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교의 시 <통> 을 중심으로 우리의 삶의 모습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의 가치나 그 지혜나 혹은 그 교훈적인 면을 하나의 풍자(諷諮)적인 표현을 통해서 나타낸 작품이 있다. '나에게는 소중한 통이 두 개가 있다 밥통과 젖통이다 거스름 계산에 꿈 뜬 나는 밥통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암씨에게 밥통을 내 주었다 지금 나의 밥통은 없어지고 젖통은 가라 앉았다 그렇지만 부끄럽지 않다 둘 다 생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귀하다. 무척 귀하다 <중략> 밤마다 나는 꿈을 꾼다 밑창에 질펀한 탐욕의 찌꺼기 말짱하게 비워내는 빈 통의 꿈을.' (김영교 '밤마다 꿈꾸는 빈 통'의 일부 『미주문학 』2006 봄) 우리는 통이라고 하면 자꾸 관능적인 그리고 무언가 풍만하고 풍성하게 체워지는 느낌을 연상하게 되어, 필자 역시 이 시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 통통통...’ 하고 들려오는 음성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에 젖어 있었으나, 정작 시의 세계는 생과 사를 오고 가는 생명과 삶을 상징하는 젖통과 밥통이라는 생의 가치 있는 대상으로 그 방향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결국 시인 자신의 육체를 통한 생의 체험을 밝힌 것인데, 이러한 육체와 몸에 대한 표현은 1930년대 이상의 '육체의 계보학'에서 시작되어 모더니즘 작가들에 의해 관념과 이념으로 치장되었지만, 1970년대부터 나타난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현실 (독재와 경제)에 의해 혹사 당하고 학살 당한 현실적인 육체가 손톱 끝의 고통으로부터 죽음까지 현실적 고통으로 낱낱이 표현되는 육체의 표현으로 정점을 이루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나타난 최승호의 '대설주의보'(1982, 민음사. 1995)를 기점으로 이러한 몸뚱이를 통해서 시대와 역사를 비판하는 이성을 갖춘 육체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김수이(평론가)의 글 '몸시의 출현과 반란에 대한 기억'(서정은 진화한다. 창비간)에서 "최승호의 시에서 육체는 '몸'으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다." 라고 표현한 것처럼 근래에는 이성과 조화된 가치 있는 육체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시에서 나타나는 육체는 죽음이나 고통이 아닌 생산을 위한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는 보다 더 가치 있는 육체의 정제된 표현이며, 더욱이나 감성을 비워가는 통 속에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채워가는 이성의 통으로 표현된다. 그렇다. 비워간다는 것은 또 다른 충만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원숙한 삶의 자세와 새로운 지혜로 채워지는 정말 무거운 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시의 참된 시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를 직접 소재로 해서 자신의 또 다른 무형의 통을 채워가는 자신의 경건한 삶의 자세를 나타낸 시인이 손수 자신의 몸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문학 평론가-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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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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