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회장의 신앙질문

2012.01.08 10:08

김영교 조회 수:361 추천:6


인간의 해답은 물음에서 나온다. 물음이 없는 곳에는 답도 없다. 물음이 없이는 발전도 없다. 물음은 곧 창의성이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고대문명인 이집트와 오리엔트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상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멸되어 버렸고, 지중해에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왜 어느 것은 소멸되고 어느 것은 탄생했는가, 근본이유는 무엇일까?

 

우상종교는 물음이 없고, 헬레니즘을 만들어낸 고대철학자들과 헤브라이즘을 만들어낸 유대인들은 만물의 근원과 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발명도 왜? 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너 오늘 선생님에게 무엇을 물어봤니?” 라고 묻는 반면 한국 엄마들은 “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라고 묻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유대인들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세계진출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고 이병철회장의 질문이 화제가 되는 이유는?

세간에서는 유명한 재벌의 질문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인 입장에서 보는 시각은 다르다.

재벌이 아닌 평범한 사람, 또는 어느 이름 없는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 질문을 던졌다면 기독교는 성실하게 답을 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차동엽 신부의 책과는 달리 복음주의 적인 입장에서 열린복음교회 이요한(영제) 목사의 답을 특집으로 엮어보기로 하자.
 

이병철 회장의 질문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드러내셨다.

한 가지는 자연계시이며, 한 가지는 역사계시이다.

 

자연계시란? 일찍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언급했듯이, 자연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조주의 존재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고백을 적었다.(롬1:20-23)

역사계시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한 하나님의 현현을 말한다.

크게 두 가지... 3,500년 전 출애굽과 함께 시내산 율법을 받은 사건이 그것이며,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그것이다.

 

대부분 이런 식의 계시는 일반종교에도 있는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시내산 율법을 주신 이유는?

신을 이용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는 시대였다.

그 결과 고대국가는 소수의 가진 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사회가 되었다.

 

이때 한 민족(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 억압에서 해방을 시켰으며,

해방을 경험한 수혜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을 맺고 사명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시내산 율법... 계급사회에 대비된 평등사회공동체 구현원리이다.

그 대표적인 율법내용이 안식년법과 희년공동체법이다.

 

시내산 율법으로 계시된 사건에 대해 모세는 ‘하나님의 강림하심’이라고 표현했다.(출20:20)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율법의 계시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내신 역사적인 사건이다.

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이다.

단순히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전 인류를 상대로 하여,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형적인 원리의 모습이다.

 

또 한 가지 역사적인 계시...현현은? 바로 성육신 사건, 예수님의 탄생이다.

신이 인간이 되심에 대하여 기독교자체에서도 A.D. 325년 니케아종교회의를 시작으로 수 백 년 동안 수차에 걸친 수없는 종교회의를 거쳐 성육신 사건에 대한 정의를 내릴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은 시내산 율법정신인 평등사회구현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그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이 멸망에 이르기까지 실현되지 않게 되자,

더 이상 인간이 부인할 수 없는 방법...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내려오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변질된 시내산 율법을 회복하여 완성하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어쩌면 인간은 자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부모님의 희생을 비롯한

지극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참으로 부족한 것 같다.

신이 인간을 위해 친히 오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깨닫는 마음이 참으로 부족하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제물을 받는, 섬김을 받는 신은 있어도

인간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사랑의 신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 예수 밖에는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것은 독선이 아닌 오신 이유를 말하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이유, 성육신하신 이유를 온 인류가 깨닫고 실천만 한다면

인류가 그토록 원하는 평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한 가지 더...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원하면서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인간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돕기 위한 시스템... 부활의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신다 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성령으로 사람을 통해, 때로는 직접 인간에게 똑똑히 드러내고 계신다.

다만 2천년이 지난 오늘... 그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인의 수가 심히도 적다는데 대해 안타까울 뿐이다.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먼저, 증명이란 말은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증명하는 자와 증명받는 자... 양쪽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성립된다.

1항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증명하는 방법은 몇가지가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란 것은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특별한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원리를 말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조차도 대부분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성경의 주제를 사랑 또는 예수... 이런 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창조의 원리가 사랑원리이며, 그것이 구원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마음이며 삶이다.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과 사랑이란 말과 구원이란 말과 하나님, 예수는 동일하다.

