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필쓰기/박영뵤

2009.06.15 13:53

박영보 조회 수:769 추천:32

박영보의 수필 <수필이란 생각나는 대로 일정한 형식 없이 써나가는 산문의 하나>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이 말이 제가 수필을 쓰게 된 동기이고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글이 수필이라고 한다면 나라고 해서 쓰지 못할 게 무엇이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버려진 몸이 되어 쓰는 일에서 벗어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박영보의 수필 쓰기: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글을 써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쓰기에 앞서 우선 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선 제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문제점들을 생각해 보며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 한편의 수필 이라도 쓰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 즉 Layout/Planning을 할 때 설정된 주제에 대한 계획을 세워 봅니다. 수필과 신변잡기: 수필에 대한 강의나 세미나 같은 데에 가보면 발표자들의 입을 통하여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신변잡사>나 <신변잡기> 라는 말일 것입니다. <잡사>나 <잡기>를 한글사전에서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 일의 기록 또는 자질구레한 것이 뒤섞인 허름한 물건>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마치 저의 수필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소재나 주제를 생활주변에서 건져내고 대단치도 않은 글 거리를 가지고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바로 제 수필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길이: 작품의 길이에 대한 많은 지적들을 하기도 하는데 저는 글을 함축성 있게 압축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가지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써 나가는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저의 수필에는 잔가지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지적을 해 주는 이도 있어 이를 시정해 보려니 계획했던 내용 중에서 줄이거나 빼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전체적인 흐름이나 모양새가 허물어지게 됩니다. 소재/주제: 우리 생활 주변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으며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도 많습니다. 티끌같이 작은 개미들의 행렬이나 발에 밟혀 뭉개지면서도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질경이 풀의 생명력을 바라다 보는 눈, 또는 한 톨의 알곡이 그렇게나 귀하게 여겨지던 보릿고개 시절에 대한 추억,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좋은 글 거리가 됩니다. 이런 소재들을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가며 글로 표현해 가다 보면 한편의 수필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사회문제를 다루며 이런 일들을 빗댄 글을 쓰기도 하지만 마치 무슨 비평가나 칼럼을 쓰는 듯한 형식은 피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분야에 대하여는 아예 접근을 피하고 있습니다. 전문성이 없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수필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내준 숙제를 해간 리포트의 형식으로 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을 다룬 작품을 보면 작가나 작품에 대한 소개, 시대적 배경, 작품이 나오게 된 동기나 환경 등, 작품 해설 집이나 관련분야의 역사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해당 분야에 문외한이라도 해설 집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하면 금방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재정리 해놓는다는 것은 창의에 의한 수필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목: 쓰고자 하는 글의 제목을 미리 정한 다음 써 나가기도 하고, 완성 시켜놓은 후 글의 내용에 걸 맞는 제목을 생각해 내기도 합니다. 글의 내용에 비해 너무 ‘튀는’ 식의 제목도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너무 보편적이거나 설명적이면 특별한 재미나 특징도 없어 보일 수도 있고 독자들의 호감도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독자가 제목만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미리 짐작을 할 수 있는 식의 제목도 피하고 있습니다. 도입부분: 도입부분은 약간 길어질 수도 있지만 대개 다섯 줄 내외의 길이를 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작부터 주제의 내용에 대한 완전 노출은 피하고 있습니다. 미리 다 열어놓으면 호기심이나 관심이 반감될 것입니다.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추리해가며 읽을 수 있는 여운을 남겨두기 위함입니다. 본문: 설명 조나 군더더기 없이 당초의 의도했던 의미부여를 위한 부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읽는 이들에게는 지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라이트가 없다거나 미약하다는 지적입니다. 