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여인들(2)

2011.07.28 11:10

김영교 조회 수:565 추천:55

랭다와 애니 (Linda Molina De Silva) 또 짝사랑 랭다는 시인에게 바람처럼 스처간 여인이다. 그녀는 친구 페르디낭(Ferdinand)의 여동생, 역시 시인은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랭다에게 보낸 詩들만 우리 곁에 남았다. 랭다의 아버지는 무용교사, ‘우아함과 몸가짐’(La Grace et le Maintien)‘ 이란 책을 썼는데 시인은 랭다의 집까지 드나들며 그녀 아버지의 집필을 도왔다. 랭다에게 계속 시를 써서 보내면서 사랑을 구했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나의 가련한 친구여” 정도. 냉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폴리네르가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며 잡지에 실은 시 세편 가운데 랭다에게 보냈던 시가 한편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아폴리네르는 1901년 9월15일자 라 그랑드 프랑스(La Grande France)란 잡지에 ‘혼례(Epousailles)' ’몽상(Lunaire)', '도시와 마음(Ville et Coeur)를 실으므로 시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혼례’라는 시에는 아폴리네르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냉담한 랭다의 자세에 대한 은근한 폄훼가 담겨있다. 혼례 사랑은 어느 날 여름 저녁 부재(不在)와 결혼했네(...) 모든 것이 벌거숭이라면 하늘은 고대 그리스의 모습일것이오 대양(大洋)의 바닷가로 떠난 사랑은 거기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神)인것을 슬퍼한다오 혼자만의 유아독존 세계, 거기서는 자신이 바로 신이다. 타자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랑은 유아독존으로 혼자서 스스로 신이 되지만 타인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神”이기에 슬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랭다가 자신을 계속 받아주지 않자 그녀를 외톨이 신으로 비유하며 그녀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극복할것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는 이쯤서 아폴리네르가 왜 대단한 작가인가를 한번 집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1905-1920년 사이 모든 프랑스 예술 경향에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또 전시대의 문학을 극복 하면서도 전통과 단절없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 준다는 것도 간과 할 수 없는 그의 능력이었다. 초현실주의(Surrelisme)이란 말도 그가 처음 쓴 용어다. ‘티레지아의 젖가슴(Mamelles de Tiresia)'이라는 극작품의 서문을 쓰면서 그는 문학이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되겠지만 단지 자연을 모방만 하는 초보적인 겉치레를 넘어서서 실제를 종합하고 해석하는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초현실주의라고 이름 했다. 또 그는 입체주의 시의 창시자다. 미술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세잔느이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어떠한 창작기법이 모색 되고 있는가를 누구보다 꾀뚫어 보았다.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등이 새로운 시대감각을 표현하기위해 전통에 대한 파괴와 반항을 통한 혁명적 시도를 모색하는 것을 보고 문학에서의 입체파(Cubisme) 미학을 처음 정립 했다. 아예 시와 미술의 운명을 결부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는 대담하고 야릇한 이미지를 연결 하거나 우연히 엿들은 대화를 시에 과감하게 옮겨 적었다. 균형잡히지 않고 무질서한 소재들을 아무렇게나 나열 함으로써 미술에서의 입체파 미학을 고스란히 시에 적용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보들레르가 상징주의로 바꾸어 놓았던 프랑스 시단의 흐름을 현실세계로 바꾸어 놓은 사람도 아폴리네르다. 그는 관념적인 이상추구에 몰두하는 말기 상징주의의 폐단을 벗어나 부엘리에(Bouhelier)의 자연회귀주의의 영향을 받아 있는 그대로의 생활 본연의 모습을 문학에 담기 시작 했다. 그래서 현대시는 아폴리네르로 부터 시작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심지어 시인 막스 쟈콥(Max Jacob)은 20세기를 “아폴리네르의 세기 (Siecle d'Apllinaire)'라고 말할 정도다. 