성경을 통해 이 말을 들었으니 1차 증명되었다.

 

이제 이 말이 눈으로 볼 수 있으면, 손으로 만져볼 수 있으면 증명이 되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 자연의 원리... 동식물의 개체번식의 원리는 곧 희생과 사랑의 원리에 부합한다.

동물이 새끼를 낳아 기르는 모습...연어의 산란 모습...다큐를 보노라면 눈물이 날 정도로 처절하다.

그것은 곧 사랑이다.

 

하나님은 이 창조의 원리, 사랑, 구원의 원리를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몸소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실천하셨다.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사건으로...(요20:25-29)

부모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라고 불렀을 것이다.

 

우주의 창조... 거기에도 희생적인 사랑의 원리가 존재한다.

태양은 끝없이 자기를 태워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해 주고 있다.

내가 알기로 어떤 경전도 천지창조에 대해 이리 말한 것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당대에 헬라철학에 능한 에베소, 로마인들을 의식하여 예수를 소개할 때 고대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최초로 사용했다는 유명한 단어,

로고스(lovgo"), 원리라는 말로 대신하여 설명했다.

하나님 = 로고스(lovgo":원리) = 창조주 = 예수 = 빛 = 진리 = 생명 = 길 = 사랑...

이런 도식으로 말이다.(요1:1-6, 14:6, 요일4:7, 골1:15-17)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이미 진화론은 잘못된 학설로 판명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나 진화론의 유일한 증거였던 중간화석이 오류였으며,

최초의 인류의 두개골이 조작된 것임이 발표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신의 존재는 부인되고 있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곧 신의 존재에 대한 도전이라는 등식이 되고 있다.

현대과학이 말하는 생명공학이 언젠가는 실효를 거둘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신의 존재가 부인될 것이라는 생각...

 

이 질문은 잘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신중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문명의 이기를 반대하거나 상충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다만 인간이 과학과 문명을 발달시키는 목적이 인간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반대 하실리도 없고 그런 사람들이라면 생명공학이 발달하여 수명이 연장되었다고 해서 그런 사랑의 원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리도 없다고 본다.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존재한 다고 본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며,

또 한 가지는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버리지 못하여

보여주는 선교의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5. 신이 인간을 사랑 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역시 질문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질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은 로고스다. 법, 원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을 만드신 분이라는 표현보다는 인간이 고통과 불행을 자초했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창조의 원리, 사랑의 원리를 거역한 결과로 보면 된다.

본인이 직접 거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진리를 거역하면

반드시 그 여파는 공동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가진 자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반대급부적으로 누군가는 빈곤을 겪어야 한다.

가난한 자가 도둑질을 하면 반대급부적으로 사회는 불안해 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론적으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평등사회공동체의 원리를 천명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엔 법칙이 있다.

만약 내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그 사랑이 성립이 안 된다.

그러고 나서, 즉 사랑의 법칙을 어기고 나서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그것은 억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성경 서두부터 사랑의 법칙, 원리... 선악과 원리를 주셨다.

살고 죽는 길이 있음을 선언하셨다. 행복과 불행의 길... 인간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의 길을 선택하도록 진리를 선포하고 계신다.

자연을 통해, 역사를 통해,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삶과 죽음... 성경은 인생이 있고 영생이 있다고 말한다.

인생에서의 행복과 불행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영생에서도 영생과 영멸이 있다.

사후세계의 존재로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

 

왜 죽게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보다는 죽은 후에 대책이 있음을 아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통한 삶은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6. 신은 왜 악을 만들었는가?

예: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

 

계속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질문들...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 기사 중에 첫날... 빛과 어두움이 언급된다.

빛과 어두움은 창조원리로 이해가 가능하다.

악을 왜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어둠을 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과도 같은데...

 

먼저 어두움이란 원리를 생각해보자.

과학적으로는 빛을 입자로 증명하고 설명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빛은 무엇이고 어두움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어두움은 빛이 부족한 상태이다.

빛이 주어지기만 하면 어두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빛도 현실이고 어두움도 현실이다.

