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용운/님의 침묵

2011.11.09 13:18

김영교 조회 수:863 추천:26

님의 침묵  / 한용운 (1926)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8 용선식  해설

[ 개관 정리 ]

■ 성격 : 상징적, 여성적, 낭만적, 산문적, 역설적, 연가적, 불교적, 전통적

■ 표현

* 사설조의 산문체

* 여성화자의 경어체 사용

* 고도의 상징적 수법

* 불교 사상(윤회사상)의 심화

* 역설적 표현의 묘미

* 전통적인 시형태(10구체 향가)에 기본을 둠.

* 변증법적(생성과 소멸) 원리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 님 → 생명의 근원, 조국, 민족, 연인, 부처, 불법 등의 통합적 의미를 함축한 시어

■ 주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1행의 감탄사(아아) → 님의 떠남에 대한 절망과 슬픔의 감탄사

* 푸른 산빛 → 여름, 생명과 삶의 상징

단풍나무 숲 → 가을, 죽음과 조락의 상징

* 적은 길 → 죽음의 길,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가기 힘든 길.

*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 어법이 파괴된 시적 자유

님의 떠남이 자의가 아니라 불가피한 숙명에 의한 것임을 나타냄.

* 3행 → 님이 떠남으로 인해 님과의 사랑이 허무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버림.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 님과의 운명적이고 충격적인 첫 만남

* 5행 → 님의 절대적인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면서, 그러한 님에게 정신적인 포로가 되어 버린

화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임.(화자에게님은 절대적 존재임)

* 그러나 → 시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비극적 상황에서 희망의 상황으로)

*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도리어 희망을 위한 실천과 의지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모습.

* 8행 → 불교적 윤회사상(회자정리, 거자필반)을 밑바탕으로 해서, 님과의 재회를 확신하는 내용임.

* 9행의 감탄사(아아) → 깨달음(절망 속에서 희망을 봄.)의 감탄사

* 9행 → 역설적 진리가 담긴 부분으로, 현상적인 님이 지금은 비록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 내지는, 화자의 마음 속에서는 항상 살아있는 님임을 나타냄.

* 님의 침묵 → 님의 의미가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

쉽게 도달하기 힘든 부처의 경지(피안의 불법과 진리),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 상황, 현상은 존재하지 않고 본질로서만 있는 님의 존재 양상 등을 의미함.

■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상 → 불교적 윤회관, 만남 뒤의 이별과 그 逆(역)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사상, 즉 '임의 부재 = 임의 존재'라는 역설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시인의 사상은 보편적인 종교 사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당대 현실의 토대 위에 형성된 사상으로서 구체적 가치를 갖는다. 그것은 현상의 부재 속에서 보다 깊은 진리를 찾으려는 초월의 의지이며, 절대적 세계를 지향하는 극단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주제 ⇒ 임을 상실한 슬픔의 극복과 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



[ 시상의 전개(짜임) ]

■ 기(1∼4행) : 님의 부재(님과의 이별)

■ 승(5∼6행) : 이별 후의 슬픔

■ 전(7∼8행) : 슬픔의 극복과 만남에의 희망

■ 결(9∼10행) : 님을 향한 정진(님을 향한 영원한 사랑)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 김봉군 (문학평론가, 성심여대 교수)

호흡이 길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술술 읽히는 '님의 침묵', 萬海 한용운의 이 시는 소월의 '진달래꽃', 미당의 '국화 옆에서',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목월의 '나그네' 등과 함께 우리 민족 최고의 애송시라 해도 좋겠지요?

산문체로 되었으니 산문시라고 할 이들이 있을 법하지만, 이 시는 자유시입니다. 律文인가 산문인가에 따라 자유시, 산문시로 구분되는 게 아니니까요. 자유시는 시의 줄(行)이나 연이 구분된 배열 형태를 보이고, 산문시는 단락 단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님의 침묵'은 줄을 단위로 구분하여 썼으므로 자유시입니다. 차근차근 읽어 보면 내재율이 뚜렷하게 감지됩니다.

