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2011.01.07 12:27

김영교 조회 수:369 추천:42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이해와 감상 시의 화자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시행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여행은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한 편이다. 이 시를 모티브로 하여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비슷한 제목의 단편을 쓴 바 있는데, 그 소설에서 1인칭의 화자가 수배중인 운동권 대학생이었음을 참고하면 이 시를 재미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어쨌든 그가 어두운 분위기의 여행을 하고 있음은, 제 7·8행의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라는 서정적 표현에 의해 뚜렷이 드러난다. 이 표현은 사실 이 시의 분위기에 주춧돌을 이루는데, 마지막에는 약간 변주되어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에서 한번 더 나타난다. 조용히 지난 일을 떠올리며 톱밥난로에 톱밥을 던져주는 젊은 남자, 이 장면은 이 시가 이룩한 하나의 서정적 성취의 중심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우리는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삶의 핵심적 정력으로, 그 위에 던져져 작고 아름다운 불꽃으로 연소하는 톱밥을 시간 위에 꽃 피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로 바꿔 읽을 수 있게 된다. 특급열차는 서지 않는 변방의 간이역. 그 역사의 바깥을 채우며 내려 쌓이는 눈.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친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지펴진 난로. 이와 같은 극적 공간에서 시인은 시적 경구를 생산해 내는데, 그것은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과연 조용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될 법도 하다. 이 시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응시의 시간을 환기한다. 설사 그 여행이 강요된 것이며 도피의 몫이라 할지라도. 이 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 곽재구 시인의 등단작이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알뜰하게 사람사는 얘기를 서정적인 필치로 엮어내고 있는 이 시는 1980년대의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정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해설: 이희중] 작자 소개 곽재구 1954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시단에 등단했으며, '5월시'동인으로 활동했다.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고,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전장포 아리랑』(민음사, 1985), 『한국의 연인들』(전예원, 1986), 『서울 세노야』(문학과지성사, 1990) 등이 있다. 곽재구의 처녀시집. 80년대의 가장 첨예하고 진지한 시적 성취로 기록될「조경님」「영자」「대인동」연작 등 모두 63편을 수록. 그의 시에는 역사의 현장에 몸 붙이고 사는 젊은 가슴의 함성이 배어 있고, 이 시대의 진정한 화해와 사랑을 위한 기도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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