 

인간의 악도 이 창조의 원리... 빛과 어두움의 원리로 이해가 가능하다.

빛과 어두움은 선과 악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빛과 어두움은 만들었다기 보다는 원리로서의 이해를 하자면...

선과 악도 하나님이 악한 사람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악이란 선이 없는 상태로 보는 것이 훨씬 원리에 부합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표현으로 보자면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라고 했다.(약5:20, 벧4:8)

사랑의 하나님은 악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어두움에 처한 그에게 빛, 진리, 사랑을 부어주므로 선한 사람을 만드신다.

어떤 악인이라 할지라도 돌아서기만 한다면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하고 돌아서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법칙이다. 법칙... 하나님도 법칙을 무너뜨릴 수 없다.

사람이 법칙을 어긴 것이지 흉악범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 백지장 같은 차이의 선과 악을 넘나들게 되어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고전 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인간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으나 그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법칙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한 법칙은 국가의 헌법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헌법과 판결은 때때로 부정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악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선이 부족한 상태가 바로 악이라는 창조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악을 왜 만들었는가? 라는 질문보다는

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 를 물어야 질문이 성립된다.

악은 진리의 빛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법이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사실 기독교의 기본 조항인데, 이것은 설명이 길다.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해보자.

우선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은 2 천 년 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에 유대사회는 귀족층과 서민층으로 양분화 되어 있었고

서민층은 종교적인 기준을 앞세워 죄인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생각이 달랐다.

종교지도자(서기관,바리새인)들은 서민들을 정죄하고 무시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했다.

 

성경의 죄사함이란 두 가지 개념이 있다.

① 당시의 서민신분의 대명사인 죄인의 칭호를 벗겨주는 것...

②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모든 죄의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서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전자에서의 죄는 신분을 말하고

후자에서의 죄는 도덕적인 죄를 포함한 하나님의 평화의 진리를 구현하지 않은 죄를 말한다.

평화의 진리란 사회공동체원리와 함께 개개인의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한 삶을 말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의 죄사함이란? 역시 두 가지로 생각해보자면...

① 죄의 결과에 대한 처리...

② 죄의 원인에 대한 처리...

죄의 결과는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대신 짊어지심을 믿으면 탕감받고 벗어지게 된다.

죄의 원인은 보혜사 성령을 마음속에 간직하면 죄의 원인치료도 가능하다.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이것은 죄를 지은 인간입장에서의 일종의 핑계라고 볼 수 있다.

죄의 길을 허락하셨다고 본다면, 의의 길도 허락하셨다.

의의 길을 허락하신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말이 없고 왜 반대쪽만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양심을 주어서 만드셨다.

이 양심이 죽어있으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변명하며 합리화 시킨다.

CEO가 되어 사람을 관리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양심이 살아나면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신다.

고난이라는 채찍으로 우리를 돌이키는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시하고 돌아서지 않은 것이다.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인간이 만나는 최후의 스승이다.

고난이란 스승의 교훈을 거역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은 고난의 홍수위에 좌정하여 나타나신다고 고백했다.(시29:10)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형벌로 징벌하지 않으시고

고난이란 과정을 통해 돌아설 기회를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죄를 짓게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보다 먼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해야 순서가 맞다.

인간이 자신을 알고 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자연히 알게 된다.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할 수 있나?

 

흔히 성경은 계시 받는 자를 통해 일방적으로 기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고백으로는 성립될지는 모르지만 현실적인 이해는 부족한 답이다.

 

시대마다 현실을 고민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구두전승이라 한다.

후대에 이 구두전승과 단편적인 문서들을 수집하여 정경화 했다.

구약성경39권은 A.D. 90년, 신약27권은 A.D. 397년에 정경화 되었다.

 

시대를 고민하는 이 성경저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정과 방법의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단순한 신비한 현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과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그 시대에 나타나셔서

죄악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내용이 바로 성경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성경의 모든 내용이 창조의 원리, 사랑의 원리, 구원의 원리,

행복과 평화의 원리에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비한 어떤 종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아주 쉽게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곧 하나님 자신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그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시대마다 선지자를 불러서 선포하게 하셨고

2천년 전에는 직접 성육신하셨다. 그것이 증거이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종교가 생겨난다.