도입부분 이후 본문 내용의 핵심을 체계 있게 다루는 테크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입부분과 마감부분을 체계 있게 연관시켜주는 알맹이 문단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야 하는데 이런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겠습니다. 마감: 글의 흐름, 즉 도입부분과 본문 내용, 그리고 마무리 지을 때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연관성이 있도록 엮 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는 필자가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나 이유 또는 목적에 대한 이해 즉 의미부여 에 대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가며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가끔 마지막 문 장을 <~까. >처럼 의문형으로 마감하는 경우도 읽는 이들과 함께 하자는 의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결론 (Solution): 제 수필에 대하여 많은 분들로부터 너무 길다거나 너무 소상하게 늘어놔 독자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 길면 독자가 재미가 없어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소설의 예로 본다면 그 길이에 상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장편으로 상하권, 1권에서 10여권에 달하는 연작 소설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손을 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저의 글이 그렇게 손을 떼지 못할 만큼 재미가 있으며 문학성도 있는 수필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겠지요. 생활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이 대부분의 소재나 주제로 삼고 있는 저의 글은 <신변잡기나 잡사>로 취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명 수필가들의 수필을 읽어봐도 같은 생활주변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유명인들의 글은 모두가 훌륭한 수필이나 에세이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저 같은 사람의 글은 신변잡기로 치부돼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작품성은 별로지만 유명감독이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수많은 관객이 동원되는 흥행을 하는 것과 비유를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독자에게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을 두라는 것은 너무 설명적이라는 뜻일 것 같기도 하니 이점 또한 제가 고쳐나가야 할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수필가로서의 자질을 갖추자면 앞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영보의 수필 쓰기 국어사전에는 <수필이란 생각나는 대로 일정한 형식 없이 써나가는 산문의 하나>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이것이 제가 수필을 쓰게 된 동기이고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정도의 글이 수필이라면 나라고 해서 쓰지 못할게 무엇이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버려진 몸이 되어 벗어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박영보의 수필 쓰기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글을 써야 하는 입장이고 보니 쓰기에 앞서 우선 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선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더듬어 본 후 마지막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 한편의 수필이라도 쓰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 즉 설정된 주제에 대한 Layout이 필요할 것인바 이를 위한 사전 계획을 세웁니다. 수필과 신변잡기 수필에 대한 강의나 세미나 같은 데에 가보면 꽤나 알려져 있는 수필가들의 입을 통하여 항상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신변잡사>나 <신변잡기> 라는 말일 것입니다. <잡사>나 <잡기>라는 말을 사전에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 일의 기록 또는 자질구레한 것이 뒤섞인 허름한 물건>이라고 나와 있더군요. 마치 저의 수필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소재나 주제를 생활주변에서 건져낸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장광설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바로 제 수필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길이 작품의 길이에 대한 많은 지적들을 하기도 하는데 저는 글을 함축성 있게 압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가지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써 나가는 글이 필요이상으로 길어지기도 합니다. 저의 수필에는 잔가지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는 지적을 해 주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자면 당초에 계획했던 내용을 줄이거나 빼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전체적인 흐름이나 모양새가 허물어지게 됩니다. 제목 쓰고자 하는 글의 제목을 미리 정한 다음 써 나가기도 하고, 완성 시켜놓은 후 글의 내용에 걸 맞는 제목 을 생각해 내기도 합니다. 글의 내용에 비해 너무 '튀는' 식의 제목도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너무 보편 적이거나 설명적이면 독자들에게는 호감도 가지 않고 특징도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 입니다. 