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전준영

2007.11.29 17:54

김영교 조회 수:693 추천:38

필자가 태어난 효자동 118번지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병원을 개업 하였다. 지금은 청와대가 그 지역을 파킹장과 분수대 관광지가 되어있다. 필자가 세상에 태어 날때 허영숙 이광수 부인이며 우리 동내에서 어머니 보다 산부인과를 진명여고 앞에서 먼저 개업하고 있어 허영숙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단다. 그래선지 어릴적 기억으론 1950년 6.25 전쟁나기 전까지 자주 이광수 작가가 살고있는 허영숙 산부인과를 어머니 따라 많이 놀러가 허영숙의사 아들 영근, 정란, 정화 3남매들이 우리들을 동생같이 대해 주었든 기억이난다. 필자가 직장 생활을 진해에서 하면서도 가끔 허영숙 여사께 서신도 띄우고 답장도 받고 시외 전화하면 준영이 잘하고 있지하며 아들 대하듯하여 항상 큰 어머니 대하듯이 안부를 물어보곤 하였다. 가끔은 소설을 탈고 하였다며 보내 주시든 기억도 떠오른다. 금년 이북에 다녀온 기자가 평양 용성구역 재북인사 묘소에서 쓸쓸히 잠들어 있는 이광수 묘를 다녀와 상단 사진을 올렸기에 어릴적 기억이나 여기 몇자 올려 봅니다 소설가·평론가·언론인.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 고주 평안북도 정주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3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1905년 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다가 학비곤란으로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 明治學院에 편입, 이 무렵 홍명희 문일평 등과 공부하면서 시·소설·문학론·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15년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 이듬해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7년 한국 근대장편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과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191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으며,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 안창호의 민족운동에 공명하여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하고 계몽적인 논설을 많이 썼다. 1921년 귀국한 뒤 개벽에 <민족개조론(1922)>을 발표하고,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민족적 경륜>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선도자(1923)> <허생전(1924)> <재생(1924)>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8)> <혁명가의 아내(1930)> <흙(1932)>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사랑, 무명을 발표하였다. 1939년 조선문인협회장이 되었고, 이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본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중 병보석되었다가, 1950년 7월15일 납북되어 자강도 만포시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되는데, 초기작품은 자유연애의 고취와 조혼폐습의 거부 등 반봉건·계몽적 성격이 강하며,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편 사회적 현실을 천착하지 못한 면을 보여 친일문학가로 보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허영숙 여사와는 이광수 작가가 일본서 동경 여의전 부속 병원에 입원시 여의전 졸업반 이었든 허영숙을 만나 두번째 결혼을 하여 폐병도 고치고 많이 건강을 찾았다고 한다. 1975년 문학비를 허영숙여사가 세우고 개막식 직전에 80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장남 영근(존호프킨스 물리학교수)의 장녀이며 이광수의 손녀(이성희박사)가 하바드대학 한국문학을 전공하여 할아버지의 한국문학의 개척자임을 연구하면서 "무정" Heartless를 영역본으로 발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시에 친일함으로 국민 사랑에서 멀어진 감이 아쉬우나 우리나라의 대문호임은 아무도 부인할수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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