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귀촉도 / 서정주

2011.11.14 08:34

김영교 조회 수:1508 추천:22

21 세기에 남을 한국의 시인 10명 - 5.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추천작품: 자화상, 국화옆에서, 동천, 화사, 무등을 보며, 상리과원, 질마재신화, 귀촉도, 바다, 푸르른 날, 선운사 동구, 목화, 신부, 눈물 나네, 밀어, 내가 돌이 되면, 가벼히, 떠돌이의 시, 꽃밭의 독백, 행진곡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춘추>(1946)


(1943.10)



어느 여름 바닷가 민박에서 묵고 있는데, 밤새도록 부근 어느 숲속에서 우는 새가 있었다. 사위가 조용해진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목이 쉬도록 우는데 저 전설의 새는 무슨 사연 있길래 저리 우노 하는 측은지심이 우러나게 한다.  

*귀촉도=두견이=접동새=소쩍새: 주로 여름 밤에 우는 새



■ 개관정리

⑴ 성격 : 전통적, 상징적, 애상적

⑵ 표현

    * 전통적 정서와 상징적 시어
    * 반복과 음성 상징어의 적절한 활용
    * 도치법과 행간걸림(2연)

⑶ 중요시구

   * 서역 삼만 리, 파촉 삼만 리 → 한 번 가면 되돌아 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를 상징
            '삼만 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시인의 정감의 깊이를 표현하는 상징적 숫자
   * 진달래 꽃비, 흰 옷깃 → 이별의 비감(悲感)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어들.
   * 슬픈 사연의 → '행간걸림'에 해당됨. 즉, 슬픈 사연의 신이면서,
                          슬픈 사연으로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가 되는 셈이다.
   * 육날 메투리 → 화자의 임에 대한 정성을 대변한 시어
   * 이냥 → '단호히'의 뜻을 지닌 말로, 사랑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말임.
   * 머리털 → 임을 향한 애절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의 상징
   * 머리털로 메투리를 삼아주는 행위 → 생에 관한 비관적인 인식, 비극적 세계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의 표현(불교의 '산화공덕'을 연상)
   * 초롱 → 기다림의 상징
   * 초롱에 불빛 지친 → 늦은 밤까지 애타는 연모의 정
   * 은핫물 → 임과 나 사이의 단절된 공간의 상징
   * 귀촉도 → '가신 임'의 상징이며, 임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사랑의 매개체
                  임에게로 가고파 하는 시적 자아의 애절한 갈망과 한의 객관적 상관물
   * 피 →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통함에서 흘러 나오는 슬픔과 한의 피요,
             그리움의 몸부림이다.
   *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 이별이 주는 단절감을 나타낸 구절로 보이며,
                                              이별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일종의 돈강법)

⑷ 소재 및 제목과 관련하여

귀촉도는 불여귀, 자규, 두견, 소쩍새, 접동새 등으로 불리워지는 새로서, 이 새의 전설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촉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망제의 한이 서린 새), 우리 민족의 정서와 결합하여 변형되면서 많은 시가의 소재가 되었다. 널리 알려진 고려말 이조년의 시조에 나오는 자규를 비롯하여, 김소월의 <접동새>, 김영랑의 <두견>, 조지훈의 <낙화>에 등장하는 귀촉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소쩍새 등이 바로 그것이다.

⑸ 주제 : 죽은 임을 향한 회한과 그리움(사별의 아픔)



■ 시상의 전개 (짜임)

○ 1연 : 임과의 영원한 이별(임의 죽음) - 과거

○ 2연 : 임에게 못 다 한 사랑의 회한과 탄식 - 과거

○ 3연 : 귀촉도의 한맺힌 울음과 화자의 한과 그리움 - 현재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사별(死別)한 임을 향한 정한(情恨)과 슬픔을 처절하게 노래한 시로 보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죽음의 길로 떠난 임에 대해 여인이 느끼는 회한과 슬픔이 애절히 노래되고 있다. 임이 떠나 버린 뒤에는 머리털(생명 상징)마저 부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시적 자아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이 시가 지닌 정서의 깊이와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임의 부재(不在)'를 드러내는 것은 우리 문학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다. 이 작품이 '임의 부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恨)'의 미학을 표현하는 우리 문학의 전통과 접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표출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전통적 소재를 통해 구체화된다. 즉 '진달래', '육날 메투리', '은장도', '은하ㅅ물', '귀촉도' 등의 시어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주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준다.



■ 관련고사

촉(蜀, 지금의 四川省) 나라에 이름이 두우(杜宇)요, 제호(帝號)를 망제(望帝)라고 하는 왕이 있었다. 어느 날 망제가 문산이라는 산 밑을 흐르는 강가에 나왔는데, 물에 빠져 죽은 시체 하나가 떠내려 오더니, 망제 앞에 와서 눈을 뜨고 살아 났다. 망제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를 데리고 와서 물어보니,

"저는 형주 땅에 사는 별령(鼈靈)이라는 사람으로,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서 빠져 죽었는데, 어떻게 흐르는 물을 거슬러 여기를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망제가 생각하길, 이는 하늘이 나에게 어진 사람을 보내주신 것이라 여기고, 별령에게 집을 주고 장가를 들게 하고 정승으로 삼아 나라일도 맡겼다. 망제는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

이것을 본 별령은 은연 중 음흉한 마음을 품고 망제의 좌우에 있는 대신이며 하인까지도 모두 매수하여 자기 심복(心腹)으로 만들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그 때 별령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얼굴이 천하의 절색이었다. 별령은 이 딸을 망제에게 바쳤다. 망제는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모두 장인 별령에게 맡겨 버리고 밤낮 미인을 끼고 궁중에 깊이 앉아 바깥 일은 전연 모르고 지냈다.

이런 중 별령은 마음 놓고 모든 공작을 다해 마침내 여러 대신과 협력하여 망제를 국외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 망제는 일조일석에 나라를 빼앗기고 쫓겨나오니 그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를 부르짖어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고 또 울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원조(怨鳥), 두우(杜宇), 귀촉도(歸蜀途) 또는 망제혼(望帝魂)이라 하여 망제의 죽은 혼이 새가 된 것이라 말들했다.



■ 작자 소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출생하여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3년 겨울, 개운사 대원암에서 영호당 박한영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1936년 동국대학교를 중퇴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36년에 김광균·김동리·오장환 등과 함께 잡지 《시인부락》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전시체제때 , 일본식 이름: 達城靜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을 찬양해 당시,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통해 친일 행위를 하였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친일 행위에 대해여 “일본이 그렇게 쉽게 질 줄 몰랐다.”라는 고백을 한 바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1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

해방 후에는 당시 문학계를 풍미하던 좌익 계열의 문학적 흐름에 반대하여, 이른바 순수 문학의 기치를 내걸고 우익 성향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대결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과 동국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다수의 문학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줄곧 한국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뿐만 아니라, 군부 독재와 유신독재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문학적 명성과는 별도로 그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고택이 남아 있으나 폐가로 방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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