님은 / 갔습니다 / 아아 / 사랑하는 / 나의님은 / 갔습니다 //

이처럼 율격이 느껴지며 어조는 다분히 우리 전통 여인의 그것입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명시에는 대개 이처럼 우리의 전통 율격이 깔려 있습니다. 율격은 정서와 함께 민족 정체성의 원초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는 난해어나 낯선 말들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와 같은 금속성 비유나, "나는 향기로운 님의 ~ 눈멀었습니다."와 같은 말의 속뜻, '푸른 산빛' 같은 말들의 상징, 반복과 역설의 표현 기법들이 이 시를 이해하는 열쇠일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한 줄씩 읽어가면서 주요 대목의 감추인 뜻을 캐어 보기로 합시다.

둘째 줄 "푸른 산빛을 ~ 떨치고 갔습니다."의 속뜻은 이렇게 풀어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임이 떠나가 버림으로 해서 푸른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凋落의 무상감과 이별의 슬픔이 서린 대자연의 표상이 제시되었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표출하는 어구며, 시행 전체는 강한 리듬에서 약한 리듬으로 극적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푸른 산빛'은 '미래를 밝혀 줄 찬란한 희망'의 뜻을 함축하고 있어, '단풍나무 숲'과 대립됩니다. '깨치고'는 '깨뜨리고, 갈라 놓고'의 뜻이고, '단풍나무 숲'은 '절망과 조락'의 뜻을 함축하며, 불교의 '空' 사상과 상통합니다. '차마 떨치고'는 모순 어법에 속하지요? '차마'는 '○○하지 못하고'와 결합하는 것이 문법에 맞지 않습니까? 따라서 '차마 떨치고 갈 수 없는 나의 손을 떨치고'의 생략형입니다.

다음, "황금의 꽃 ~ 날아갔습니다."는 3중의 비유 구조로 된 시행으로서, 존재와 부재 사이의 대립을 보여 줍니다. '황금의 꽃'은 견고성 · 광휘 · 고귀성 · 불멸성의 표상인 광물 이미지 '황금'과 전원적 · 순응적 · 수동적 표상인 식물 이미지 '꽃'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광물의 견고성과 식물의 유연성이 변증법적인 충돌을 거쳐 화해의 표상으로 변용되는 고도의 표현 기교를 과시한 은유입니다. '황금의 꽃같이 빛나던 옛 맹세'는 '영원히 변치 않을 듯이 보이던 찬란한 사랑의 약속'이라는 뜻을 함축하며, '차디찬 티끌'과 대조됩니다.

또 "나는 향기로운 ~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는 임의 말소리와 얼굴에만 넋이 빼앗겨 다른 것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날 때에 ~ 만날 것을 믿습니다."가 함축한 뜻을 캐어 보기로 하지요. 이는 임과의 재회를 확신하고 있는 부분으로, 불교의 윤회 사상을 품고 있습니다. 만난 이는 헤어지게 마련이고, 떠난 이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會者定離, 去者必返"의 의미를 내포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제 곡조를 ~ 휩싸고 돕니다."는 有限者인 자아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임'의 세계를 향해 정진하는 求道의 자세를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임에 대해, 스스로 겨워할 정도로 지극한 사랑의 노래를 뜻합니다.

뜻풀이는 이 정도면 된 듯합니다. 이제 이 시 전편의 구조를 살펴볼까요? 우선 각 시행의 종결형을 보면, '갔습니다, 갔습니다, 날아갔습니다, 사라졌습니다'로 된 대문과, '눈멀었습니다, 터집니다'의 대문, '들어부었습니다, 믿습니다'의 대문, '아니하였습니다, 돕니다'의 대문으로 나뉩니다. 임의 떠남, '나'의 슬픔, 슬픔의 극복과 만남의 희망, 임을 향한 정진의 詩想을 각각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비극적 상황을 희망의 상황으로 전환시킵니다. '희망의 정수박이'는 그 전환점입니다. 그것은 禪佛敎가 품은 역설의 진리, 그 진리가 주는 생의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은 역설의 寶庫와도 같은 것입니다. 거기 실린 88편의 시가 다 역설로 찬 것들이 아닙니까? '維摩의 한 침묵이 만 개의 뇌성'이라 한, 대승 불교의 <유마경>적 상상력과 <十玄談>의 역설에서 그의 시는 연유합니다. "사랑을 사랑이라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고 한 만해 시의 역설로 보면, '님의 침묵'이야말로 뇌성과 같은 대진리, 대해탈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근원, 중생, 조국, 민족, 애인, 부처, 佛道 등의 통합적 의미를 함축한 '님'의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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