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쓴 수필 / 10 이현복

2011.10.09 16:15

김영교 조회 수:303 추천:34

<수필> 수필로 쓴 수필론
    
“수필이란 무엇인가”, “수필을 어떻게 쓰는가?” 자주 듣는 질문이다. 아무리 생각을 짜내도 대답이 궁색하다. 아니 없다는 것이 올바른 답일 것이다. 언젠가 어느 문학잡지사에서 ‘수필작법’ 연재를 제의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쓴다고 사양하였다. 수필은 어의 그대로의 수필이고, 수필작법은 일반 문장작법이면 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문학강의, 수필강의를 하고 문화센터 수필교실에서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글은 그 사람이다.’라며 ‘수필작품은 그 사람이다.’라며,  문학은 사람사는 이야기로 ‘수필작품은 그 사람의 한토막 자서전으로 그 사람 삶의 스냅사진 같은 글이다’ 라고 견해를 펴고, ‘삶은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으로 ’수필은 그 과정에서 쓴 자조의 글이요, 자기 구원의 글이다.‘라는 수필에 대한 견해를 펴왔다. 나는 나 이외의 수필론을 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수필에 있어서 공통적인 목표나 독특한 체계적인 작법이 있을 리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나의 지론이 이다.  더구나 이를 체계로 세워서 이론적으로 수필은 이런 거다. 저런 거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라고 정의를 내려 본 적도 없고, 주관을 고집한 적도 없다.   문학 장르 중에서도 특히 수필은 어디까지나 개인, 개인에 속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자유롭고 다양하기 때문에 수필은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열 사람이면 열 가지, 백 사람이면, 백 가지 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공약수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0. 문학의 한 형태로서의 에세이는 보통 산문으로 엮어지는 적당한 길이의 작문으로서,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한 주제의 현상적인 상태, 엄격히 말해서 작가 자신을 감동시키는 그런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다.

유명한 에세이스트인 존슨 박사는 에세이를 정의하여 “불규칙하고 소하되지 않은 작품”이다. (로스 <대영백과사전>)
  
0. 에세이는 어떤 특수한 주제, 또는 한 주제의 일면에 관한 적당한 길이의 산문이다. (머리<새영어사전>)

0. 에세이란 대체로 짧은 편이고, 설화에 주력하지 않는 산문작품이다. (윌리암즈<영어에세이서>)


이와 같이 에세이의 공약수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모호함이 이를 말함이다.

에세이의 창시자인 몽떼뉴는 그의 <에세>라는 표제를 붙여 시도, 시론한 것으로 그는 독자에게 말하면서에서 이 <에세>는 “내 사사로운 개인을 위하여” 쓴 것이며, “내 자신이 이 책의 소재다.”라고 고백한 것은 수필 이론에는 정론이 있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말함이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로 삶은 어떤 주의와 이론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듯이 수필도 이와 같다는 것이 내 소견이다.  

문학이론가의 <문학론>,  <수필론>을 읽고 그 이론가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이론은 이론대로, 작품은 작품대로임을 알게 됨은 나의 좁은 식견이라 치부한다.  

전체주의국가에서는 모르지만 자유와 평등을 표방하는 민주국가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 길만이 삶의 길이다.’라고 목표지향이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리듯이 ‘수필은 이래야 한다.’ ‘수필은 이렇게 써야만 한다.’ ‘오늘날 수필의 과제.’, ‘오늘날 수필의 나아갈 길은.’ 등등 연구 발표회나 세미나에서 내 걸고 있는 것들이 나에게는 공허한 메아리가 됨을 어찌하랴.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문학의 한 장르인 수필도 통일된 이론, 통일된 정론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수필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개인의 생활로 개인의 생각, 개인의 느낌, 개인의 경험에 바탕한 개인의 인생관, 자연관, 사회관으로 개인의 철학이다. 개개인의 삶에 정형화한 통일이란 있을 수 있는가를 묻고, 그것은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삶에 대한 견해요 수필에 대한 견해다.

수필은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삶의 철학이다.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가는 나를 사는 철학이다. 따라서 수필은 언어의 미학이라든지, 강조와 비유의 수사라든지, 이미지의 창조라든지, 언어예술의 조각이라 하는 이론을 넘어서 수필은 ‘삶의 실감’이며 ‘생존의 증언’이며 ‘존재의 확인’이며 ‘삶의 지향’의 형상화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필은 이즘(주의)이나 에콜(유파)이니 하는 것을 부정하고, 집단화 조직화도 부정한다. 자신의 삶을 살며, 자기만의 수필을 쓰는 것이다.

수필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는 풍부한 경험, 진실한 생각, 순수한 느낌, 자아의 정체성 그리고 긍정적인 자애와 합일적인 사랑이고, 명확하고 정확한 표현, 정교한 구성 그리고 선명한 주제,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지 목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진실한 작품은 보편성을 얻어 오래 남을 것이며, 진실이 결여된 작품은 일시적인 유희, 유행 같은 작품이나 체와 척으로 가식돤 작품은 머지않아 소멸될 것이다.

지금의 수필은

1. 대화의 메시지가 있는 수필
2. 공감, 감화가 있는 수필
3. 재미가 아닌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수필
4. 변화의 새로움을 주는 수필
5. 나의 존재, 나의 생존에 일깨움을 주는 수필
6. 위안과 격려로 마음에 고요를 주는 수필

수필을 위한 수필이 아닌 수필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수필관을 가지고 수필을 이야기해 왔다.

지금은 허황된 이론이나 주의로 사는 시대가 아니다. 건조한 다다이즘, 이미지가 없는 쉬르리얼리즘, 상식을 벗어난 모더니즘 등등 ‘글 따로 사람 따로’ 사는 시대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고로 존재하는 시대다. 따라서 수필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며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글이다.

‘글이 그 사람’인 글이 수필이다. 꾸밈과 거짓 허구가 없는 아름다운 글이 수필이다. 삶은 메아리다. 삶의 메아리 같은 글이 수필이 지닌 속성이다. 어떤 삶이 아닌 문학을 위한 문학을 하는 어떤 평자는 이런 글을 신변잡기라고 평가 절하한다. 어쩌랴 그 평자의 수필관임을....

이렇게 나는 수필을 체계적인 학문으로서의 수필을 전개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구체적인 수필작품을 통해서 수필교실을 전개해 왔다. 논리로서가 아니라 정서로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감동, 감격 그 공감으로서, 애콜이나 이즘이 아닌 개성으로서, 역사나 전통이 아니라 철저한 자아의 실현, 자아 구원으로서의 수필을 다루어왔다.

아름답고, 이해하기 쉽고,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생생한 감동의 작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수필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이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영원성을 지닌 인간생존의 보편성을 내포한 작품, 개성적인 개인을 살면서 개성을 초월한 개성의 보편성을 지닌 작품이 참다운 지금의 수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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