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나무 / 성낙향

2011.02.19 17:43

김영교 조회 수:356 추천:48

사거리로 내려가는 길의 한쪽 어름에 공터가 있다. 그곳에는 버려진 문짝과 의자와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별 특징도 볼품도 없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원래는 어느 집 마당의 정원수였던 것이 그 집 식구들이 떠나고 주택마저 철거되어 공터에 혼자 남은 듯했다. 겨우내 그 나무를 지나치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산으로부터도 밀려나고, 인간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그 나무는 내게 있어 낡아빠진 문짝이나 의자와 똑같이, 그저 그 공터에 방치된 하나의 고물(古物)이자 우중충한 정물(靜物)일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멀리 공터 위로 낯선 것이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깨끗하게 빨아 넌 흰 손수건 같기도 하고, 환하게 불 밝혀진 알전구 같기도 한 것들이 공터 뒷집 먹색 슬라브 지붕을 배경으로 점점이 떠있었다. 공터 가까이 다가간 나는 한순간 탄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세가 밀린 세입자(貰入者)처럼 늘 어딘가 불편한 자세로 서있던 그 나무가 전날 내린 비에 부풀어 오른 무수한 흰 꽃송이를 가지에 매달고 있었던 것이다. 눈부신 순백의 꽃들을 보고서야 신원을 알 수 없던 그 나무의 정체가 ‘목련(木蓮)’임을 알게 되었다. 마치 몇 년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동네슈퍼 주인이 사실은 잃어버린 친동생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 그런 황당함 같은 걸 나무 앞에서 느꼈다. 목련이라면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친숙한 나무다.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보아왔기에. 누군가 나에게 목련나무를 아느냐고 물었다면, 분명 잘 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련을 몰랐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목련나무가 피워 올린 희고 탐스런 꽃에 불과했다. 나무의 둥치나 껍질이나 잎사귀에는 제대로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비가 내리거나, 찬바람이 불 적에 목련나무가 그것들을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본 적도 없이, 그저 봄날의 짧은 며칠, 발화(發火) 하듯 피는 꽃송이들에 열광 했을 뿐이다. 이지러진 양초 덩어리처럼 뚝뚝 꽃들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살 차듯 자잘한 잎이 돋아나면 나무는 차츰 시선 밖으로 물러났다가, 다른 신록들 속에 묻히게 되는 여름이 오면 그만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가 돼버리곤 했다. 목련나무 본연의 모습보다 한순간의 꽃단장에만 미혹되었던 나의 부박(浮薄)함이 느껴져 씁쓸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저 공터의 나무처럼, 목련이란 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꽃피는 것이 너무도 극적(劇的)이다. 겨울동안 메마른 가지를 치켜들고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서 있다가 다른 꽃나무들이 겨울과 봄의 모호한 날씨를 탐색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꽃을 확 피워버린다. 선수(先手)를 빼앗길까봐 두려운 듯 잎사귀도 내기 전에 꽃부터 피우고 본다. 도발적일만큼 당찬 개화(開花)에 정작 그것을 생산해낸 회색의 나무둥치와 가지들은 한낱 꽃을 위한 버팀목처럼 내 눈의 초점 밖으로 밀려났는지도 모르겠다. 열정도 의지도 없이 다만 생장(生長)할 뿐이라고 여겼던 나무의 내부에 응축되어 있던 욕망을 본다.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당당하게 밝히고자 인고(忍苦)하며 때를 기다려온 뜨겁고 질긴 욕망이 그 나무를 돌아보게 한다. 공터 한쪽에서, 돌멩이를 던지고 발로 차도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묵묵히 서있을 뿐이던 나무는 별 보잘 것 없다가 난데없이 일등을 한 아이처럼, 오늘 찬란하다. 