인간은 지극히 제한적이고 현상적인 것만 겨우 보고 안다.

너무 커도, 너무 밝아도 못보고, 세균처럼 너무 작아도 못 보고,

너무 큰 소리도 못 듣고 초음파처럼 너무 작아도 못 듣는다. 당연히 한계에 부딪힌다.

 

종교란 근본적인 것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宗敎)의 그 종(宗)자가 마루 종(宗), 가르칠 교(敎)...

즉 종교란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다.

 

위대한 인간이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게 되고 종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세상곳곳에 학교가 없는 마을은 많아도 종교가 없는 마을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만물 중에 특별하게 만들어진 인간의 구조를 이해시키는 용어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그것을 영혼이라고 이름 했다.

영혼이란 목숨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다른 생명체는 목숨만 있는데 비해 인간만이 목숨과 다른 영혼이 있다.

 

다시 말하면 본능만 있는 생물체에 비해 인간은 자율성이 있다.

자율성이 있다는 말은 본능대로 살수도 있지만 본능을 거 스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인간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영혼이란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기능이다.

이 영혼으로 인해 짐승과 다른 자율공동체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 영혼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고 죽음 후의 세계도 고민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그 해답도 얻을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의 기능이 상실되면 그것은 곧 짐승만도 못한 상태가 된다.

짐승은 영혼이란 자율성이 없는 대신에 본능에 충실하게 되어 잘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이 기능을 잃어버리면 이생도 영생도 모두 망가지고 만다.

우월한 만큼 거기에 합당한 책임도 존재하며 능히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인간은 영혼을 인정해야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게 된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속한 삶을 벗어날 수 없으며, 혹 환경적으로 넉넉해 질수는 있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보람과 영생은 누릴 수가 없다 .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분류는 인류의 4대종교... 이렇게 말하지만,

그 보다는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성 있다.

 

그렇다면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경계선은 무엇일까?

자기를 위한 것, 즉 기복신앙이 하등종교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희생할 줄 아는 것이 고등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위해 죽어주셨다는 십자가의 도는 당연히 고등종교라 할 수 있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대부분 신앙을 사후세계의 천국에 무게중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죽은 후의 천국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곧 인생의 천국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생의 천국이란 개인의 행복감을 포함한 평화로운 평등사회공동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확한 질문은 성경을 믿지 않고는 천국을 이룰 수 없는가? 라고 하면 좋을 듯싶다.

 

평등공동체와 사랑과 정의를 각기 말하지만 성경이 가장 완벽한 진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상황에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선포했고,

희망이 없는 세상 속에 오셔서 인간을 위해 죽어주는 신이기 때문에...

알아서 노력해보라는 신이 아니라, 영으로 도와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자체도 십자가를 말하지만 사실상 십자가의 원리와 그 삶에 대해서는

상당히 왜곡되어 있고, 퇴색되어 있다고 본다.

 

착한 타 종교인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역시 인생의 선행목적이 성경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질문이다.

선행의 목적은 죽은 후에 천국을 가기 위한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선행의 목적은 더 큰 그림, 더 원초적인 법칙, 원리...

천국과 같은 평화로운 평등사회공동체를 위한 진리의 길임을 이해되어야 한다.

기독교든 비 기독교든 착한 삶은 죽은 후에 천국을 가기 위해서 라는 말보다는

죽은 후에 천국 갈 사람의 당연한 삶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생과 사후 천국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중에서도 이원론 사상으로서

성경의 본질과는 아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성경은 인생의 삶과 사후천국을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후천국을 말하기 전에 인생천국공동체에 전념해야 한다.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독선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원리에 부합한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계급사회, 빈부의 격차를 부정하고 있다.

선행의 개념을 여기에 두고 있다.

물론 이 평등 원칙은 개개인 인간관계에도 적용하면 된다.

 

종교는 서로 대립하거나 적대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여 긍휼히 여기는 관계, 진리를 공유하여 더 깊은 진리를 추구하는 관계로서 선의의 경쟁(?) 관계라고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단시 한다는 것은,

용어상 이단 이란 말이 감정적인 적대관계가 아니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교리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단어로 본다.

