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시인 / 방석순

2011.11.18 16:27

김영교 조회 수:136 추천:24

가을의 시인  

방석순  2011년 11월 14일 (월) 00:21:53  


하얀 그림자를 뿌리며 석촌호수를 수놓던 몇 마리 백조들이 오늘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춰 버렸습니다. 호숫가 산책길을 꽃처럼 고운 단풍으로 물들이던 왕벚나무들도 이젠 거의 알몸을 드러냈습니다. 발밑에서 와삭거리는 낙엽이 하루하루 더 두껍게 쌓여갑니다. 어쩐지 허전하고 공연히 외롭고 누군가가 그립고… 방향도 없이 서성이며 무언가를 자꾸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바로 옆 벤치에서 초로의 한 남자가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바라보며 하얀 종이에다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떠나간 사랑에게 보내는 마음의 편지일까요. 혹시 만추의 감상을 시로 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며칠 전 늦은 밤에 보았던 TV의 특집방송이 떠오릅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남의 나라 옥에서 숨을 거둔 시인 윤동주(尹東柱)를 그 나라 사람들이 애도하고 추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序詩>

시인이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출간을 준비하며 쓴 시입니다. 우리가 사춘기 때 노래처럼 읊조리다 어느덧 까맣게 잊어버린 그 시를 일본사람들은 지금 중년이 되어서, 노인이 되어서 눈물을 흘려가며 외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명함 뒷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憧憬과/ 별하나에 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별헤는 밤>

이 시도 같은 해 같은 달에 쓴 것입니다. 윤동주는 이렇게 늦가을에 꼭 어울리는 시인의 이름입니다. 그의 시에선 외로움, 그리움, 부끄러움이 덩어리져 쏟아집니다. 그의 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서른도 채우지 못한 그 짧은 생애에 무얼 그리 저지른 죄가 있어 구절마다 부끄러움을 토로하고 참회의 한숨을 지었을까요. 읽다보면 공연히 미안해지고 덩달아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긴 숨을 토하게 됩니다. 아예 책을 덮어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서정과 순수의 시인. 그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별을 그리고, 고향을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고, 또 밝은 내일을 그렸습니다. 어느 시 한 편에서도 핏발을 세운 저항이나 저주, 신랄한 비판이나 비난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시인을 일경은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아들였습니다. 정말 그가 감옥에 격리될 만큼 위험한 사상범이었을까요? 시인은 스스로 “나는 世界觀, 人生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友情,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花園에 꽃이 핀다>”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를 후쿠오카 형무소에 밀어넣은 일제의 횡포는 좀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그런 그의 詩語를 다른 어떤 자극적이고 반동적인 언사나 선동 구호보다 더 두려워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쉽게 씌어진 시>

이 시는 일경에 검거되기 한 해 전 일본땅에서 쓴 것입니다. 한때 윤동주가 다녔던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졸업생들은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만들어 그의 시를 읽고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모임의 한 여성은 시인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물처럼 자랑했습니다. 그는 “윤동주의 시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시대는 물론 언어의 장벽을 넘어 마음을 울린다“고 말했습니다. 10여년 전 만주 용정으로 시인의 생가를 찾았었다는 그는 ‘시인을 우리가 죽였다’는 죄스러움에 지금껏 흐느끼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습니다.

윤동주가 교토로 옮겨 다니던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정에는 선배 정지용(鄭芝溶)과 그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시인이 생전에 즐겨 산책하던 우지(宇治) 강가에도 기념비를 세우겠다며 벌써 5년째 교토 부청(府廳)과 줄다리기 중이랍니다. 그들은 윤동주를 한 민족과 문화에 대한 사랑을 넘어 인류평화를 염원했던 시인으로 기리고 있었습니다.

시인이 27년여의 짧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에도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년 국내 인사들을 초청해 함께 추모제를 열며 시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열기는 드라마나 K-팝이 주도하는 한류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일본땅에 널리 깊이있게 퍼져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를 낭송하고 토론하고 연구하는 그들의 지극한 윤동주 사랑에 ‘이러다가 시인을 저들에게 빼앗길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염려까지 들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차창 밖 한 해의 수고를 거둬들인 들녘이 허허롭습니다. 고개 숙인 해바라기 머리 위로 하늘이 파랗게 높아갑니다. 책장 깊은 곳에서 케케묵은 먼지에 덮여 있을 윤동주, 그의 시집를 꺼내 세상 사는 부끄러움을 다시 일깨워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의 맑은 詩心으로 오염된 영혼을 조금이나마 씻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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