일년 중 며칠간은 온몸에 명찰을 달고 세상에 제 이름을 외치는 목련나무를 떠나오면서,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제 존재를 알리는 참나무를 생각해보았다. 한 알의 도토리에서 시작되는 상수리, 떡갈, 굴참 등 우리 산야의 흔하디 흔한 참나무들. 이렇다 할 특징도 없이, 산속에 군집(群集)해서 살아생전 누군가의 눈길 한 번 끌지 못했을 한 그루의 참나무는 톱으로 베어져 제 속살이 지닌 향(香)을 드러내고서야 나로 하여금 제 존재를 돌아보게 한다. 고대 그리스 신들이 맨 처음으로 만든 나무라 하여 ‘어머니 나무’로 불리는 참나무. 나에게는 그런 참나무로 만든 작은 밥통이 있다. 갓 지은 뜨거운 밥을 그 밥통 안에 넣어놓으면 둥글게 맞물려진 참나무 널조각들은, 시골 방 아랫목에 놋주발을 묻어두는 어머니처럼 제 가슴에 흰 쌀밥을 품고서 오래도록 온기(溫氣)를 보존시켜준다. 온기도 온기지만 밥알마다에 은은하게 스며든 참나무 향기는 또 어떤가. 무심코 밥통의 뚜껑을 열었을 때 밥의 훈기에 우러나있던 나무의 향기가 코끝에 물씬 와 닿으면,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들을 때처럼 마음의 갈피마다 아늑한 울림이 인다. 향이 좋은 까닭에 옛날부터 청어나 연어를 훈연(燻煙)시킬 때, 질 좋은 와인을 숙성(熟成)시킬 때,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참나무를 골라 사용 했다. 물론 편백나무나 향나무처럼 생살 속에 고아한 향을 가진 다른 나무도 있긴 하다. 그러나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상에서, 낯선 방식으로, 낯선 추억을 쌓으며 자라난 연어와 포도, 그 이질적인 것들이 가진 본래의 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오히려 깊고 그윽한 풍미까지 더해주는 나무는 오로지 참나무뿐인 것을 옛사람들은 알았던 모양이다. 한겨울, 늙은 군고구마장수가 끌고 다니는 수레의 양철화덕 속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참나무 냄새는 고층건물로 빽빽한 도심의 거리에 일순, 이른 저녁나절의 시골 정취를 풀어놓는다. 장작 몇 개일 뿐이나, 그 향이 너무도 짙고 깊어서 양철화덕 속에는 해묵은 참나무 숲 하나가 통째 타고 있는 듯하다. 스님들의 독경처럼, 수사(修士)들의 그레고리안 성가(聖歌)처럼 긴 여운을 남기며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향기가 아까워, 주린 듯 그 향을 맡는다. 무엇을 태운들 저리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풍길까. 태워도 결코 정갈한 향을 풍기지 못할 내 몸, 내 삶을 알기에 참나무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열매를 겹겹의 껍질로 싸고도 가시까지 촘촘하게 세우는 밤나무와 달리, 산짐승들에게 순하게 도토리를 내어주고, 외부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독소를 만들어내는 은행나무와 달리, 제 속의 영양분을 둥치에 달라붙은 버섯들과 나누어가지는 욕심 없는 나무. 소나무처럼 그악스럽게 햇빛을 긁어모으지도 않고, 꽃송이마저 잎사귀 아래로 드리우는 가식 없는 나무. 남보다 많은 겸손의 덕을 몸 안에 지니고, 남보다 적게 탐하는 일생을 살아왔기에 불길에 사루어지는 참나무의 향기는 고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갑작스럽게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온 그 분의 삶이었건만, 나흘간의 장례식 동안만큼은 일생 받지 못한 주목을 받았다. 묵묵히 살다 느닷없이 활짝 꽃피워 세상에 제가 있었음을 알리는 목련나무처럼. 이모님은 남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자들의 기억 속에서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모두들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사고로 망가진 고인의 싸늘한 얼굴에 뺨을 부비며 눈물 흘렸다. 그렇게 모두들 울면서 고인의 자취를 아린 마음으로 더듬었다. 관속에 누운 이모님에게서는 양철화덕 속의 참나무 같은 향기가 장례식 내내 풍겨났다. 내 삶도 사람들에게 조상(弔喪)되는 때가 올 것이다. 죽음을 들여다보며, 어떤 죽음을 맞을까 생각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는 분명해진다. 무심히 지나쳐온 목련과 참나무는 이모님의 별세를 통해 인생의 종결부(終結符)를 되새기게 하고, 남은 삶에 대해서도 숙연해지게 하는 그런 나무가 되었다. (2009 경남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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