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문학론/시 속에 드러나는 자기 목적성을 중심으로/강영은( 시인.평론가) 7/3/2011 미주문협 자유계시판에사 발췌 시 속에 드러나는 자기 목적성을 중심으로/ 강영은 현대시 창작의 방법이 보여주는 모호함은 세계와 사물에 대해 스스로의 실존적 가치가 결여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존재의 조건을 드러낸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적인 속성은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무엇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시를 쓰는 행위는 창조적 계시가 시적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갖추었을 때 행해지는 행위를 말함이며 시창작의 행위는 표현과 불가분의 것이 된다. 표현함에 있어서 시가 지닌 본래의 기능이 순일(純一)하게 발휘될 때, 실존에의 결여가 자기목적성(自己目的性)을 지니게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기목적성을 뜻하는 영어 'autotelic'은 그리스어 'auto(자기)'와 'telos(목적)'가 결합한 말이다. 어떤 일을 행할 때, 외부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보다는 그 일 자체가 좋아서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말함인데 그러한 목적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목적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에 대해 물질적 수혜라든가 재미, 쾌감, 권력, 명예 같은 별도의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농락당하기보다는 전체를 둘러싼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든다. 시인에게 있어 자기 추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교, 철학, 도덕 또는 인간 삶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독자적 영역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좋아서 쓴 시 자체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해 아래 찾을 수 없다” 라고 한 <에드가 알렌 포우>의 말처럼 시인의 눈으로 드려다 보면 어떠한 시도 시를 쓰는 기쁨에 의해 써진 시보다 진실하고 숭고한 시가 될 수 없다. 시인은 시적 묘사와 진술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자신의 추억과 열정을 일치시키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성과 전달성 간에 이완이 생겼을 때 “일반적으로 전달성보다 자기 목적성이 우위에 있다는 원칙에 의해 해결해야 한다”고 <와타나베 마모루>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목적성이야말로 예술 행위의 동기이고, 이에 의해서만이 창조적 행위의 최고 가치인 자유가 기초 지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예술 행위를 하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독자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위도 될 수 있다. 이번에 받아본 미주시편은 자기 목적성에 충일한 시편들로 짜여져 있다. 이민생활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파생된 정서가 문학적인 장르에서 자기 목적성을 가졌을 때, 존재의 결여가 어떠한 양태를 지니는지 살펴보는 순간은 나에게도 흥미로운 일이다. 1, 넘어야 할 벽 미주시인들의 면면을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본다. 미지의 땅, 미국은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존재하는 꿈의 땅으로 인식되어왔다. 미국에 가면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어려웠던 한 시대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탐험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후 미국은 방대한 국토와 자원 그리고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대사회의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미국이 가장 부유했던 1990년과 2000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미국은 동경의 나라이며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세워진 흠모의 피난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설고 물선 땅에서 鼓腹擊壤(고복격양)의 삶이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100년의 세월을 지닌 한국이민의 역사도 많은 땀과 얼룩진 피로 기록되었을 터였다. 그 정착의 과정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상회하는 고통과 애환의 연속이었으리라. 사고무친의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면서 일상어로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를 사용하여 시를 쓴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자기 존재의 회귀이며 존재가치를 증명하는데 충분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기조로 써내려간 시편들은 향수를 달래주거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방편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인생의 표현이요,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라고 말한 이는 <허드슨>이지만 이민 생활의 소외감과 이질감 속에서 모국어를 잊지 않으려는 열정과 접점을 이루는 자기 목정성은 존재감의 결핍이라는 현실 앞에서 상상이라는 질료보다 감정이라는 질감을 통한 해석 쪽에 보다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민생활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직시하는 시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영교의 시를 읽어보자. 억양이 다른 언어의 토양/ 마음 부칠 데 없어/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수직의 이민벽에 이마를 찍고 또 찍고/ 퍼뜩 드는 정신// 외로워서 기대는가/ 슬픔, 속으로 감추며/ 사랑, 빨갛게 덮으며 /밤낮으로 벽을 기어오른다// 배를 대고 빈대처럼 납작 붙어 기는 여정/ 손톱 닳고 눈물도 닳아/ 그래도 닳아버리지 않는 꿈/ 맨가슴에 있다 // 푸른 잎 하나/ 넝쿨 전체를 끌고/ 서로 붙잡아 밀어 올리며 키워/ 느리게 기어 올라가는 저 힘/ 마침내 벽을 뒤덮는 새벽// 앞장서서/ 담쟁이 넝쿨, 너/ 이민 장벽을 보란 듯이 통과하고 있다. -김영교<담쟁이를 위하여>후반부- 끈질긴 생명력으로 표상되는 담쟁이는 많은 시인들이 즐겨 다룬 소재이다. 김영교의 ‘담쟁이’는 극복해야 할 담과 벽을 지닌 이주민의 아픔을 시인다운 눈으로 직시한다. ‘담쟁이’라는 사물에 이입된 이주민의 아픔은 은근과 끈기로 점철된 자기 극복 의지와를 표상한다. 그의 또 다른 시 ”독거인“은 노인이 된 채 이국에 독거하는 외로운 친구의 모습을 통해 ”소망은 다음 세상을 위한 것“ 이라는 삶의 성찰과 타향이 고향인지 고향이 타향인지 알 수 없는 이주민의 고독한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폐차장교실“ 은 고장 난 자동차를 위해 필요한 부속품 하나 찾아 폐차장을 찾았다가 ”산더미 폐차장 허무 앞에/ 삶의 교통법규에 순종하는/ 아직은 괘도에 붙어있는 원형 바퀴인가, 나는“이라는 고백을 통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바쁜 일상 속에 ”만신창이의 몰골로 끌려 온 생“에 대한 자기 행적의 어두운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이 모두가 이주민의 넘어야할 벽이면서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아픔이 아닐까 한다. 2, 그리움, 혹은 추억의 풍경 김영교의 시가 생활, 혹은 일상 속에 천착된 내용을 보여주었다면 정용진, 윤휘윤, 최석봉의 시는 현실이 아닌 과거의 이미지를 불러들여 모국의 향토적 정서를 환기시킴으로써 자기 목적성에 도달한다. 때문에 시적 공간은 일정한 공간 속에서 경험으로 관찰한 묘사가 아닌, 과거의 기억 위에 현재 겹쳐지는 심상을 함께 서경화한 공간이 작품 속 공간의 主를 이룬다. 작품 속의 시점이 시인이 대상을 구체화 하는 일정한 체계인 것을 감안해 볼 때, 이들 세 시인이 세계와 만나는 접점은 심상 속에 내재화 되어 있는 그리움, 혹은 우리들의 추억이다. 정용진의 시을 보기로 하자. 하늘은/ 구만리 장천(長天)// 물은/ 천만 길 취옥(翠玉) 항아리// 누구를 찾아/ 저리 높았는가.// 무엇을 찾아/ 저리 깊었는가.// 하늘은/ 쪽빛 눈망울// 호수는/ 내 누님의 청옥(靑玉) 가락지. -정용진<에메랄드 레익(Emerald Lake)>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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