막스 자콥은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과 함께 몽마르트르의 ‘세탁선(Bateau-Lavoir)’에 함께 살았고 아폴리네르가 여기 드나들며 함께 어울렸던 절친한 친구 사이들 이다. 첫사랑 영국처녀 Annie Playden 1901년 여름 아폴리네르는 독일 라인지방에서 드 미요(De Milhau) 자작부인 집 딸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1년을 보낸다. 자작부인은 36살의 과부였고 딸 가브리엘은 아홉살 이었다. 여기서 시인과 동갑내기 영국처녀 애니를 숙명처럼 만나 첫사랑에 빠진다. 애니도 가브리엘을 돌보는 수행가정교사. 마리아, 랭다를 향해 외쳤던 사랑은 어디까지나 풋사랑이고 짝사랑이었다면 애니와는 육체적 사랑에 탐익했던 농도 짙은 열애였고 청혼까지 했건만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비련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아폴리네르는 우리들에게는 수많은 비탄의 시를 남겼다. 거의 모든 문학사가들은 애니가 진정한 아폴리네르의 첫사랑 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라고 꼽는 ‘사랑 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La Chanson du Mal-Aime)'를 비롯 ’애니(Annie)' '작별(L'Adieu)' '랜더가의 이민자(L'Emigrant de Lander Road)'등 속칭 프랑스 시문학 사상 <애니 篇>이라고 일컷는 수작들을 애니와의 열애를 바탕으로 써냈기 때문이다. 스무살의 청춘들이 만나 서로 육체적 희열을 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결혼까지 가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았다. 불행하게도 우선 서로 말이 잘 안통했다. 아폴리네르는 영어가 부족했고 영국처녀는 또 프랑스어가 서툴렀다. 두 청춘은 고용주인 자작부인의 여행계획에 의해 1901년 8월부터 라인강을 따라 쾰른, 베를린, 드레스덴 등을 돌아보는 여정에 오르는데 다음해 3월 뮌헨에 이르러 육체적 사랑놀음을 즐겼던 애니가 갑자기 냉담해 졌다. 의사소통의 문제가 불러온 이해부족이 제일 큰 원인이지만 아폴리네르의 질투도 문제였다. 애니가 한 초등학교교사인 독일 청년과 이야기만해도 아폴리네르는 어쩔줄 몰랐다. 애니는 영국 청교도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치관에 눈뜬 신세대여성 이었다. 서로 즐길 것은 즐기지만 이제 막 시단에 등단한 가난한 시인에게 목줄 맬 이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실연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아폴리네르는 애니와 드 미요 자작부인 가족과 함께 슈투트가르트, 다름슈타트, 혼네프를 도는 석달을 비련의 고통에 몸부림 치다가 1902년 8월말 프랑스어 가정교사 자리를 그만 두고 파리로 돌아와 버린다.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애니를 포기 할수는 없었다. 애니가 자기를 떠난 것은 오해 때문이었다고 확신을 한 그는 1903년 11월 런던으로 향했다. 애니도 드 미요 자작부인집을 나와 영국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연락도 없이 런던 랜더가(Lander Rd)에 있는 애니집을 찿아갔다. 그는 런던 사는 알바니아인 친구 코니차(Konitza)의 도움으로 애니를 다시 만난 것이다. 애니 가족들은 조심스럽게 아폴리네르를 환대 하였다. 9일간 런던에 머문 아폴리네르는 애니를 마침내 설득을 했다. 다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살게되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애니가 파리에 올 것을 생각만 해도 기쁨에 넘친다고 자랑했다. 이듬해 봄까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아뿔사 애니는 짧은 프랑스어로 자신은 파리로 갈 수는 없고 아폴리네르 보고 다시 런던으로 와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아폴리네르가 진심으로 자기를 소중하게 ‘사랑하는 여인’으로 생각한다면 노력은 하겠으나 다시 만나기 전에는 약속할수 없다고 썼다. 이런. 1904년 5월 아폴리네르는 런던으로 다시 갔다. 모든 일이 아주 잘 풀렸다. 한달을 런던에 머물렀다. 훗날 문학사가들이 찿아낸 짧막한 편지의 끝 마무리에 “천 번의 입맞춤을, 그대의 애니가”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나 애니가 1905년 3월쯤 취업차 미국으로 떠남으로 둘의 관계는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아폴리네르로는 느닫없는 일은 아니었고 런던의 친구 코니차로부터 애니가 미국으로 가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편지는 받았다. 이번에는 런던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사랑이 파탄 난 이유는 몇가지 통설만 떠돈다. 