 

타 종교에 관한 차별에 관해서 표면적인 것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이슬람교의 근본오류는 폭력을 합리화한 정복선교가 문제이다.

불교의 도덕적인 교리는 지당하지만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부분에서는 인간의 한계에 봉착하게 되고,

힌두교는 여전히 계급사회의 근간이 되어 많은 백성들이 구조적인 고통에 처하게 되고,

유교는 정확하게 말해서 종교라기보다는 정치철학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인류의 근원적인 구원의 원리를 창조의 원리인 희생과 사랑, 바로 십자가의 원리가 필요하다.

희생과 사랑의 원리인 십자가의 길로 모두가 모여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치이기 때문이다.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만물의 이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3차원의 세계는 직선의 세계가 한계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원, 구의 세계가 존재한다.

유한한 인간의 시각으로는 시간이 직선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흐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지구가 둥근 원, 구이기 때문에 가고 또 가면 원점에 돌아오듯이

인간은 죽은 후에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류의 잠재의식 속에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죽음에 대해 come back,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사후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면 천국과 지옥도 분명히 존재하게 마련이다.

죽은 후에 짐승은 썩고 인간은 짐승과 같은 생명체와 달라서

육체는 썩지만 영혼이 존재하기에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 썩을 것이냐, 영원한 생명일 것이냐..가 갈라질 것이다.

 

사도요한은 이에 대하여....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성경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잠시 후에 살필지라도 찾아볼 수 없으리라...또는,

오늘밤 네 영혼을 부르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등의 말씀이 있다.

언뜻 들으면 협박하는 소리같이 들릴 수 있다. 악하게 살면 벌 받는다는 식의 소리로 말이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때 그렇게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의 쪼잔한(?)분이 아니시고,

멀리, 더 크게 보고 계신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다.

세상적으로 재물과 권력을 얻은 자들은 대부분 악착같은 열심과 집념과 인내심도 많은 자들이다.

성공하고 나면 자랑할 만 하여 인간승리란 말을 붙여준다.

맞다. 성공했다. 대단하다. 이것이 인간의 관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다르다.

성경의 근본핵심인 평등사회공동체원리에 입각해서 보면

그가 가진 자의 책임을 다 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열심히 하면 결과가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것이 법칙인 것 처럼, 많이 가지게 된 자는 공동체속에서 힘없고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더 큰 사명이 있다는 것이 생명의 법칙, 창조의 법칙, 사랑의 법칙, 성경의 진리이다.

 

개인적으로 부와 권세를 누렸다고 해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근본적인 진리일수 없다.

인간의 그 좁은 생각 때문에 인류는 여지껏 평화를 이룰 수가 없었다.

가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 가르침...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우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평등사회공동체에 대한 사명을 받은 나라, 이스라엘...

종교와 정치의 일치 구조인 그 사회에서 기득권층은 다름아닌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귀족층이었다.

시내산 율법정신을 회복할 생각이 없는 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부자 되라는 말씀이 많이 있다. 반면 부자를 비난하는 말씀도 많이 있다.

상충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두 종류의 부자를 말하고 있다.

부자 자체는 결코 죄악일수 없다. 당연히 축복이다.

그러나 그 부자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이 되려면 사회공동체적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이 말씀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리이다.

재물과 권력을 가진자들의 기득권수호로 인해 평등사회공동체 구현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악이다.

부자 그 자체는 결코 악일 수 없다. 그러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악이라 말한다.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비 크리스천인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런 말을 했다.

“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해가 간다.

 

성경에도 지적했듯이 성전뜰 만 밟는 신자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하나님의 근본적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적인 목적만을 위해 교인이 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탈리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라고 묻는 다면 먼저는 많은 성직자들이 잘 못 가르친 때문이고,

물론 시대마다 올바른 진리를 고수하고 선포한 성직자들이 존재한다.

또 한 가지는 잘못알고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 때문에 그렇다.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이것도 역시 성경에 대한 오해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 심오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상식적인 것 같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신앙이 깊어지면 광인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어야 하고, 더욱 소박하고 소탈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하여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

 

성경이 그리 가르치고 있으며, 성경에 기록된 충실한 사명자들은 다 그러했다.

모세가 그러했고, 사무엘이 그러했고,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그러했다.

