볃명을 모른다

2012.01.21 09:41

김영교 조회 수:266 추천:9

病名을 모른다


                   사람마다 腎臟이 두 개인데

                   오른쪽 신장에 두꺼비가 붙어 있어

                   하나는 잘라냈다

                   尿管도 안좋아

                   치료받고 있지만

                   나는 나의 병명을 모른다



                   춤을 더 오래 보러가고 싶고

                   춤추는 사람을 더 오래 사랑하고 싶고

                   그 곁에 있고 싶은데

                   나는 나의 병명을 모른다



                  - 월간『현대 시학』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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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 시인하면 먼저 '문학과 지성 시인선'의 표지 캐리커처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홍익대 서양화과 동기인 이제하 시인과 함께 그림을 맡아 그렸고, 「현대시학」과「시대문학」에도 예술가들의 인물 소묘를 그렸었다. 시인은 시와 그림 뿐 아니라 무용과 음악계에도 널리 알려진 전방위 예술가였다. 특히 '한국 무용계의 산증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용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고, 공연전문지인 <춤> <공간> <객석> 등에 춤에 관한 평론을 오랫동안 써온 무용평론가이기도 했다.

‘김종삼 이후 마지막 보헤미안’ 등 그에게 붙여진 수식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다소 시니컬하고 병약해 뵈는 얼굴과 자그마한 체구로 담배를 줄지어 물고 살았던 그는 자신만의 세계와 미학에 푹 빠져 산 인물이었다. 고약한 항암치료 탓에 빠져 버린 머리를 감추기 위해 노상 벙거지를 꾹 눌러쓰고 다녔다. 밥 먹을 때와 잠잘 때를 빼고는 모자 벗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아호를 草芥訥人(초개눌인)이라고 했다. 지푸라기처럼 하찮고 어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뜻이다. 자신을 한껏 낮춘 의미다.

그런 그가 2007년 71세에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이 시를 쓰고 1년 남짓 지난 무렵이었다. 암 투병 중에도 죽기 직전까지 대학로 공연장 지정석을 지켰으며, 공연예술 월간지 '객석'에 무용칼럼을 쓰는 등 마지막까지 집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춤 사랑은 실로 대단했다. 어떤 사람이 장욱진 화백에게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듯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자기에게도 묻는다면 ‘사시사철 춤 보러 다니는 구경꾼’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말했다.

생전 그를 딱 한번 본 일이 있다. 그가 시인이고 춤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 줄은 까맣게 몰랐던 80년 ‘서울의 봄’무렵이었다. 생뚱맞게도 그가 외환은행에서 ‘조사월보’의 편집 일을 하고 있을 때 한국은행에 자료 협조차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전혀 은행원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게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 그가 시집 17권, 무용평론집 12권, 산문집 12권, 음악평론집 2권 등 모두 합쳐 56권이나 책을 낸 훗날 그 김영태일 줄이야...

권순진
  
15 임수자  김영태 화가,시인은 15회 정청자의 언니 정복생(9회)의 부군이십니다.
정복생은 화가이시며 가죽인형 조형가입니다.

김영태시인은 11회 김영교 시인의 시집의 표지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12·01·20 02:38

11 김영교  수자교장의 활약! 잊을 번한 좋은 시, 고마워요.
복생언니와 아들 목우를 엘에이 전시회 시상식때 만나뵈웠습니다.
뉴욕서 뵈운 후 반세기만에
영태화백 가시고 장사익의 조가 찔래꽃 헌화의 강화도 전등사 수목장 그 이후
있었던 해후
그 감격 그 감회란...
제 작품집 7권 표지화 모두 압권의 그림 들
그 인연과 투병, 감사와 우정 잊을 수없습니다.
초개수첩에 관한 제 수필
다음 기회에 올리겠습니다.
그리움의 나무, 이렇게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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