만신창이다


회복이 더딘 배탈이 덜컥 겁나
위·장 내시경까지 예약을 했으니
그래도 오래는 살고 싶은가보다.


이제부터 남은 세월은
병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나이
이제야 겨우 지난날들이 환하게 보이는구나


좀 더 너그럽게 살 걸
좀 더 느긋하게 살 걸
참으며 기다릴 줄도 알고
베풀면서 살 걸
이제야 겨우 후회를 한다


그래도
어쩌면
후회 안하고 살 날들이
5년쯤
10년쯤
아니면 운 좋게
혹 15년쯤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고맙게도
봄이 오고 있다.

다시 봄을 맞다니!

                            2012.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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