아마도 광인처럼 되었다면 그런 신앙인은 틀림없이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맹신도 였을 것이다.

순교자는 광인이 아니다. 사명에 충실한 다듬어지고 훈련된 아주 겸손한 사람이다.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은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폴랜드등 동구제국, 니카라구아등

 

이 부분에 대해서는 중세기독교와 봉건사회의 관계,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의 배경,

기독교국가들의 식민지쟁탈전으로 인해 일어난 세계1,2차 대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핵심만 우선 얘기하자면 중세기독교는 313년 세상의 권력과 부를 맏겨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잊어버린 채 중세봉건사회의 귀족층이 되고 말았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성난 민중들이 일어나 시민혁명과

피의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가 탄생하고 말았다.

이미 중세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었다. 세상의 죄악이었다.

그러니... 이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하겠는가?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앞의 질문들과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21.로마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중세교회의 대표적인 오류중의 하나이다.

사제는 하나님의 메신저, 봉사자이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말했다면 하나님자리를 대신한 것이 아닐까?

어느 성직자도 그런 교만한 태도는 가능하지 않다.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성경에 근거 했다기 보다는 중세기독교의 금욕과 고행을 위주로 한

수도원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한국의 최고라 할 만 한 기업총수,

그것도 인생이 무르익은 무렵에 던진 질문으로 볼 때 가슴 한 켠이 답답함을 느낀다.

몇 년 전 조선시대 상인을 소재로 한 ‘상도’라는 드라마에서 생긴 명언...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1917년 세워진 공산주의가 1991년 소련공산주의가 무너짐으로

지구촌에 이데올로기 전쟁이 끝이 나니까 자본주의는 승리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은 큰 오산이다.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 민주주의란 용어는 존재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자본주의, 진정 민이 주가 되는 민주주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776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과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같은 학자들의 말은

여전히 경청해야 할 소리들이다.

 

성경의 핵심은 다시 말하지만 평등사회공동체 원리...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세상...

이것은 사회원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 이상적인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적인 신앙원리가 합해져야 한다.

그것이 시내산 율법이전에 맺어진 약속...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

보충 해석을 붙이자면 “ 너는 다른 사람을 복 받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이다.

 

기업인의 철학이 아쉽다. 시내산 율법정신에 입각한 철학 말이다.

모름지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 국가의 대기업이 어찌 사기업이라 할 수 있는가?

이미 공개념이어야 하지 않는가?

23번 질문은 물음을 던지기 전에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봄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잘 정리된 글이 있어서 인용하고자 한다.

 

종말, 언제 오나?

종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약’의 관점이 필요하다.

옛 계약은 시내산 계약이며 새 계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맺은 언약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첫 번째 계약을 파기한 결과 나라가 망하고 전쟁의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었다.

두 번째 계약을 파기한 결과 A.D. 70년 로마에게 멸망을 당한다.

성경은 세 번째 계약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 계약이다.

따라서 계약을 파기하면 온 세상이 멸망하는 일, 즉 종말을 당하게 된다는 진리이다.

계약을 지킨 사람은 멸망이 아닌, 종말이 아닌 영생구원을 받는다.

구원받은 사람은 종말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움에 부르짖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 땅에 교회가 넘쳐나고 있다. 25%가 기독교인이라 한다.

그런데 죄악은 날로 심해질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불이 꺼진 등을 들고 있다는 말이다.

불꺼진 등불일수록 말로는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중세 암흑기에 교회는 면제부를 팔면서 구원의 확신을 주었다.

오늘날 교회는 면제부를 파는 격이 되고 있다.

변화된 삶은 언급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강조해주면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예배중심의 삶을 살면

건강과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은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예수의 심정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그 사람이 기름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증거는 마음에 확신에 있다라기 보다는, 변화된 삶에 있는 것이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후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신앙회복을 했지만

그들은 또 다시 계약의 본질인 구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요구를 채워주는 메시야, 정권교체를 이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말, 언제인가?

이는 구원받은 사람이 물어볼 질문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구원받은 자의 사명을 느끼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도할 뿐이다.

이에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탄식하고 계신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 (눅18:8)

 

- 열린복음교회 이요한(영제)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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