독자가 제목만 보고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미리 짐작을 할 수 있는 식의 제목은 피하려고 합니다. 소재/주제 우리 생활 주변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으며 일어나 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도 많습니다. 티끌같이 작은 개미들의 행렬이나 발에 밟혀 뭉개지면서도 죽지 않 고 되살아나는 질경이 풀의 생명력을 바라다 보는 눈, 또는 한 톨의 알곡이 그렇게나 귀하게 여겨지던 보 리 고개 시절에 대한 추억,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좋은 글 거리가 됩니다. 이런 소재들을 우리의 삶에 대 입 시켜가며 글로 표현해 가다 보면 한편의 수필이 되기도 합니다. 가끔 사회문제를 다루며 이런 일들을 빗댄 글을 쓰기도 하지만 마치 무슨 비평가나 칼럼을 쓰는 듯한 형식은 피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분야에 대하여는 아예 접근을 피하고 있습니다. 전문성이 없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수필이라 기 보다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내준 숙제를 해간 리포트의 형식으로 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 나 미술을 다룬 작품을 보면 작가나 작품에 대한 소개, 시대적 배경, 작품이 나오게 된 동기나 환경 등, 작품 해설 집이나 관련분야의 역사책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해당 분야에 문외한이라도 해설 집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하면 금방 찾아볼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재정리 해놓는다는 것은 창의에 의한 수필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입부분 도입부분은 약간 길어질 수도 있지만 대개 다섯 줄 정도의 길이를 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작부터 주제 의 내용에 대한 완전 노출은 피하고 있습니다. 미리 다 열어놓으면 호기심이나 관심이 반감될 것입니다. 읽는 이들의 상상력으로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추리해가며 읽을 수 있는 여운을 두기 위함입니다. 본문 설명 조나 군더더기 없이 당초의 의도했던 의미부여를 위한 부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읽는 이들에게는 지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라이트가 없다거나 미약하다는 지적입니다. 도입부분 이후 본문 내용 의 핵심을 체계 있게 다루는 테크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도입부분과 마감부분을 체계 있게 연관시켜 주는 알맹이 문단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야 하는데 이런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겠습니다. 마감 글의 흐름, 즉 도입부분과 본문 내용, 그리고 마무리 지을 때까지 이어지는 내용이 연관성이 있도록 엮어 가고 있습니다. 독자는 필자가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나 이유 또는 목적에 대한 이해 즉 의미부여에 대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가며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가끔 마지막 문장을 <~까. >처럼 의문형으로 마감하는 경우도 읽는 이들과 함께 하자는 의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결론 (Solution) 제 수필에 대하여 많은 분들로부터 너무 길다거나 너무 소상하게 늘어놔 독자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 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너무 길면 독자가 재미가 없어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소설의 예로 본다면 그 길이에 상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장편으로 상하권, 1권에서 10여권에 달하는 연작 소설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손을 떼지 못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저의 글이 그렇게 손을 떼지 못할 만큼 재미가 있으며 문학성도 있는 수필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 겠지요. 생활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이 대부분의 소재나 주제로 삼고 있는 저의 글은 <신변잡기나 잡사>로 취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명 수필가들의 글도 이러한 생활주변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유명인 들의 글은 모두가 수필이나 에세이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저 같은 사람의 글은 신변잡기 가 돼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작품성은 별로지만 유명감독이나 배우가 출연 하여 만들어진 영화는 수많은 관객이 동원되는 흥행을 하는 것과 비유를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독자에게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백을 두라는 것은 너무 설명적이라는 뜻일 것 같기도 하니 이점 또한 고쳐나가야 할 사항이겠습니다. 수필가로서의 자질을 갖추자면 앞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수필작법 유 연 선 <나의 수필작법>이란 제목을 붙이고 보니 내게 수필을 쓰는 남다른 방법이 있을까. 장인(匠人)이라면 축적된 기술이라도 있겠지만 글을 쓰는데도 노하우가 있을까. 이제 겨우 글쓰는 재미를 붙인 풋내기가 작법이란 말이 합당하기나 한가. 내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남기고 싶어서 글을 쓰니까 수필(隨筆)이란 말도 부끄럽다. ‘붓 가는 대로‘ 써도 될 만큼 문장력이 뛰어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붓 가는 대로‘가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작법‘이란 말도 별난 사람도 있구나 하고 지나쳐주면 고맙겠다. ‘왜 수필을 쓰는가‘하는 생각부터 밝혀야겠다. 