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2007.11.28 21:31
류시화 시인이 인도 여행을 할 때
음악을 전공하는 '쑤닐'이라는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날 저녁에 라비 샹카(Ravi Shankar)의 시타르 연주회가 있으니
같이 들으러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라비 샹카는 인도 전통 현악기인 시타르 연주의 세계적인 대가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류시화는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던 대가의 음악을 듣게 된 행운에
컵의 물을 쏟을 정도로 흥분을 했다.
그날 저녁 여덟 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고,
류시화는 일곱 시 반부터 약속 장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친구는 아홉 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그는 쑤닐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다고 생각하고는
부랴부랴 릭샤(인도의 삼륜차)를 불러 타고 연주회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쑤닐은 연주회장 맨 앞줄에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다.
자기와 약속을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고서는
저 혼자 먼저 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화가 난 류시화는
자신을 몇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는 태연하게 앞자리에
앉아 있는 쑤닐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 갈겼다.
그러고는 돌아보는 그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유를 따져 물었는데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아, 그래요. 만나기로 했었지요." 하고 태연히 대답을 했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난 류시화가 그를 노려보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쑤닐이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내 잘못을 갖고 자신까지도 잘못된 감정에 휘말리는군요.
그건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요?"
그 지적에 놀라 쑤닐을 보는 순간
띠융띠융 하며 라비 샹카의 시타르 음이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쑤닐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자세,
특히 타인 때문에 평정을 잃곤 하는 우리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때때로 남 때문에 화가 나고 마음의 평화를 잃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설령 남이 나를 좀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가 정말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만 정말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나를 무시하고 화나게 만든 그사람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내 자신이 문제일 수 있다.
삶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부질없는 것들 때문에 평화를 잃지 않으며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넘어 서서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데서 온다...
-류해욱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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