첫째 애니가 아폴리네르를 귀찮게 생각해 그를 피할 생각으로 미국으로 떠났다는 설과 아폴리네르는 애니의 미국행을 알면서 사는 형편상 잡을 수가 없었고 애니의 부모가 몹시 반대했다는 이야기 등등...... 미국으로 떠난 애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잘 먹고 잘 살았나? 글쎄다. 1905년 미국에 도착한 그녀는 2년뒤 포스팅스(Postings)라는 사람과 결혼, 25년을 같이 살다가 52살에 과부가 되었다. 곧 잭슨(Jackson)이란 사람집에 집사로 들어가 일했다. 말이 집사지 그게 가정부란 소리 아닌가? 1962년 아폴리네르 연구자들은 캘리포니아의 한 마을 외딴 집에서 8살 아래 동생과 둘이 살고있는 애니를 찿아냈다. 하는 일은 자매가 여행 떠난 사람들의 개를 맡아 돌보아 주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애니는 아폴리네르가 세계적 시인이 된 것도 까맣게 몰랐다. 애니는 자신을 주제로 쓴 수많은 명시들을 읽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찾아온 학자들에게 아폴리네르가 집요하게 청혼 했다고 회상했다. 아폴리네르가 두 번째 런던방문을 끝내고 돌아갈 때 기차창문으로 몸을 반이나 내밀고 손을 흔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애니는 아폴리네르로 부터 받았던 선물을 방문 학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시인이 하트모양의 목걸이는 애니에게, 반지 하나는 애니 동생 제니에게 주고 런던을 떠났다. 그걸 받았을 때 애니가 동생 제니에게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해냈다. “가난한 주제에 웬 걸 샀겠어, 어머니 패물을 슬쩍해 왔겠지....” 이제 그렇게 매달리는 아폴리네르를 뿌리친 애니의 속마음이 어렴풋이 정체를 들어낸다. 그것은 갓 등단한 시인의 가난이었다. 1965년 아폴리네르 연구학자들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상연된 <내 이름은 기욤 아폴리네르>란 영화에 애니를 초대했다. 애니는 87살에 눈을 감는다. 아폴리네르보다 근 반세기를 더 산 것이다. 애니를 피끓게 사랑했던 아폴리네르가 남긴 시는 너무나 많다. 그중에서도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문학적 평가로 보면 ‘미라보 다리’를 훨씬 능가하는 한탄과 회상이 교차하는 고품격 295행의 長詩다. 그러나 희랍고전 같은 소양이 부족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시다. 더구나 애니와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그린게 아니라 ‘새로운 서정시’란 이름으로 문학사에 특기할만한 새양식을 도입한 첫시로 발표된 것이다. 시인은 이 시의 소재만 애니와의 사랑을 차용했지, 시적 변용과 재창출을 아낌없이 구사한 빼어난 작품이었다. 10여년뒤 아폴리네르가 약혼녀 마들렌 파제스(Madeleine Pages)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날 애니와 불 같았던 사랑이 자기 과오였다는 걸 고백하고 있다. 분명 우리도 같이 읽어보아야 할 글 같아 길지만 여기 인용한다. “1903년부터 쓴 ‘사랑 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스무 살 때 나의 첫사랑을 기록한 것이오. 독일에서 만난 영국여자였소. 1년 사귀었소. 그리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소. 서로 편지도 쓰지 않았소. 그런데 이 시의 많은 표현들은, 나를 전혀 이해 못한채 나를 사랑하고, 환상의 존재인 시인을 사랑 한 것에 당혹해 하던 젊은 여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고 모욕적이었소. 나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사랑했소.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서로 어긋나 있었소. 그녀는 우아하고 명랑했소. 나는 이유없이 그런 그녀를 완전히 독점하고 싶었소. 그녀가 떠나고 난뒤 허전한 나머지, 무명시인이었던 나는, 그 당시의 내 정신상태를 시로 그려내게 된 것이오. 그녀를 만나러 런던에 두 번 갔었지만, 결혼은 불가능했고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버렸소. 그래서 나는 대단히 고통을 받았소. 이 시가 그것을 말해주오. 이 시에서는 내가 사랑 받지 못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사랑을 잘 하지 못한 것은 나였소.” (계속) July 7, 2011 씨야 15 김호중 'Linda' Molina De Silva를 불어 발음으로 '랭다'라 하셨군요. "미라보 다리의 여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이란 제목으로 정청자(15) 님이 쓰신 글을 읽고나니 아폴리네르 시인의 그림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김 선배님, 정 동기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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