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 김태길(金泰吉, 1920-2009)

2011.01.11 22:52

김영교 조회 수:288 추천:43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有言無言)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중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請託)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 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神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墮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 내용 연구 묘방(妙方): 교묘한 방법 매명(賣名): 이름을 파는 행위 손색(遜色): 견주어 보아 모자라는 점. 영합(迎合): 남의 마음에 들도록 힘씀. 현학(衒學): 학문이 있음을 뽐냄. ■ 이해와 감상 글쓰기가 가지는 덕성, 자신의 글쓰기 체험, 글쓰는 이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간결한 문체로 서술한 글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게 무엇인가를 체험적에 입각해서 쓴 글이다. 지은이는 '자기를 차분히 정리할 목적'의 글쓰기에 가치를 둔다.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헝클어진 감정을 정리하는 방편으로서의 글쓰기를 권한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화하고, 객관화한 거리는 마음의 여유를 주는 법이니 '쓰고 싶은 말을 무엇이건 할 수 있는, 즐거운 작업이 바로 글쓰기다'라는게 지은이의 수필 개념이다. 그런 글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깃들기 마련이라' 이름이 알려지고, 그러다 보면 청탁이 온다. 그러나 강제와 약속으로 쓰는 글은 질이 떨어지고 고역이 돼 버린다.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 같은 글쓰기는 경계해야 한다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이 경험과 체험이 기록이라고 본다면 그 경험은 열린 눈으로 실천하는 경험이어야 하고, 그 체험은 역시 역사적 정당성, 사회적 가치성을 가질 때 더 바람직한 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글과는 다른 인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글로는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가도 그의 실제적 삶을 알 게 될 때 실망을 하는 수가 종종 있다. 그것은 글과 삶이 괴리되어 있을 때 실망을 하게 된다. 결국 훌륭한 글이란 작가의 진실된 삶이 녹아 있는 글이 참된 글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 수필가 김태길(金泰吉, 1920-2009) 수필가이자, 철학자로 충북 중원군 출신이다. 1943년 일본 제3고등학교 문과, 동경대 법학부 수학하고,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했고, 1960년 미국 홉킨즈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처녀 수필집 <웃는 갈대> 발간했고, 대표작으로 <빛이 그리운 생각들>(65), 장편 수필 <흐르지 않는 세월>(73) 등이 있다. 15 김호중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위에 쓴 김태길 수필가의 글에 공감을 한다. 저속한 싸구려 인용문이 범람하여 극히 오염된 '인터넷 글 문화' 속에서 부고USA 동문과 가족의 관심이 정성껏 담겨있는 창작의 글들이 어두운 밤 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처럼 아름답습니다. 11·01·1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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