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교훈/장영희

2009.07.27 16:21

김영교 조회 수:313 추천:47

            
어영부영하다 보니 계획도 꿈도 많았던 1년 예정의 안식년이 벌써 한 학기가 지나고 해도 바뀌었다. 불경기 때문인지 지난 성탄은 왠지 캐럴 소리도 별로 안 들리고 시내에 크리스마스 장식도 드문드문 눈에 띌 뿐, 이전처럼 성탄 분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더니 새 해 들어서도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야심 찬 활기 보다는 그저 별로 새로운 것도 없는, 구태의연하게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이다. 게다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병원에 들락거리며 백혈구 적혈구 수치에만 연연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별로 재미없고 그저 심드렁한 날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 듯, 만나는 사람들도 어딘가 지친 표정이고 신문이나 TV는 늘 시끄러운 정치판 이야기뿐이다.
오늘은 방을 정리하다가 지난 학기 학생들에게 내줬던 영작문 숙제 몇 개를 발견했다. 늦게 제출해서 읽기만 하고 돌려주지 못한 것들이었다. 영작문 숙제 주제는 교과서에 나왔던 ‘행복이란 무엇인가’이었다.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E.B. 화이트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 (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남자(man)에 대해 쓰는 것’ 이라고 했다. 즉 거창하고 추상적인 이론이나 일반론은 설득력이 없고, 각 개인이 삶에서 겪는 드라마나 애환에 대해 쓸 때에만 독자들의 동감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글쓰기의 이론을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지만 내가 학생들 숙제를 읽을 때 지루함을 덜기 위한 의도도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추상적인 글 보다는 좀 재미있는 일화 위주의 글을 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잊지 못할 사람’, 또는 ‘잊지 못할 그날’에 대해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아무리 어린 사람들일지라도 누구에게나 인상에 남는 사람이나 돌이켜 봐서 기억에 남는 시간이 있을 것이므로 학생들이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읽는 내 입장에서도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돌려주지 못한 숙제 중 김민식이라는 학생이 쓴 “내가 행복의 교훈을 배운 잊지 못할 그날” 이라는 글이 있었다. 좀 긴 제목의 글인데,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내게 언제 행복을 느끼느냐고 물으면 나는 ‘화장실에 갈 때, 음식을 먹을 때, 걸어 다닐 때 …’라고 답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고 동물적인 답변 아니냐고 반문들을 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내게 ‘잊지 못할 그날’은 3년 전 11월 4일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수능시험 보기 바로 이틀 전이었다. 방과 후에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뛰어 들어오시면서 외치셨다. ‘너희 반 친구 둘이 학교 앞에서 트럭에 치어 병원에 실려 갔다!”
우리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명수와 병호는 옴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크게 다친 병호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생명이 위태롭다고 했다. 병호는 곧 수술실로 옮겨졌고, 친구들과 나는 거의 기절상태이신 병호 어머니와 함께 수술이 잘 되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빌었다. ‘정말 하느님이 계시다면 병호를 꼭 살려 주세요. 제가 수능시험을 아주 못 봐서 대학에 떨어져도 좋으니 내 친구 병호를 살려 주세요.’ 당시 그것은 내가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희생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나오셨다. 아무 말도 안 하셨지만, 표정이 병호의 죽음을 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때,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던 명수가 깨어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화장실 가고 싶다구!’
나는 친구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서 숨을 쉬지 않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살아서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명수야, 축하한다. 깨어나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다.’
  
그렇게 난 친구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행복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내 발로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고, 그냥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까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고, 친구들과 운동하고 조카들과 놀고, 그런 행복들은 순전히 보너스인데, 내 삶은 그런 보너스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자기 말에 대해 확신한 나머지 민식이는 느낌표를 두 개씩이나 치면서 글을 끝내고 있었다. 물론 문법적인 오류가 여기저기 있었지만, 추상적 의미의 행복론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경험에서 행복을 설명한 좋은 글이었다.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 후생가외(厚生可畏),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더니 민식이는 오히려 일상이 따분하고 재미없고 심드렁하다고 아우성치는 선생에게 멋진 행복론을 가르친 셈이다. 민식이 말마따나 행복의 기준이 밥 먹고 소화 잘 시켜서 멀쩡히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내게 나머지는 무조건 다 그야말로 보너스, 대박 행복인 셈이다. 이렇게 좋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 아프다는 이유로 오랜만에 이렇게 긴 쉼을 가지는 것도 행운이고, 가족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행운이고, 병원 오가는 길에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이고 …
민식이의 글을 읽으니 얼마 전 전신마비 구족화가이자 시인인 이상열씨가 쓴 ‘새 해 소망’이라는 시도 생각난다. “새 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게 하소서 ….”
그렇다. 이렇게 열 손가락 마음대로 움직여서 아냐시오 독자들과 만나는 것도 기막힌 행운이다.

註: 이 글은 장영희 교수가 돌아가시기 전 예수 후원회에서 발행하는 “이냐시오의 벗들” 2009년 2월호에 쓴 최근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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