한 인간의 적극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나온 산물이 수필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성(自省)의 소리다.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랑하지 않고는 수필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데도 사람마다 특별한 버릇이 있듯이 글을 쓰는데도 남다른 버릇이 있다. 어떤 친구는 글이 정리 될 때까지 손을 씻는가 하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주위에 있는 종이쪽지를 다 씹어버리는 친구도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잠부터 푹 잔다. 너무 자서 잠을 자는지 깨어있는지 분별이 되지 않을 때까지 자고 일어나서 단숨에 쓴다. 찔끔찔끔 시간을 내어 쓰면 글을 쓰는 신명도 사라지고 글의 맥락도 단절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글감이다. 어떤 일을 체험하고 나면 “글감이 되겠구나.“하는 예감을 중요시한다. 글감이 떠오르면 메모했다가 다시 음미해본다. 일상생활을 통해 글감과 연계되는 사연들을 다 떠올려본다. 관련자료를 찾아 전문적인 식견도 높인다. 글감을 찾는 일이 수석을 탐석하는 것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좋은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탐석하듯 여행도 한다. 미쳐 생각을 못했던 일들이 생소한 체험을 통해 기억 저 편에 있던 편린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초고가 완성되면 덮어둔다. 잊혀질 때까지 다른 글감을 찾아다니거나 딴전을 피운다. 그 작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추고를 시작한다. 추고하는 일은 진력나는 싸움이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란 말에 의문을 나타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문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감성이 신선하지 못하니까 자꾸 고친다. 제목까지 바꾸어가면서 글을 다듬고 문장을 손질한다. 농익은 술이 맛을 더 내듯 오랫동안 고친 글과 단숨에 써서 발표한 글을 뒤에 비교해 보면 오랫동안 다듬고 고친 글이 더 매끄러움을 느낀다. 컴퓨터가 없었다면 나는 글쓰는 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거나 추고하는데 편리하다. 처음에 표현하려고 했던 내용이 180도 달라져도 괜찮고 수십 번 고쳐도 괜찮다. 버리기 아까운 얘깃거리는 다른 메모장에 옮긴다. 수필 쓰기가 소설이나 시 쓰기보다 어렵다는 말을 수 없이 되뇐다. 추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필을 쓰는 자부심을 갖는다. 너무 고쳐서 걸레가 되어 버리면 글재주 없음을 탓하면서 딴전을 부린다. 그러나 얼마동안의 시간이 흐르면 글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학은 독자와 교감하면서 감동을 준다. 감동을 주는 글은 재미있다. 독자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는 전문성이 있어야한다. 그 전문성을 찾아 나선다. 남이 체험하지 못한 일, 남이 모르는 일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관련 서적도 찾아보고, 몰두하여 관찰도 하고, 몸으로 부딪혀 체험한다. 이 시대에 잊혀져 가는 전통양식을 복원하는 일도 중요하다. 선인들의 슬기를 되찾기 위해 잊혀져 가는 말을 찾고 어원도 밝히고 풍속도 남기려 한다. 재미를 통해 지적인 쾌감도 줘야한다는 생각에서다. 짧은 시간에 긴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다. 첫 수필집 <금자라를 찾아서>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통찰하고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기보다 이런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게 살고 싶다는 작은 바램을 풀어놓은 글이 많다. 내가 살아온 자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신명을 얻은 <금자라 이야기>는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쓴 글이다. 내 딴에는 신선한 소재를 찾았다고 쾌재를 불렀지만 잘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충분한 자료 조사나 고증을 못한 채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의 사랑을 조명해 보면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으려고 했다. 사전에도 없는 이름 금자라라는 곤충을 복원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글이 발표되자 학질에 먹었다는 증인이 나타나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온다는 희귀한 곤충이란 얘기도 들려왔다. 신바람이 나서 <금자라 이야기․그 이후>란 글을 또 썼고 개작하여 <금자라를 찾아서>란 제목으로 책까지 냈다. 어느 문우의 부인이 글을 읽고 금자라를 붙들었다고 알려왔다. 곤충도감에 나오는 코딱지 만한 그림 한 장만 입수한 터에 60년만에 실물을 만나는 기쁨까지 맛볼 수 있었다. 그 금자라가 ‘금자라남생이잎벌레‘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작품을 쓸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 자꾸 밝혀지는 것도 기쁜 일이다. 과학작품이 아닌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써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다. 앞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만남 얘기도 쓸 계획이다. ‘금자라 작가‘란 닉네임을 얻는 것도 즐겁고 행복하다. 그까짓 벌레 한 마리를 가지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금자라를 통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으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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